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군

漢四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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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漢四郡)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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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屯郡)
진번군
(眞番郡)
현도군
(玄菟郡)

1 개요

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 합병한 뒤 그 자리에 세웠다고 하는 네 개의 군급 행정구역. 네개 군이 같이 유지된 기간은 25년으로 매우 짧아서 학술적으로는 '한군현'이라 부르기도 하며, '동방변군'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래도 세간에 가장 잘 알려진 명칭은 한사군.

  • 낙랑군 - 기원전 108년 ~ 313년.
    • 대방군 - 214년 ~ 314년. 낙랑군 일부를 나누어 과거 진번군 자리에 설치.
  • 임둔군 - 기원전 108년 ~ 기원전 82년. 이후 현도군, 낙랑군, 옥저, 동예 등으로 나뉨.
  • 진번군 - 기원전 108년 ~ 기원전 82년. 이후 낙랑군에 포함되었다 대방군이 설치.
  • 현도군 - 기원전 107년 ~ 404년. 창해군 자리에 설치.

2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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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지도가 학계의 정설인 한반도 북부설이다. 오른쪽 지도는 난하요수설을 기반으로 한 지도로 유사역사학에서 주장하는 것이지만 사실일리가 없다. 고고학적 성과를 보면 평양 낙랑토성에서 낙랑예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와당 발견, 한무제 때 쓰던 오수전 동전 + 3000여기의 이르는 목곽묘, 귀틀묘, 진실묘 발굴, 황해북도 봉산군에서 대방태수 무덤 발견 등으로 인하여 거의 개박살이 난 상태(...) 게다가 오른쪽 지도에 있는 요동군과 낙랑군등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원안에 있는 영토, 오늘날 중국의 허베이성과 산둥성 영토는 전국시대 연나라와 제나라의 땅이었고, 당연히 전국칠웅인 연나라와 제나라의 영토였던만큼 진나라와 한나라때도 매우 중요한 지방이었다. 당장 저 위에 대략 진번군 위치가 촉한의 황제 유비의 고향인 탁군이다.

주로 위치에 대한 논란이 많이 다뤄지는데, 금방 폐지되거나 이전되어버린 나머지 세 군현보다 낙랑의 위치가 떡밥이었다. 물론 인터넷 등지에서 음모론의 형태를 띄고 있는 논란일 뿐, 학계에서는 위치에 대해서는 이미 일제강점기에 결론을 내고 더 높은 차원의 연구가 진행 중이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문헌 사료만 가지고 일부 학자들이 한사군의 위치를 놓고 다른 곳으로 비정하는 일이 있었으나, 대다수는 한반도 북부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보았다.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지리지 등)이나 고려사 등 국가의 공인 사서 및 지리서, 그외 저명하고 가치 있는 사서들은 모두 평양 일대가 낙랑군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사서들과의 비교를 통하여 볼 때 요동 근처에 있다는 사실도 완전히 무시할 수 는 없기 때문에 요동설과 평양설이 대치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논쟁은 종결된 것이며, 더 이상 요동위치설을 입증할 근거가 없다고 여기고 있으나, 끊임없이 이 부분에 관한 논쟁은 계속 되고 있으며, 일부 재야사학자들 혹은 유사역사학자들이 환단고기를 근거에 끼워넣으면서 학술적 논란이 점차 왜곡되고 있는 상황이다.

위치에 대한 논란의 실질적인 시발점은 신채호, 정인보 등의 민족사학자들로서,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발굴이 조작된 것이라 주장하며 민족주의적인 방어 논리로서 제기되었다. 신채호는 평양 지방의 지명이 '낙랑'이며, 진번, 임둔, 현토 역시 마찬가지로 각각 가리키는 지명이 있을 것이라 했고, 한사군은 한 무제가 삼조선 전체를 공격해 합병한 뒤 각각의 지명의 위치에 세우려고 하다가 실패한, 즉 '가설'된 군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한사군에 관한 신채호 등의 견해는 대부분이 원전의 한문을 오독했거나 추측이나 희망사항에 따른 결론이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재 대한민국의 사학계는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 물론 대다수 민족사학자들이 독립운동에 매진하면서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없었던 측면, 그리고 일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민족사학이 가지는 가치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 시기에 식민사관에 물들어있던 일본식 역사 교육에 폐해로 이러한 논쟁이 벌어진다고 주장하는데, 고대 기록을 아무리 뒤져봐도 뚜렷하게 명확하게 답을 주고 있진 않다. 그리고 이런 식의 논쟁의 계속이라면 뚜렷한 증거가 나와도 무시당할 것이 뻔한다. 예를 들어 환빠?

한편, 북한에서는 리지린을 필두로 하여 난하요수설을 토대로 한 낙랑군 요서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의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고 주장을 위해 증거를 끼워맞춘 수준이라서 철저하게 논파되어 현재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세계 어느 학계에서도 인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난하요수설을 바탕으로 한 낙랑군 요서설 또는 요동설은 유사역사학자들에 의해 현재까지도 인터넷과 언론, 출판 시장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국회의원에게까지 전파되어 국회에서 토론회를 강제로 개최할 정도.

3 지배 성격

현재 한반도 분단 상황이라 1916년 총독부 지원 발굴조사가 끝이라 고고학의 성과가 없는 상황이어서 향후 남북 공동발굴 조사방식을 취하는것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대충 나온 자료는 평양 낙랑토성의 낙랑예관이라는 와당, 한나라의 오수전 동전, 3000여기의 이르는 목곽묘, 귀틀묘, 진실묘. 황해북도 봉산군의 대방태수 무덤 정도.

4 최씨낙랑국과 낙랑군은 같은 것?

미천왕 때 합병당한 낙랑군이 대무신왕 때 합병당한 최씨낙랑국과 같은 존재인지 별개의 국가인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별개의 국가로 보는 쪽에서는 낙랑군을 평양과 그 주변으로, 낙랑국은 평양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을 것이라 추정한다. 또한 이에 관해서 경북대학교 사학과 주보돈 교수 등은 낙랑군과 낙랑국이 평양 부근에 위치하면서 서로 다른 곳이라 보았다.

또한 낙랑공주의 아버지인 최리가 낙랑국의 이라고 기술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태수'가 아닌 것이다. 삼국사기 등이 쓰여진 시대에 '군'과 '국', '태수'와 '왕'을 구별하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최씨낙랑국 항목에 지적된 대로, 삼국사기에는 '대방왕'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또한 중국의 기록을 보더라도 낙랑 태수중에 최리라는 사람은 없었다.

별개의 국가가 아니라는 쪽에서는 낙랑군과 낙랑국의 이름이 같고 지리적으로도 같은 평양 지역에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제 유물의 발굴로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점이 확인된 만큼, 고구려와 맞설 만한 강국이 공존할 자리가 없다는 주장이다. 최리 이전에는 전혀 기술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약점이다. (옥저동예 등보다도 존재감이 없는 셈이다.) 또한 대무신왕이 낙랑을 함락시킨 후 후한광무제가 군사를 보내어 낙랑 지역을 점령한 것도 대무신왕의 고구려가 점령한 것이 한의 군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양쪽 모두 정황증거에 불과하다. 실제로 평양 주변에 낙랑국의 별개의 유적이 있는지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는 셈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최씨낙랑국 항목 참조).

5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

항목참고.

6 기타

코에이의 삼국지7에서도 낙랑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는데... 다음 번 시리즈에서는 그게 문제가 되어서 국내판에서는 이름 또는 위치가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