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승엽


李承燁. 1906년 2월 8일[1] ~ 1953년?

1 개요

인민타자
북한정치인, 언론인. 조선공산당 창설에 관여했으며 조선로동당의 초대 정치위원이자 박헌영의 최측근이었다. 6.25 전쟁이 끝난후 박헌영 등과 더불어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 요시! 그란도 숙청

2 생애

경기도 남양군 영흥면 외동(현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외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기선은 뱃사공이었으나 이후 인천으로 이주하여 여인숙을 경영한다. 20~30년대 일제의 요시찰인물 감시카드에 따르면, 부친의 부동산과 동산이 약 2만원 상당에 이를 정도로 부유했다고 한다. 이를 볼 때, 어린 시절 크게 부족함 없이 자란 것으로 보인다.[2]

인천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3], 이후 도쿄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 입학하지만, 입학한 당해[4] 7월에 퇴학당한다. [5] 이후 보성법률학교에 들어가지만, 1923년 2월 중퇴한다.
이 무렵 그는 사회주의에 심취하였으며, 이후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한다.

중퇴한 이후에는 인천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혼도 하여 가정도 꾸렸으며,[6], 1925년 조선일보 인천지부 기자로 일하였다. 한편 그는 조선노동총동맹에 가입하여 인천지부의 핵심인물이 되었으며, 1925년 조선공산당에 창건에 관여한다. 이로 인해서인지 그는 26년 조선일보사에서 권고사직 당했으며, 이후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다.

2년 가량 감옥 생활 이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사회주의 운동을 벌였다. 1930년 3.1운동 11주년 기념으로 '전조선 피압박 피착취계급에 격함'이라는 격문을 뿌린 '격문사건' 주도자로 수배되지만, 그는 도주에 성공하여 검거되지 않았다. [7] 이후 그는 영남지역에서 노동생활을 하며 사회주의 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1932년 이른바 '반제격문사건(반제사건)'으로 체포된다. 이는 만주사변과 관련하여 반제국주의 반전 격문을 뿌린 사건으로, 대범하게도 당시 진주부산에 있던 일본군 주둔지에도 이 격문을 뿌렸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부산 재판소에서 징역 4년을 구형받는다.[8]

이후 석방된 후에도 공산당 재건운동 및 사회주의운동으로 감옥을 들락날락했었다. 그리고 40년 사상전향서를 쓰고 출소한다. [9]

이후 그의 평가에 대해서는 엇갈린다. 석방된 이후에 일제의 식량배급조합 이사로 있었고, 친일적인 글도 다수 썼기에 친일파로 비판받는다.[10]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는 위장된 것이며 비밀리에 사회주의 운동[11]을 벌였다고 하기도 한다. 어쨋든 그는 1945년 봄 조선건국동맹 결성에 관여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조선공산당 결성에 가담하여 중앙위원에 오른다. 당시 남로당에서는 박헌영 다음의 사실상 2인자 위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즈음에 월북했으며,[12] 북한 정권 수립후에는 사법상에 임명되는 등 요직에 앉았다. 1949년, 박헌영과 함께 조선인민유격대(이른바 빨치산)의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6.25 전쟁 당시에도 총괄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53년 '정권 전복'과 '미제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물론 실제로 간첩행위를 했다기보다는, 사실상 김일성의 정적 제거에 가깝다. 당장 전쟁 당시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 서울시 인민위원장(서울특별시장 격)으로 활동했으며,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도 패잔병을 모아서 유격전과 지연전을 펼치다가 후퇴했었다. 전쟁을 일으켰지만 무력통일은 고사하고 북한 전역은 폐허가 된 채로 정전협정을 채결했기 때문에, 김일성 입장에는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었다. 이에 따라서 리승엽을 시작으로 남로당 인사들은 '정권 정복 음모 및 미제 간첩' 혐의로 숙청당했다. 그리고 55년경 최종적으로 박헌영이 처형되면서 북한에서 남로당계 세력은 사실상 소멸한다.

현재로서는 북한에서도 남한에서도 모두 버림받은 인물이다.

3 매체에서

추가바람

  1. 1905년이라고도 하지만, 일제강점기시절 요시찰인물 대상 카드에는 1906년 2월 8일로 기록하고 있다.
  2. 이와 관련해서 북한에서는 소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언급하면서 '출신부터 반혁명적인 인물'이라고 이야기한다;;
  3. 한국민족대백과사전 등에는 1919년 3.1운동 가담으로 퇴학당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일제강점기 그와 관련된 기록에서는 그가 '졸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4. 기록마다 연도가 다르다. 1921년 혹은 22년에 입학했다고 한다.
  5. 퇴학사유는 알 수 없다.
  6. 부인은 '신간난'이라고 한다.
  7. 당시 격문사건 재판부에서는 격문사건으로 체포된 6명에 대해서만 형을 집행하였고, 리승엽을 포함하여 체포되지 않은 인물에 대해서는 기소중지 처분을 내렸다.
  8.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부인과 어린 자식이 인천에서 부산까지 와서 징역을 선고받는 공판을 참관했다면서, 처자식이 불쌍하다는 식을 서술하고 있다...
  9. 당시 일제는 무조건 사회주의자들에게 전향서를 강요했었고, 수감중이었던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이 전향서를 썼다. 그 가운데에는 제법 늦은 축에 속하는 편. 사람마다 다르지만, 정말로 사회주의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전향한 사람도 있었고, 겉으로는 전향한 척하면서 다시 사회주의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된 경우도 있었다.
  10. 이로 인하여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다.
  11. 함경도지역의 사회주의운동 지하조직에 관여했다고 한다.
  12. 박헌영의 지시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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