베이브 루스

뉴욕 양키스의 영구결번
1234567
빌리 마틴데릭 지터베이브 루스루 게릭조 디마지오조 토레미키 맨틀
891015162023
빌 디키 &
요기 베라
로저 매리스필 리주토서먼 먼슨화이티 포드호르헤 포사다돈 매팅리
32374244464951
엘스턴 하워드케이시 스텡겔마리아노 리베라 &
재키 로빈슨
레지 잭슨앤디 페티트론 기드리버니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유니폼을 입고.


영광의 뉴욕 양키즈 시절.

350px
"Babe" Ruth. 1920년. Colored History.[1]
이게 만 25세의 얼굴이라니[2][3]
이름George Herman Ruth
조지 허먼 루스
출생1895년 2월 6일(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사망1948년 8월 16일(뉴욕 주 뉴욕)
국적미국
체격187cm
포지션투수, 외야수
투타좌투좌타
프로입단1914년 자유 계약(보스턴 레드삭스)
소속팀보스턴 레드삭스(1914~1919)
뉴욕 양키스(1920~1934)
보스턴 브레이브스(1935)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베이브 루스
헌액 연도1936년 - 최초의 5인
헌액 방식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95.13% (1회)
1923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조지 시슬러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베이브 루스
(뉴욕 양키스)
월터 존슨
(워싱턴 세너터스)
스포츠 선수를 목표로 하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종목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과 비교해서 어떤 것이 가장 나은지, 어떤 것을 가장 좋아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 종목에 빠져들 수 없다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힘이 나오지 않습니다. 저요? 저는 공 치는 걸 가장 좋아합니다.

1 개요

1900년대 초반 메이저리그의 야구 선수. 투수로서 메이저리그 경력을 시작하였으나,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후엔 타자로만 활동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홈런 생산력으로 데드볼 시대를 끝내고 '홈런의 시대'를 열었으며,[4] 소속 팀 양키스도 그의 활약과 관중 동원력을 바탕으로 전설적인 팀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야구라는 종목의 패러다임 변화를 주도하며 범접할 수 없는 기록을 세웠기 때문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야구 선수'로 평가되며, 그가 고연봉을 요구하면서 자연스럽게 모든 메이저리거들의 연봉이 상승했다는 점, 지금과 같은 초거대 야구단 양키스를 있게 했다는 점을 덧붙여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야구 선수'로도 꼽힌다.

이후 루스의 아성에 도전한 타자들은 여럿 있지만, 조금이라도 능가했다고 널리 인정받은 선수는 현재까지 나오지 않았다. 특히 '야구 선수'로 평가한다면 더욱 격이 높아진다. 루스는 타자로서도 위대하지만, 투수로서 쌓은 업적도 탁월하고, 특히 포스트시즌에서는 가히 언터처블 수준의 좌완이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베이스볼 페이지는 선수 코너에서 해당 선수와 비슷한 스타일이거나 비슷한 경력을 지닌 선수를 소개하곤 하는데, 테드 윌리엄스에 대한 코너는 'Nothing'이지만 베이브 루스에 대한 코너는 'Are you kidding?'이다. 즉, 이 양반과 비교되는 야구 선수는 존재할 수조차 없다는 것.

2 통산 성적

타자투수
타율출루율장타율OPS조정 OPS순장타율안타wRC+홈런경기선발ERA탈삼진이닝완투완봉WHIP
.342.474.6901.164206.3482873197714[5]1631472.2894464881221.1107171.159

굵은 글씨 처리한 장타율, OPS, 조정 OPS, 순장타율, wRC+는 통산 1위이다. 세부 사항은 링크 참고.

3 일대기

3.1 시작

1895년 2월 6일 메릴랜드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6] 가족이 술집을 했기 때문에 자라는 환경이 대단히 좋지 않아 동네의 문제아로 손꼽히던 아이였다. 그러다 7살 때 들어간 성 마리아 실업학교(St. Mary's Industrial School)에서 선생으로 일하던 머사이어스 보틀리어(Matthias Boutlier) 신부를 만나 야구에 입문, 야구 선수 인생을 시작한다. 남들보다 두 배는 되는 덩치 탓에 처음에는 포수를, 그 후 왼손 투수를 하게 된다.

이후 성 마리아 실업학교의 야구 팀에서 뛰어난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던 중 볼티모어 오리올스(Baltimore Orioles)[7]의 잭 던 감독의 눈에 들어 1914년 2월부터 마이너 리그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때 '베이브'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프로 생활이 처음이라 뭘 몰랐던 데다, 아직 촌티를 못 버리고 감독만 따라다녔기 때문에 "어린애"라고 불리게 되었다. 즉 처음에는 애칭이 아니라 멸칭이었다.

파일:CYFti3s.gif
투수 베이브 그냥 캐치볼 장면 같지만 넘어가자

그리고 1914년 7월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좌완 투수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승승장구하나 그 당시 남다른 타격의 재능을 보여 마침내 타자로 전향했다. 1918년 시즌, 워낙 독보적인 타격 재능을 숨기지 못하고 투수로서 13승을 올림과 동시에 타자로서도 단 95경기만을 뛰고도 11개의 홈런을 쳐내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에 등극하게 된다. 당시 최고의 좌완 투수로서 투수로 뛴 기간 동안 승률 1위(.659), 피안타율 1위였다(9이닝당 7.07개). 같은 기간 아메리칸 리그에서 이거랑 비슷한 성적을 낸 사람은 단 한 명, 월터 존슨뿐이었다. 심지어 1916년에는 그 월터 존슨을 제치고 아메리칸 리그 평균 자책점 1위를 한 적도 있다.

야구 기자 제이슨 스타크는 역사상 가장 과소평가된 좌완 투수 1위에 베이브 루스를 선정했다.[8] 레드삭스 시절 월드시리즈에서 1916년에는 14이닝 1실점 완투승, 1918년에는 9이닝 완봉승, 8이닝 2실점으로 3경기 선발 등판해 31이닝을 던지며 3승 평균자책점 0.87을 기록했는데 이것은 월드시리즈 역사상 4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레너드 코페트는 당시에 지명타자 제도가 있었다면 하루는 선발투수로 등판, 이후 휴식일에는 지명타자로 출장해 400승 800홈런이 가능했을 거라고 예측했다(…). 휴식일에 경기에서 빠따 치는 게 휴식이라는 거냐 베이브 루스는 타자 전향 이후에도 투수로 1년에 1, 2경기 정도 등판한 적이 있다. 특히 선수 말년인 1930년과 1933년에는 등판하여 9이닝을 다 던지는 완투승을 거둔 적도 있다.

3.2 밤비노의 저주

그러나 1920년 1월, 레드삭스의 구단주 해리 프레이지(Harry Frazee)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투자했다가 본 손해를 갚기 위해 루스를 12만 5천 달러에 뉴욕 양키스현금 트레이드했다. 당시 보스턴의 새로운 홈 구장인 펜웨이 파크를 짓느라 빌린 공사비를 변제하려고 루스를 팔지 않았겠느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펜웨이 파크는 당시로서는 거금인 65만 불이 들어가긴 했으나 1912년에 완공되어 있었고, 프레이지는 그 후인 1916년에 구단을 현금 박치기로 50만 달러에 전 구단주로부터 사들인 상태였다. 1918년 보스턴의 우승을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프레이지는 뮤지컬 쪽으로 한눈을 팔았다가 망하면서 단번에 파산 위기에 처해버렸고, 루스의 직접적인 트레이드 사유는 이 때문이었다.

이후 베이브 루스의 미칠 듯한 홈런 행진으로 양키스는 20세기 최고의 명문 팀으로 거듭났지만, 보스턴은 1918년 월드시리즈 우승 이후로 2004년까지 86년 동안 월드시리즈에서 단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루스의 애칭을 따서 지어낸 것이 그 유명한 '밤비노의 저주'이다. 밤비노는 이탈리아어로 '어린애, 애송이'에 해당하는데, 당시 양키스 외야 관중석의 다수를 이탈리아계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이 루스의 애칭인 'babe'를 이탈리아어 식으로 '밤비노'라고 부른 것이다. 베이브 루스가 이탈리아계라서 '밤비노'로 불렸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루스의 부모(George Herman Ruth, Sr., Katherine Schamberger) 둘 다 독일계고, 당연히 루스 역시 독일계다. 즉, 밤비노라는 그의 명칭은 혈통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베이브 루스는 같은 독일계인 루 게릭과 함께 양키스 내 독일계 미국인의 상징적 존재였다.

처음부터 대중들이 루스가 레드삭스를 상대로 저주를 걸었다고 인식한 것은 아니고, 1986년 월드 시리즈에서 레드삭스가 빌 버크너의 믿을 수 없는 알까기 어메이징을 당하고 나서 뉴욕의 한 스포츠 칼럼니스트가 '밤비노의 저주'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 전까지는 루스의 이적은 단순히 돈이 급했던 보스턴 구단주의 뻘짓 정도로 인식되는 정도. 사족으로 베이브 루스의 케이스는 트레이드가 아니라 엄밀하게는 그저 '팔렸다(sold)'라고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1920년 양키스로 갔을 당시 1월 6일자 보스턴 포스트의 기사 제목은 'Babe Ruth sold to the Yankees(베이스 루스 양키스에 팔리다)'이기도 했고. 관련 동영상, 마지막 1등 내용 참조.

3.3 양키스 이적: 신화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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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는 양키스로 이적한 후 그야말로 대폭발, 이적 첫 해에 홈런 54개를 기록하며 이전 해에 기록한(타자로서 풀 타임 첫 해) 메이저리그 홈런 기록 29개를 재경신했다. 루스 이전까지 메이저 공식 기록은 27개, 아메리칸 리그 공식 기록은 24개. 풀 타임 첫 해에 메이저 기록 갱신하고 2년째에 25개를 추가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까지만 해도 약체였던 양키스가 월드시리즈를 제패하고, 나아가 메이저리그 최고의 구단으로 만든 것이 루스였다.

전성기 때에는 도루 시도도 자주 했었다. 단, 호타준족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도루가 많았던 시즌도 도루자가 더 많았다. 1923년이 도루 커리어 하이(?) 시즌으로 17도루를 했지만 도루자가 21번이었다. 그가 도루 시도를 했던 것도 상대 투수를 자극하기 위한 것이었지, 클러치 상황의 득점 생산성을 올리기 위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통산 도루 성공률도 50%를 겨우 넘는 수준으로 현대의 야구 연구자들이 말하는 의미 있는 성공률이 아니었다. 신체 조건과 주력은 문제가 없었으나 주루 센스가 형편없었던 탓이다.

한편 1924~25년엔 자신의 재능을 믿고 연습을 게을리 하며 지나친 음주로 자신을 망쳤던 시기도 있었다. 이때(1925년, 그리고 규정 타석 미만이었다) 홈런왕을 한 차례 내줬는데, 홈런왕은 33개를 친 팀 동료 밥 뮤젤이었다. 그 당시 루스에게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늘 따라다녔으나 1926년부터 마음을 독하게 먹고 다시 연습을 시작하여 슬럼프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1927년에는 당시로서는 말도 안 되는 시즌 60홈런(리그 전체의 15%에 해당했다)을 기록했고,[9] 루 게릭과 함께 살인 타선(murderers' row)을 구축하며 양키스 전성기의 상징이 되었다. 이 당시 60홈런이 얼마나 대단한 기록이었는가 하면, 양키스가 속한 아메리칸 리그의 팀 홈런 2위가 56개를 기록한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였다. 내셔널리그 홈런왕은 루스의 딱 절반인 30개를 때려낸 핵 윌슨이었다.[10] 여담으로 60홈런을 치고나서 덕아웃에 돌아올때 이런말을 남겼다 "60개야 60개!! 씨발 어떤 개새끼가 이 기록 깨는지 보자고!!"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신체 능력과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감독이었던 조 매카시와 대립이 불거지기 시작, 1934년에 커리어 로우를 기록하자 양키스는 루스를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시켰고 거기서도 변변한 성적을 남기지 못하고 시즌 도중 은퇴했다. 메이저리그에서 총 22시즌을 뛰며 통산 714개의 홈런을 때려내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루스의 등장은 그때까지만 해도 안타와 도루가 중심이 되었던 스몰 볼 야구가 홈런 등 장타 중심의 빅 볼 야구로 바뀌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의 등장 이후로 로저스 혼스비, 핵 윌슨, 지미 팍스, 루 게릭 같은 20~30년대를 풍미한 슬러거들이 등장했음은 당연한 결과이다.

3.4 은퇴

은퇴 후 감독을 하려 했으나, '스스로를 컨트롤하지도 못하는 인간이 팀을 감독한다고?'라는 평이 대다수라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선수 시절에 개인 관리가 잘 안 되어 술도 자주 마시고, 이를 찍던 기자 멱살을 잡고 내던지는 일도 벌였다. 당연히 기자들이 신나게 기자 폭행이라고 1면으로 까면서 언론과 사이가 한동안 나뻤다. 그나마 나중에는 그 기자를 술자리에 초대하여 화해하기도 하고 기자들을 배려하면서 슬럼프에 빠진 그가 열심히 운동하는 것에 기자들이 루스가 최선을 다한다고 긍정적으로 보도하기도 한다. 아무튼 여러 모로 말이 많았고 말년에 보스턴 브레이브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할 때도 성적이 안 좋았다. 은퇴 후에는 잠시 브루클린 다저스 코치를 했지만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

이후 명예의 전당최초의 5인 중 한 명으로 입성했다.


1948년 8월 후두암으로 타계했다. 위의 사진은 루스가 타계한 해 6월 양키 스타디움 개장 25주년을 기념하는 초청 행사에서 찍힌 사진인데, 이것이 루스가 마지막으로 팬들 앞에 모습을 보인 자리였다. 루스의 뒤쪽에서 촬영하여 그의 상징과도 같은 등번호 3번과 그를 보기 위해 찾아온 관중 수만 명을 함께 보여준 것이 포인트. 참고로 이듬해인 1949년 퓰리처상 보도 사진 부문을 수상했다. 사족으로 이 시점엔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루스는 1946년경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고) 자세히 보면 야구 배트를 지팡이 삼아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4 루스빠

워낙 남긴 기록이 엄청나다 보니 미국 내 보수적인 백인들은 자연스레 루스 빠돌이가 되었고, 한때 루스의 홈런 기록을 넘어서려는 선수들에게는 온갖 원색적인 비난과 협박이 쏟아지기도 했다.



로저 매리스의 시즌 61호 홈런.

이에 대한 대표적 사례가 바로 로저 매리스. 로저 매리스가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61개로 홈런 신기록을 세웠을 때,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루스는 151게임 만에 60개 쳤는데, 매리스는 161게임 만에 61개 쳤으니까 무효'라고 개드립을 날리기도 했으며,매리스는 그 해 아메리칸리그 MVP를 수상하며 커리어하이를 기록했음에도,상처와 비난만 잔뜩 받은 채 시즌을 끝냈다.[11]그리고 1974년에 행크 애런이 통산 714홈런 기록을 넘어설 땐 인종 문제까지 들어가면서 루스 빠돌이들이 하루에도 수천 통에 달하는 살해 협박 편지를 보냈다. 애런이 715번째 홈런을 쳤을 때 마운드를 돌던 중 관중 2명이 난입하는데, 경기장에서 지켜보던 아버지는 그 관중이 애런을 칼로 찌를까 봐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이에 루스의 아내인 클레어 매릿 루스(1900~1976)는 남편 기록이 깨지는 걸 남편이 가장 기대할 것이라면서 이런 협박은 그만두라는 말로 응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루스는 백이었지만 두툼한 입술에 흑인 같은 모습이라서 상대 선수들이 '검둥이가 흰칠하면 저 놈이다'라며 야유했었다는 것. 루스와 사이 나쁘기로 유명한 타이 콥 같은 경우는 '너 정말 백인 맞냐?' 하고 비꼬는 바람에 루스가 '나를 개나 돼지라고 하면 모를까 검둥이라고 하면 죽여버린다'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에서도 인기가 많아서, 그를 포함한 메이저리그 올스타를 초청하여 일본 올스타 팀과 함께 친선 경기를 열기도 했다. 이때 루스는 대학생 선수에게 두 번이나 삼진을 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일본군에게 "천황 폐하께 저주를"이라고 도발하자, 일본군이 이에 대응하여 "베이브 루스에게 저주를"이라고 맞받아친 일화도 유명하다. 하지만 일본군이 저주를 받았지 지금도 도쿄돔 지하에 있는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는 베이브 루스의 몇 안 되는 친필 사인볼이 전시되어 있다. 참고로 메이저리그 올스타와 친선 경기를 가졌던 일본 올스타 팀은 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모체가 되며, 일본 측에서 유일하게 빛났던 선수가 바로 일본 사와무라상에 이름이 붙여진 사와무라 에이지였다.

5 후일담

2000년대 들어 마크 맥과이어, 새미 소사, 배리 본즈 등의 홈런 쇼로 루스도 점점 묻혀가나 했으나, 이들의 기록이 약물 복용으로 이루어졌다는 의혹이 짙어지면서 다시 '진정한 홈런왕은 루스와 애런이다'라는 여론이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애런 역시 자서전에서 암페타민 복용을 시인했다. 그리고 루스의 경우 양의 고환 추출물을 주사했다는 말이 있다. 현재 확인되는 영문 출처는 여기.

그가 죽은 1948년의 이듬해인 1949년부터 월드시리즈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선수에게, 2007년부터는 월드시리즈뿐만이 아니라 포스트시즌을 통틀어 가장 활약한 선수에게 베이브 루스 상(Babe Ruth Award)을 수여하고 있다. 베이브 루스는 월드시리즈 통산 투수로서 3경기 31이닝을 던지며 3승 평균 자책점 0.87, 타자로서 타/출/장 326/467/744, 15홈런 33타점을 기록하였으므로 투타 통틀어 최고의 선수였던 것을 기리는 점이다. 월드시리즈 MVP와 다른 점이 있다면 월드시리즈 MVP는 MLB 사무국에서 주는 거고, 베이브 루스 상은 미국 야구 기자 협회(BBWAA)에서 수여한다는 것이 차이점. 또한 1947년 4월 27일은 후두암으로 고생하던 베이브의 쾌유를 위해 베이브 루스의 날로 개최되었다.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이걸 읽어보자. 참고

6 어록

앞서 언급했듯이 험하게 자란 베이브 루스인지라 어록 역시도 험한 것이 많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돈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이 벌어들인 이득의 일부를 받아야 합니다. 야구가 은행이나 보드빌 쇼랑 다르다고 하지 말라고요. 말하건대 이건 비즈니스입니다. 고상한 감정따위 없어요. 잡소리 그만합시다."

ㅡ 1922년, 5만 2천 달러를 요구했을 때.


"What the hell has Hoover got to do with it? Besides, I had a better year than he did."

("제기랄. 대통령은 그 연봉 받고서 한 일이 뭐요? 내 성적은 대통령보다 훨씬 낫지 않소?")
ㅡ 1930년, 연봉 8만 달러가 너무 많지 않냐는 비난에 응답하면서. 당시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의 연봉이 7만 5천 달러였고, 미국은 막 대공황의 불황으로 접어든 상태였다.


"모든 메이저리거의 아내와 아이들은 식사하기 전에 '루스에게 행운이 있기를'이라고 기도해야 한다"

ㅡ 팀 동료였던 웨이트 호이트[12]


"그래, 그 놈은 또라이긴 하지만 당연히 (공을) 칠 수 있다구. 하느님 맙소사, 그딴 녀석이 (공을) 칠 수 있다니!"

ㅡ 1950년 7월 12일, 타이 콥을 두고 한 말. 물론 신문에 나갈 때는 검열 처리되었다.[13][14][15]


"야구가 아니었다면 저는 교도소나 공동묘지에 있었을 겁니다. (후략)"

ㅡ 1996에 프레드 리브(Fred Lieb)가 쓴 "내가 알고 있는 야구(Baseball as I Have Known It)"에서 발췌된 말. 당연하지만 거기서 일한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되었을 거라는 말이다.


"애송이, 충고 하나만 해 줄까. 놈들(기자들)이 너에 대해 좋게 쓰든 나쁘게 쓰든 아무것도 믿지 마. 두 번째, 벌이가 좋을때 벌어놔, 하지만 그걸 억지로 벌려고 고생하지는 말고. 그리고 너무 많이 쏘지말고!"

ㅡ 레드 그레인지에게 충고를 했을 때.[16]


"저는 최대한 휘두르고, 최대한 공을 맞추려고 합니다. 권투에서 당신의 주먹이 사람을 때릴 때는 대개 멈추게 되지만, 손을 멈추지 않는다면 어렵게나마 맞출 수 있습니다. 저는 같은 식으로 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배트를 단단히 잡을수록 공을 잘 맞출 수 있으며 멀리 날아가게 합니다. 전 제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세게 휘둘렀습니다. 전 세게 치거나 크게 놓쳤습니다. 전 가능한 한 크게 사는 걸 좋아합니다."

"스트라이크를 먹을 수록 나는 다음 번 홈런에 가까워진다."

"정말 감사합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여러분 들으시기에 제 목소리가 영 좋지 않지요. 뭐 저도 썩 좋은 느낌은 아니랍니다.[17] 우리네들의 야구경기는 어린시절로부터 시작되지요. 아주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말이에요. 그 어린 아이가 자라면서 야구경기란 어떤 것인가를 배우고 또 이렇게 선수가 되어 팀들을 대표해서 뛰는 다른 이들의 모습을 관람하러 경기장을 찾기도 하지요. 제 생각에 이 세상에서 진정한 운동경기란 야구가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아이들에게 풋볼공이나 야구공같은 것을 던져 주고 금세 자연스레 운동선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곤 하지요. 하지만 야구에서 그런 것은 통하지 않아요. 야구는 예닐곱 살 시절부터 저 아래 바닥에서 시작해야만 합니다. 열 네다섯 살이 되기까지 기다려서는 안되지요. 어렸을 때부터 야구와 함께 자라나야 합니다. 만약 정말 열심히 한다면, 여기 함께한 이들처럼 마침내 꼭대기의 자리에까지 도달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요. 오늘 저에게 정말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셨는데 이렇게 모두에게 감사의 표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기쁩니다.(Thank you very much, ladies and gentlemen. You know how bad my voice sounds. Well, it feels just as bad. You know, this baseball game of ours comes up from the youth. That means the boys. And after you're a boy and grow up to play ball, then you come to the boys you see representing clubs today in your national pastime. The only real game in the world, I think, is baseball. As a rule, people think that if you give boys a football or a baseball or something like that, they naturally become athletes right away. But you can't do that in baseball. You got to start from way down, at the bottom, when the boys are six or seven years of age. You can't wait until they're 14 or 15. You got to let it grow up with you, if you're the boy. And if you try hard enough, you're bound to come out on top, just as these boys here have come to the top now. There have been so many lovely things said about me today that I'm glad to have had the opportunity to thank everybody.)"

ㅡ 1947년 4월 27일 양키 스타디움에서의 고별사 중.

7 통산 1위 기록

  • 통산 장타율(.690)
  • 통산 OPS(1.164)
  • 시즌 득점(1921, 177점)
  • 시즌 총루타(1921, 457루타)
  • 통산 WAR(팬그래프 168.4, 레퍼런스 163.1)
  • 시즌 WAR(1923, 팬그래프 15.0, 레퍼런스 14.1)
  • 통산 wOBA(.513)
  • 시즌 wOBA(1920, .598)
  • 통산 wRC+(197)

8 예고 홈런(Called Sh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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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예고 홈런(Called Shot)'이라는 퍼포먼스가 유명하다. 1932년 10월 1일, 리글리 필드에서 열린 시카고 컵스와의 월드 시리즈 3차전에서 4대 4로 동점인 상황에서 상대 투수 찰리 루트를 상대로 홈런을 친다. 당시 상황은 투스트라이크에서 배트로 센터 펜스를 가리킨 후 컵스 포수 가비 하트넷[18]에게 "홈런을 날리는 데는 공 하나이면 충분하다."는 말을 한 후 149m 홈런을 쳤다고 한다.[19]

그러나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며, 당시 정황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가장 신빙성 있는 말은, 경기 전에 그런 내용의 장담을 하긴 했지만, 실제로 배트로 센터 펜스를 가리키거나 한 적은 없었다는 것. 기자가 별 생각없이 끼워넣은 일화였다는 설이 대세다. 한편 루스의 뒤에서 타격을 준비 중이던 게릭은 보았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상대 선수가 루스를 약올리는 말을 해서 홧김에, "네 머리를 날려버리겠다."라는 말과 함께 배트로 상대선수를 가리킨 것뿐인데, 우연히 타구가 그 선수 뒤쪽으로 날아가 홈런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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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1970년에 발견된 한 필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해당 영상은 1932년 10월 1일 경기가 찍힌 유일한 필름으로 아마추어 영화 감독이었던 맷 밀러(Matt Miller)가 3루에서 촬영 영상인데, 베이브 루스로 보이는 인물이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는 장면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펜스 뒤를 가리키거나 하지는 않았고 손으로 무언가를 쿡쿡 찌르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기 때문에 예고 홈런 장면이 아니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어찌 되었건 병상에 있던 어린 팬과의 대화 후 예고 홈런을 날렸다는 설은 만들어냈다는 의혹이 짙으며, 주변인들은 말이 많았지만 정작 베이브 루스 본인이 남긴 말이 별로 없었기에 홈런왕의 신화성을 부각하는 장치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도 어린애들에게는 관대했던 만큼, 미담으로서 아직도 회자되는 야구계의 전설이다.

9 트리비아

  • 베이브는 어릴 적에 자신이 힘든 소년기를 보낸 만큼 아이들을 많이 챙겼다고 한다. 선수가 된 이후에도, 그만둔 이후에도 종종 아이들을 찾아서 야구하는 법을 알려주거나 아이들을 돕는 재단을 만들기도 했다. 물론 자신이 자랐던 성 마리아 실업학교도 예외는 아니었고.
  • 자신이 소년들에게 관심을 쏟은 만큼, 어린이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매우 높았다. 한창 방탕한 생활을 보내던 시절에 시즌이 끝나고 집에서 파티를 열었는데 이때의 손님들 중 훗날 뉴욕 시 의원으로 당선되는 사람이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은 무렵에 대뜸 그는 '자네(루스)는 길거리에서 흙투성이 얼굴을 한 아이들이 자네를 신으로 여긴다는 걸 아는가?'라고 질문을 했다. 이게 루스가 데꿀멍하자, '그런 자네가 이런 생활을 보내야 되겠는가!'라고 꾸짖었고, 생활 습관을 고쳤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또한 루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유해가 운구된 양키 스타디움에는 7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홈런왕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찾아왔다. 그런데 그 중 절반이 소년들이었다. 하여튼 아이들을 어지간히도 사랑한 게 아니었는지 심지어 그의 무덤에조차 어린아이를 감싸고 있는 예수의 부조상이 루스 본인의 묘비보다 더 크게 새겨져 있다.

  • 양키 스타디움이 좌타자이던 그를 위해 우측 펜스도 짧게 지어주고, 우익수 쪽에 차양막도 쳐줬다. 하지만 원정 경기에서 우익수 쪽에 햇빛이 비치면, 좌익수였던 밥 뮤젤이랑 자리를 바꿔서 루스가 좌익수로 뛰었다.
  • 베이브 루스가 기록적인 홈런을 기록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선 다양한 추측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라이브볼 도입, 당시의 타격 기본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배터박스 앞에서 무게중심을 최대한 앞으로 당기는 파워 스윙,[20] 놉(knob)을 감싸는 타격을 한 것 등이 지목되고 있다. 베이브 루스가 최초로 놉이 있는 배트를 사용했다는 소문이 퍼져 있는데, 배트의 놉은 검의 폼멜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별다른 규칙이 없던 야구 초창기부터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하지만, 루스 시대에 지금과 같은 형태의 놉이 만들어졌고, 루스가 새끼손가락으로 이를 감싸는 그립을 최초로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이들 추측은 결과적인 분석이고 정설은 아니다. 애초에 베이브 루스가 홈런왕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시점은 데드 볼 시기의 말기이고, 전술했듯 놉을 감싸는 그립을 사용한 타자는 루스가 처음이었다. 타이 콥의 타격 자세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데드볼 시대의 타자들은 애초에 배트를 한참 올려잡았고, 장타 따위는 노리지도 않았다. 라이브볼 시대여서 루스가 유명해졌느냐, 루스가 유명해져서 라이브볼 시대가 열렸느냐에 대한 논란도 아직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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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구계의 전설이다 보니 1992년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베이브'가 제작되었다. 러브 스토리로 알려진 아서 힐러가 감독하고 주연은 실제 베이브 루스와 닮은 뚱뚱한 외모로 유명한 배우 존 굿맨.[21] 다만 구글에서 'babe movie' 키워드로 검색하면 동명의 새끼 돼지가 나오는 영화가 더 많이 걸린다. 사실 베이브 루스의 전기 영화는 "The Babe"로 돼지 영화와는 제목이 다르다. 당연히 the를 넣어서 검색하면 제대로 된 검색 결과가 나온다. 하지만 1200만 달러 저렴한 제작비로 만들어졌음에도 전 세계 흥행 수익은 1700만 달러를 겨우 넘겨 흥행은 실패했다. 반대로 아기 돼지 베이브는 3천만 달러로 만들어져 전 세계에서 2억 5430만 달러 대박을 거둬들였다
  • 미국 ESPN에서 베이브 루스의 기록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 결과를 내놓았는데 베이브 루스가 현역으로 뛴다면 13년 계약시 현재 환율로 계산하면 10억 6천만 달러를 받았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WAR 1당 600만 달러로 쳐서 계산했으며, 최근 다년 계약의 일반적인 현상인 연간 연봉 5% 상승 등을 고려해 산출했다. 이 계산법으로 치면 메이저리그 통산 660홈런을 친 윌리 메이스는 13년 총 9억 3천 100만 달러, 배리 본즈는 13년 총 9억 1천 600만 달러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구단주 : 뭐 1조원도 넘어? 어떻게 하라고? 구단을 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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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뚱뒤뚱월터 존슨과의 맞대결
  • 안타를 치고 1루를 향해 뒤뚱뒤뚱 걷는 모습이 비둘기와 비슷하다고 해서 '비둘기 걸음' 이라고 불렸다. 귀엽다
  • 후배 테드 윌리엄스가 '베이브 루스도 홈런보다 삼진을 훨씬 많이 당했으니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발언을 했던 것, 베이브 루스 자신이 했던 '스트라이크를 당할수록 나는 홈런에 가까워진다'는 발언, 그리고 기타 야구인들의 발언 때문에 그가 삼진을 엄청 많이 당한 걸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유명 영화배우 박중훈무릎팍 도사에 출연했을 때, '베이브 루스가 홈런을 많이 쳤지만 그 3배에 가까운 삼진을 당했다고 하더라. 아마 그는 (삼진이라는) 그런 실패에서 성공을 배운 것 같다. 그 얘기를 듣고 나도 그런 자세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개뿔 말도 안 되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실패? 누가 실패를 해? 실패한 적이 없는데
그는 700개가 넘는 홈런을 치는 동안 삼진은 그 2배도 안 되는 1330개밖에 없었다. 평균적으로 8타석당 1개의 삼진밖에 안 당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베이브 루스 활동기는 삼진 제도가 도입된 이후라 비기록 삼진이 나오던 시기도 아니다. 게다가 베이브 루스는 메이저리그 통산 출루율 2위(4할 7푼 4리) 기록자이며, 삼진 수가 홈런 수의 2배가 안 되는 선수는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드물다. 그리고 당연히 야구 역사상 규정 타석을 넘긴 그 어떤 선수 중에도 삼진이 홈런보다 적었던 선수는 없다. 거기다가 장타자라면 더더욱 그렇다. 일류 타자 중 삼진이 제일 적었던 경우로는 삼진 수와 홈런 수가 거의 같았던 조 디마지오(361홈런, 369삼진)가 있지만 그가 안타를 워낙 잘 쳐서 일류 타자인 거지 홈런 타자라기에는 홈런 수, 타석 수가 모두 부족한 데다가, 본인 실력이 조금 떨어지자마자 바로 30대에 자진 은퇴한 14 시즌 커리어 선수라 올타임급 홈런 타자라 칭하기에는 부족하다. 보통 30대 후반에서 40대 시즌에 홈삼비가 크게 나빠지는데 디마지오는 이때 선수 생활을 접었다. 이 부분 때문에 역대 최고 타격 본좌를 논하는 상황에서 조 디마지오가 5위권 밖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 천재적 타격 재능을 가졌음에도 데뷔 초 투수 활동을 하다가 20대 중반부터 본격 타자 활동을 시작하여 40살 넘어서까지 선수로 뛰며 디마지오의 홈런 커리어 2배를 기록한 홈런왕 베이브 루스와 비교할 상황은 아니고, 진짜 일류 타자 겸 홈런 타자 중에서 베이브 루스보다 특출나게 홈런 삼진 비율이 좋았던 건, 상술된 저 발언을 했고 삼진이 홈런 수의 1.36배였던 테드 윌리엄스(521홈런, 709삼진) 단 한 명뿐이다(게다가 베이브 루스보다 통산 출루율이 유일하게 높은 타자다). 물론 그 다음 수준으로 홈삼비가 1.6~1.8 정도에서 놀고 있는 루 게릭이나 멜 오트, 현대 야구의 알버트 푸홀스 같은 뛰어난 타자도 있으나 역시 극소수며, 그들보다 베이브 루스가 선수 생활도 길었고 홈런도 더 많이 치고 홈삼비 1.8~1.9를 기록했으니 그들에 비해 부족하다고 주장할 만한 것도 아니다. 푸홀스도 40대에 어찌 될지 모르니 저 발언을 한 테드가 홈런도 많이 치면서 홈런 삼진 비가 지나치게 뛰어났던 것이지, 1.9배 미만이면 홈런 능력에 비해 굉장히 삼진을 안 당한 편이다. 테드가 자기만 기준으로 봐서 그랬나 참고로 베이브 루스(통산 홈런 3위)보다 통산 홈런을 더 많이 친 1위 배리 본즈는 베이브 루스에 비하면 홈삼비가 나쁘며(2.02), 660홈런으로 5위인 윌리 메이스조차 2.3대로 베이브 루스보다 한참 부족하며, 최다 홈런 기록에 도전하다 700홈런에도 실패하고 은퇴한 4위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홈삼비가 3을 넘는다. 단 베이브 루스보다 홈런을 많이 쳤던 역대 최고의 흑인 슬러거인 홈런 2위 행크 아론은 1.8대 초중반으로 1.8대 중후반인 루스보다 홈삼비가 조금 더 좋다.
베이브 루스는 피지컬만 좋았던 게 아니라 정확도 높고 예민한 심리 싸움을 구사할 줄 알았다. 상대의 분석에 있어 정확하고 섬세했으며, 실제 평소의 성향 자체도 매우 예민한 편이라 상대 팀이나 견제 세력의 트래시 토크에 민감했던 편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언론 인터뷰나 기타 공식적인 발언에서는 기 죽기 싫어서 기 센 발언을 자주 했다고는 하지만, 가정이나 사생활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이 주변인에게 자주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격과, 그를 통해 만들어진 탁월한 타격으로 메이저리그를 정복한 베이브 루스를 '삼진을 훨씬 많이 당하면서도 두려움 없이 휘두르다가 하나씩 걸려서 홈런 친 선수'로 고려하는 건 매우 그릇된 평가다. 그랬다면 역대 최고 타자란 소리를 어떻게 들었겠는가 그는 엄연히 상대 투수의 공을 분석해서 예측하고 오는 공을 볼 능력이 있었기에 나쁜 공을 버리고 좋은 공을 자신 있게 휘두른 것뿐이다. 테드 윌리엄스가 잘못했네. 거기다가 루스가 쉽게 휘두른 타자가 아니었다는 또다른 증거로는 볼넷 기록이 있는데, 2000개도 넘게 얻어내서 볼삼비가 어마어마한 선수이다. 2000볼넷은 배리 본즈, 리키 헨더슨, 테드 윌리엄스와 더불어 메이저리그 사상 단 4명만 가지고 있는 기록이다. 많이 당했다고 주장하는 삼진보다 700개 이상 더 많은 볼넷을 거두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절대 오해하지 말자. 홈런왕 베이브 루스는 결코 홈런보다 훨씬 많은 삼진을 당한 선수가 아니다. 그는 막 휘둘러서 삼진을 먹거나 홈런을 치는 단순 무식 홈런 타자가 아니라, 선구안이 뛰어나서 볼넷도 잘 고르고, 삼진도 잘 안 먹으면서 안타도 잘 치고 홈런도 잘 쳤던, 중장거리형 장타, 출루율, 홈런, 타격까지 모든 걸 갖춰 메이저리그 전체를 대표하던 챔피언, 그야말로 완성형 슈퍼 히터였다. 야구의 신한테 삼진을 많이 당했다니 모욕하지 마라
  • 거구의 뚱뚱한 몸으로 달리기가 많이 느렸음에도 불구하고, 상대 투수를 자극하기 위한 도루 시도를 많이 해서 통산 123도루를 달성했다. 그러나 도루사가 117개로 50%가 겨우 넘는 51.3%라는 낮은 도루 성공률이다. 참고로 도루 성공률은 대부분의 전문가가 최소 65~67%는 해야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가장 낮은 기준으로 말하는 경우도 63~64%다. 그 이하는 도루 시도를 안 하는 게 더 낫다고 본다. 1923년에는 아메리칸 리그 도루 실패 2위를 한 적도 있다. 무릎 나갈라 그만 뛰어라 참고로 1926 월드 시리즈 7차전에서는 끝내기 도루 실패를 당하기도 하였다. 1926년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이다.
  • 이 글 내내 루스가 뚱뚱하다고 쓰여 있고 또 잘 알려진 루스의 인상 자체도 뚱뚱한 모습이라 오해하기 쉬운데, 루스는 그다지 뚱뚱하지 않았다. 188cm의 큰 키에 215파운드(100kg이 조금 안 되는) 몸무게를 유지했으며 심지어 투수 시절 커리어 초반에는 180파운드(81kg)였다. 양키스로 이적하던 해의 몸무게가 100kg이었고 자기관리를 망치면서 본격적으로 뚱뚱해지는 1925년 이전까지 이 몸무게를 유지했다. 뚱뚱하지 않았던 시절의 루스는 주력도 메이저리그 평균 이상이었고 때문에 수비 범위도 넓은 외야수였다. 루스는 뛰어난 투수 출신이었기 때문에 어깨도 좋아서 좋은 수비수였다. 하지만 루스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관리였는데 비시즌 기간에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고 식욕도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비시즌 기간에는 250파운드(약 110kg)까지도 불어났고 커리어 후반에는 시즌 중에도 저 정도 몸무게를 유지했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뚱뚱한 루스가 만들어졌다.
  1. 옛 흑백 사진을 컬러화하는 작업을 말한다.
  2. 베이브 루스는 2월생으로 1894년 9월 ~ 1895년 8월생과 동기가 된다.
  3. 사실 이것도 20대 때의 사진이라 그렇지만 말년의 사진을 보면 그래도 50대 초반인데도 거의 6~70대 할아버지를 연상시킬 정도니...1947년 루스가 52세일 때의 사진. 왼쪽이 루스다. 물론 이건 말년에 후두암으 발병으로 체중이 급격히 빠진 것도 있는 듯. 실제로 이 시기 베이브 루스는 무려 36kg가 빠졌다고 한다.
  4. 일각에서는 1920년부터 도입된 라이브볼 때문에 루스가 아니더라도 홈런의 시대가 왔을 것이라 주장하지만, 그들도 루스가 그 시작을 훨씬 앞당겼다는 것만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 데드볼 시대 말기인 1919년에 29홈런을 쳤는데, 그 전까지 다른 선수들은 기껏해야 두 자릿 수 홈런을 겨우 쳐낼 지경이었다.
  5. 3위. 1위는 배리 본즈(762), 2위는 행크 애런(755).
  6. 루스가 태어난 집은 현재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 구장인 캠든 야드 구장에서 3블럭 떨어진 곳에 있어서 볼티모어 야구 경기 보러 갈 때 일찍 가서 방문하기 좋다.
  7. 현 메이저 리그 구단인 볼티모어 오리올스와는 관계없다.
  8. 과대평가된 좌완 1위로는 샌디 코팩스 선정.
  9. 이 기록은 1961년 로저 매리스가 61홈런을 치며 경신, 또한 이 당시에는 그라운드에 떨어져도 튕겨 담장 밖으로 넘어가면 홈런으로 인정되었지만 루스의 홈런 중 바운드 홈런은 없었다. 오히려 당시엔 끝내기 홈런을 안타로 처리했는데, 이 때문에 홈런 1개를 손해 봤다.
  10. 20년대 후반을 빛낸 강타자였지만 자기 관리 실패로 인해 일찍 은퇴한 비운의 타자로, 1930년 시즌에 80년 넘게 깨지지 않고 있는 역대 단일 시즌 최다 타점 기록인 191타점을 기록했다.
  11. 참고로 매리스의 기록에 *가 붙었다고 알고있는 사람이 많은데,사실 그런 일은 없었다.카더라의 일종.
  12.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였던 루스의 연봉은 매년 폭등했는데 그것은 자연스럽게 메이저리거 선수 전체의 연봉 상승을 불러왔었다.
  13. 데드볼시기에 베이브 루스보다도 더 많은 인기와 위상을 가지고 있던 타이 콥은 루스에게 선배면서 대스타였지만, 신인시절 투수에서 타자로 전환하며 혜성처럼 빛나던 후배인 루스를 '반검둥이'라고 놀리며 모욕하는 농담을 하는 등 많이 견제했었고, 덩치에 비해 많이 예민했던 베이브 루스는 마음의 상처를 입어 타이 콥을 미워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100년 내내 깨지지 않는 역대 최고의 통산타율을 가진 타이 콥의 타격을 무시할 방법까지는 없어서 저렇게 말한 것이다.
  14. 여담으로 1961년, 타이 콥이 죽기 전에 쓴 자서전 "야구에서의 나의 생애 : 진정한 기록(My life in Baseball : The True Record)"에서 16장 "베이브와 나"에서에서 "솔직히 난 그가 -과학적인 경기에서부터 그의 강력한 강타의 확장까지- 야구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평가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야구를) 타고났으며 진실한 사람이었다. 살면서 그렇게 사랑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많은 아이들을 분발시킨 사람도 없었다. 나는 그의 놀라운 능력에 존경을 표한다.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며 경이를 표했다.
  15. 루스는 48년에 사망. 해당 발언의 년도를 정확하게 아시는분 수정 바람
  16. 실제로 베이브 루스는 앞서 본 대로 슬럼프가 잦았는데 이를 가속시킨 사람들이 바로 기자들이었다. 베이브가 한 번 실수하면 "그렇습니다, 양키스는 망했습니다."라는 식으로 깎아내리기에 바빴던 것. 이 때문에 베이브는 한 스포츠 기자를 죽이려 들기도 했는데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17. 후두암으로 사망하기 불과 열 몇 달 전이었던 이 시기, 그는 이미 목소리를 잃어 인공후두를 사용하고 있었다.
  18. 1938년 시즌 마지막 경기에 친 끝내기 홈런인 '황혼의 홈런'으로 유명하다.
  19. 여담으로 홈런을 맞은 투수는 다음날 선발로 나와 루스를 빈볼로 맞추었다고 한다.
  20. 브라이스 하퍼 문서의 타격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다.
  21. 만화 플린스톤 가족을 영화화한 작품에서도 주연을 맡아 연기력뿐만 아니라 외모도 만화 속 주인공 인물과 닮았다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