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 베를린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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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하계올림픽
(Citius, Altius, Fortius)
10회11회14회[1]
1932 LA 올림픽1936 베를린 올림픽1948 런던 올림픽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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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최날짜 : 1936년 8월 1일 ~ 8월 16일
개최장소 : 독일 베를린

베를린에서 열린 11회 올림픽으로, 이 당시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분위기가 뒤숭숭한 상태에서 개최되었다. 무엇보다 베를린이라는 점에서… 올림픽 포스터는 베를린의 상징물인 브란덴부르크의 문이 그려져 있으며 19개 언어로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2 특징

암스테르담 대회부터 성화가 도입되었지만 이 대회부터는 그리스 아테네 올림피아 신전에서 시작해 올림픽 개최 도시까지 성화를 옮기는 성화 봉송 이벤트가 진행된 최초의 올림픽이다. 총 3,000Km를 운반하였으며, 성화는 도로 한가운데 지펴놓았다.


또한, 이 대회는 세계 최초의 텔레비전 현장 중계[2]이자 세계 최초의 텔레비전 생방송이 이루어진 계기이기도 했다. 당시 나치 언론 당국은 올림픽 개회식 및 주요 경기들에 대한 텔레비전 생중계를 실시[3]하였다. 또한, 베를린 전역에 28개의 간이 상영실을 설치하고 텔레풍켄사의 상영장비들을 설치하여 경기 모습을 베를린 시민들이 무료로 시청할 수 있도록 하였고[4][5], 영국의 BBC에서도 이 전파를 받아 중계를 하기도 하였다.

마라톤 경기에서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에서 손기정남승룡일본제국선수로 출전하여 금메달과 동메달을 차지하였으며, 이때 일장기 말소사건이 일어났다. 자세한 사항은 손기정 항목을 참조.

이전 1932 LA 올림픽에 이어 조선 출신 선수들이 일본 대표팀 소속으로 출전하였다. 전술한 손기정과 남승룡을 포함하여, 축구의 김용식, 농구의 이성구, 장이진, 염은현, 복싱 웰터급의 이규환 등 7명이다. 사실 손기정, 남승룡에 대한 견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측에선 조선인 선수들을 최대한 뽑지 않으려고 했다. 축구의 경우 김용식뿐만 아니라 김영근도 선발됐는데 김영근이 '실력에 비해 조선인 축구선수들이 차별받았다.더러워서 못해먹겠다'며 차출을 거부한 데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농구의 경우 11명의 선수단 중 3명이 조선인으로 선발됐는데 이는 당시 일본농구협회 상무이사이자 일본 선수단 총무였던 이상백의 존재 때문이었다.[6]

이 대회는 철저하게 아돌프 히틀러가 기획한 올림픽인데, 나치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 개최된 올림픽이라 독일의 국기는 하켄크로이츠가 들어간 나치당기를 사용하였으며, 대회장과 시내 곳곳에 이 깃발을 게양해두는 등 정치적, 군사적인 색을 입혔으며 자신들의 우월함을 자랑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대회를 열였다. 개회식때는 독일 대표팀의 입장시에는 정복을 빼입은 군 장교들을 기수 뒤에 세워 행진하게 했으며, 몇몇 유럽국가들도 입장시에는 로마식 경례를 하고 입장하는 등 정치적/군사적 색채가 강했다. 물론 인종차별분위기도 조성되었지만, 독일도 대외관계와 국제여론을 의식하여 대회기간 중 인종차별적 분위기는 생각보다 심한 편은 아니었다.[7] 미국흑인 선수인 제시 오언스는 이 대회에서 육상 4관왕(100m, 200, 4x100m계주, 멀리뛰기)이 되었다. 이 기록은 84년 LA 올림픽에서 칼 루이스가 깨기 전까지 육상 단거리 기록으로서는 철옹성과 같았다.[8][9][10]

미국의 대학팀인 워싱턴 허스키스 조정 대표팀이 독일과 이탈리아를 누르고 금메달을 딴 대회이기도 하다. 히틀러는 이것도 현장에서 보고 언짢아했다고 한다.

이 다음 대회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중일전쟁으로 인해 국제 사회의 여론이 악화되자 개최권을 반납했고, 결국 올림픽이 열리진 못했다. 게다가 전쟁은 2차대전으로 장기화되었기 때문에 이 다다음 대회도 취소되었으며, 1948년이 되어서야 겨우 재개할 수 있었다.

주경기장인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은 패전 이후 해체가 거론되기도 했지만, 결국 나치 상징들을 제거하거나 그에 대한 비판적인 설명을 덧붙이는 등 대대적인 개조를 거쳐 계속 사용되고 있으며 딱 70년 뒤 독일 월드컵의 경기장으로도 쓰였다. 또한 2009년 세계육상선수권 대회 트랙, 필드 경기도 열렸다.

올림픽 개회사가 쓸데없이 고퀄이다. 올림픽 항목에도 나와있다.

"스포츠적이고 기사다운 시합은 인간의 최고의 자질을 깨웁니다. 그것은 이해와 존중 안에서 전투원(선수)들을 분리시키지 않고, 오히려 단합시킵니다. 그것은 또한 평화의 정신 안에서 국가들을 결속시키는 것을 돕습니다. 그것이 올림픽 성화가 죽어서는 안되는 이유입니다."

문장 자체는 매우 훌륭하지만, 이 개회사 연설을 누가 작성하고 누가 읊었는지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철저하게 나치에 의해 계획되고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 대회이기는 하지만 그 이전 대회들보다 경기 운영 면에서는 혁신적인 대회로 평가받고 있다. 위 영상에서 보다시피 도시 전역에 설치된 폐쇄 회로 화면을 통해 많은 시민들이 경기를 관람했고 뛰어난 제반 시설의 개발, 시간을 측정하는 장비들도 정확해지는 등 올림픽 자체의 틀은 완성되었던 대회다. 쉽게 이야기해서 당시 독일의 산업과 기술력을 과시하는 장이었다.

폴로가 이 대회 이후로 종목에서 제외되었으나 카누농구, 핸드볼이 첫 선을 보였다. 또한 체조의 종목 수가 늘어나서 금메달을 여러 개 딴 독일 선수들이 나오기도 했다.

베를린의 경쟁지는 스페인바르셀로나였고, 여기에서 베를린에 밀린 인민전선 정부는 인민 올림픽을 열려고 했으나 스페인 내전으로 망했다. 그리고 56년 후인 1992년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개최하였는데 이 올림픽 때 대한민국 마라토너 황영조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얻게 된 지 56년만에 금메달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 올림픽이 열린지 3년 후인 1939년 개최국이었던 독일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강제로 병합시키고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된다. 그로인해 차기 올림픽도 12년 후 1948년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영국 런던에서 다시 개최하게 되었다.
  1. 12회 올림픽(1940년)과 13회 올림픽(1944년)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취소됨
  2. 현장에서 촬영한 영상을 기록 매체에 저장한 뒤 방송국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전파로 주조정실로 무전 송신하는 형태.
  3. 참고로, 나치 치하의 독일은 라디오 생방송을 최초로 시행하기도 하였다. 히틀러의 주요 연설들은 라디오 생방송으로 방송하였고, 베를린 올림픽 시행 당시 독일에는 이미 라디오 생방송은 일반화된 것이었다.
  4. 기존에는 이 텔레풍켄사의 방송 장비로 상영된 영상이 기계식 텔레비전 방식에 기반한 것이라 화질이 좋지 않았다고 기술되어 있었으나, 이는 옳지 않은 기술이다. 문제는 중계 카메라의 종류가 3가지라서 카메라가 통일이 안되는 바람에 자주 화면이 끊기고 화질도 들쭉날쭉이었다는 것. 당시 뉴욕 출신의 기자가 쓴 말에 따르면 "폴로 게임에서 서로 다른 색깔의 말이 뛰는장면이나 되어야 뭔가 좀 확실히 보였다"
  5. 독일에서 최초의 기계식 텔레비전이 발명되기는 하였으나, 이것을 상용화한 것은 영국이었다(1929년 기계식 텔레비전 방송 시작). 독일은 흔히 브라운관이라 불리는 음극선관을 이용한 전자식 텔레비전 기술을 국가적으로 육성하였고, 1933년부터 시험 방송을 시작하여 1935년 정규 전자식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독일의 텔레비전 기술은 발터 브루흐(Walter Bruch)라는 당대 최고의 전자공학자에 의해 연구되고 있었고, 그는 이후 PAL과 SECAM 신호 전송 표준을 개발한 장본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1930~40년대 독일의 텔레비전 방송은 당시 기술 수준에서는 유럽에서 최상의 품질으로 유명한 것이었다. 참고로, 기계식 텔레비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완전히 사장되고 SECAM, PAL, NTSC 등의 TV표준이 제정되면서 전자식 텔레비전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6.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일본 축구나 농구가 메달을 못 따서 그렇지 땄으면 골치아플 뻔했다(축구의 경우 일본은 8강 진출). 이 선수들은 어쩌면 메달리스트면서도 개인 종목의 손기정, 남승룡과는 달리 이를 대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을지도.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는 손기정과 남승룡의 생존시에 한국 대표로 메달 딴 선수들과 똑같이 연금을 지급했다. 일본 축구나 농구가 메달을 땄으면 이 선수들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게 옳을까 안 하는 게 옳을까 하는 기타 골치아픈 문제가 있었을지도.
  7. 다만 올림픽이 끝나고 원상복귀….
  8. 그의 일화는 우리나라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9. 제시 오언스의 활약은 과거에 TV영화로도 만들어 졌으며 2016년에도 또 다시 만들어져 개봉할 예정이다. #
  10. 독일에서도 충분히 존경받을만한 인물이라 여겨졌는지 올림피아슈타디온 근처에 제시 오언스 거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