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잠페리니

인간 승리의 표본

Louis Silvie "Louie" Zamperini (January 26, 1917 – July 2, 2014(1917.01.26~2014.07.02)

1 육상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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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잠페리니는 전 미국 육상대표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1500/5000m 대표로 참가한 선수다. 성에서 알수있듯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으로 어릴적에 학교를 전전하며 살았다.

체구도 작아서 놀림도 많이 당하고 살았던 잠페리니는 그를 갱생시키려던 형 피트 잠페리니(Pete Zamperini)[1]의 노력으로 달리기 능력을 교사에게 인정받고 토렌스 고등학교 때부터 육상 선수로 본격적인 훈련을 받았다.

육상선수로 usc에 진학을 한 그는 올림픽 선발전에서 당당히 선발되어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한다. 메달은 못 땄지만 나름 준수한 성적으로 대회를 마치고 아직 20살도 젊은 잠페리니는 훗날 세계적인 육상선수가 될수도 있었는데...

2 제2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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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이 끝난후 발발한 2차대전에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미합중국 공군의 전신)에 장교로 입대하여 B-24 폭격기 승무원(폭격수)으로 태평양 전선에서 활약했다.

실종된 아군 폭격기를 수색하던 도중, 폭격기가 고장나 태평양 한가운데에 추락 후 탈출한 잠페리니와 승무원들(잠페리니와 동료 조종사였던 중위 1명, 중사 1명)은 무려 47일동안 표류(중간에 중사는 사망했다.)하고 마셜 제도 부근에서 재수없게도 일본 해군에게 구조되어 해군 포로 수용소에 있다가, 오오모리일본 육군 포로 수용소로 압송된다.

잔혹한 고문과 배고픈 나날들이 이어진 고달픈 포로 신세를 면치 못하던 그는, 특히 악명 높았던 와타나베 무츠히로(渡辺 睦裕) 군조(육군 중사)의 학대로 앙상한 뼈만 남은 상태로 포로신세를 버텨내고, 재수 없게도 옥쇄정책을 폈던 일본군 때문에 본토 도쿄에 수감되었던터라 종전 때까지 미국에 돌아가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3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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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고국으로 금의환향하여 많은 환대와 축복속에서 전역 후(최종 계급 대위.) 수많은 강연회와 방송에 출연 하여 일약 유명인이 되었다. 한편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일본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음에도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에 성화 봉송주자로 참가하면서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을 용서하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막상 그 소식을 들은 일본군 잔당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악행을 부정하며 뻔뻔스러운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특히 와타나베는 끝까지 그를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2014년 7월2일 운명할때까지 나름 국가대표 육상선수 출신이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97세라는 나이로 장수하여 눈을 감았다.

그의 일대기가 영화 언브로큰으로 제작되었다. 아쉽게도 영화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4 바깥고리

  1. 전쟁 중엔 미합중국 해군에 입대했다. 최종 계급은 갑판상사(CP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