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得恭(류득공)
1748년 ~ 1807년
1 소개
“고려의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라 외에 발해를 포함한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 「발해고」 서문 中
조선 정조 때의 북학파 실학자. 자는 혜풍(惠風)ㆍ혜보(惠甫), 호는 영재(冷齋)ㆍ영암(冷菴)ㆍ가상루(歌商樓)ㆍ고운당(古芸堂)ㆍ고운거사(古芸居士)ㆍ은휘당(恩暉堂) 등 다양하다. 정조가 발탁한 최초의 규장각 검서관 4인[1] 중 한 명. 북학파의 거장 박지원의 제자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산업 진흥을 주장하였다. 문체에도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李書九)와 함께 한문 신파 사가(漢文新派四家)로 일컬어진다.
2 생애
2.1 유소년기
1748년 음력 11월 5일 부친인 유춘과 모친인 남양 홍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유득공은 증조부와 외조부가 서자 출신이었던 탓에 신분상 서자로 살아야 했다. 유득공의 생애는 불행하게도 일생을 기록해 놓은 행장이 전해지지 않아 자세하지 않다. 다만 그의 나이 5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어, 어머니를 따라 외가인 경기도 남양으로 가서 살았다. 그런데 외가가 무신 집안이라 도저히 글공부할 분위기가 아니어서, 그의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 삯바느질로 그의 공부를 뒷바라지한다.
어린 시절부터 유득공의 학문적 성장에 영향을 준 인물은 숙부 유련[2]이었다. 유련은 유득공의 부친인 유춘의 둘째 동생으로 ‘기하(幾何)’를 호로 사용할 정도로 수학과 천문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1776년(정조 즉위년) 서호수의 막관으로 중국을 여행한 북학파 출신의 실학자였다. 20세를 전후로 하여 유득공은 북학파 인사들과 교류하기 시작하여 숙부인 유련을 비롯하여 홍대용ㆍ박지원ㆍ이덕무ㆍ박제가ㆍ이서구ㆍ원중거ㆍ백동수ㆍ성대중ㆍ윤가기 등과 교류하였다. 이들은 단순한 교류에서 그치지 않고 ‘백탑동인(白塔同人)’이라는 시동인회(詩同人會)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 때 부터 유득공은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25세 때 기자#s-2(箕子)때 부터 후백제에 이르는 시기의 우리나라 한시를 모은 동시맹(東詩萌)을 엮으면서 역사를 바탕으로 한 이른바 서사 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773년에는 박지원, 이덕무와 함께 개성과 평양을 유람하고 이어서 백제의 도읍지인 공주를 다녀오면서 역사지리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훗날 유명한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이때의 기행이 토대가 된 것이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이십일도회고시는 위만조선의 멸망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연구하며 도읍지의 변천에 주목, 그에 따른 사실들을 시문으로 지은 것이다.
사실 유득공은 역사가보다는 시인에 가까웠다. 백탑파 중의 한 사람이었던 유득공은 다른 백탑파 출신의 실학자들처럼 훌륭한 시를 짓기 위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문학 작품들을 섭렵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고, 그런 가운데 점차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유득공은 중국을 비롯하여 만주, 몽고, 이슬람, 베트남, 미얀마, 대만, 유구 등 다른 나라들로 관심 영역을 넓혀갔고, 이는 자연스럽게 세계관의 확장을 가져와 종래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한백겸의 동국지리지[3]의 영향을 받아 북방사에 관심을 두어 만주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은 세태와 발해 이후 옛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지 못했음을 한탄하였다.
2.2 과거 급제와 정조의 등용
유득공은 1774년 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소과 시험에 합격하여 생원은 되었지만, 대과 시험인 문과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이 때 대과에 떨어진 울적한 마음에 지은 100편의 시가 그의 문집인 '가상루집(歌商樓集)'에 수록되었다. 1778년에는 첫번째 중국여행지인 심양을 방문했다.[4] 그가 관로에 나간 것은 1779년이었다. 정조에 의해 초대 규장각 검서관에 등용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한 것이었다.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가난을 견뎌야 했던 유득공은 검서관이 되어 어느 정도 생계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규장각 일 외에도 35세에는 강화도 외규장각에 머물면서 서적들을 조사하는 업무를 맡기도 하였다.
그는 15년의 규장각 검서관 활동 이외에도 지방관을 역임한 적이 있다. 1784년에 포천현감을 시작으로 지방관 생활을 하였는데, 발해고(渤海考)는 이 무렵에 저술된 것이다. 규장각에서의 연구 활동이 발해고를 저술하는 데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듬해에는 양근(지금의 양평군)군수로 옮겼다가 42세 때인 1789년에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와 광흥창 주부로 있었고, 다시 이듬해 5월에는 사도시 주부로 자리를 옮겼다. 지방관으로서 유득공은 “나랏일을 하는데 나라법인 '대전통편(大典通編)'이 양반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는 생각을 토대로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공평하게 일처리를 하였다. 풍천부사로 부임하던 무렵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유득공은 1801년(순조 원년)에 풍천부사에서 물러난 뒤 칩거하며 저술에만 몰두했다. 1807년 9월 1일에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양주(楊州) 송산(지금의 의정부시 송산동)에 묻혔다. 장남 본학(本學)과 차남 본예(本藝) 등 2남 2녀를 두었으며, 두 아들 모두 규장각 검서관을 역임했다.
1790년에는 건륭제의 80세 생일 축하 사절의 일원으로 그가 가장 가보고 싶어하던 북경을 방문하였다. 1801년에는 왕명을 받아 2차 연행길에 올랐다.
3 주요 저서
- 발해고 : 항목 참조
- 사군지(四郡志) : 정조 19년(1795)에 편찬한 한 군현의 역사서이다. 한 군현의 연혁, 산천, 산물, 유적, 방언 등을 수집하였다.
- 영재집(泠齋集),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앙엽기(盎葉記)등이 있다.
- ↑ 유득공과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 서이수(徐理修).
- ↑ 1741~1788, 훗날 유금(柳琴)으로 개명함
- ↑ 광해군 시기 한백겸이 지은 책으로 중국 사서의 열전에 기록된 부족국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한국의 고대사 지명을 고찰한 책이다. 한국 역사지리학의 창시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역사지리 연구에 많은 자극을 주었다.
- ↑ 이 때 일화가 있는데 귀국길에 개성에서 마침 연경에 정사 채제공을 따라갔던 친구들인 이덕무와 박제가를 만났다, 이들은 연경에 가보지 못한 유득공을 놀렸는데 유득공이 부아가 났는지 '심양이나 북경이나 어차피 압록강 넘어 간 건 똑같다'다고 응수했다고, 뭐 본인도 나중에 연경에 두번이나 다녀오니 소원성취는 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