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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마누엘 아나톨 아리스테기 (Manuel Anatol Aristegi) |
생년월일 | 1903년 5월 8일 |
사망년월일 | 1990년 5월 17일 |
국적 | 스페인 / 프랑스 |
출신지 | 이룬[1] |
포지션 | 풀백 |
신체조건 | 불명 |
등번호 | -[2] |
소속팀 | 레알 우니온(1920-1922) 레알 소시에다드 힘나스티카 에스파뇰라(1922-1923) 레알 우니온(1923-1926) 아틀레틱 클루브(1926-1928) 라싱 드 파리(1928-1932) 아틀레티코 마드리드(1932-1933) 몽펠리에 HSC(1933-1934) 라싱 드 파리(1934-1935) |
국가대표 | 16경기 / 1골 (프랑스 / 1929-1934) |
1 생애
1.1 어린 시절
마누엘 아나톨은 이룬지방에서 태어났다. 비록 스페인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아버지가 프랑스 국적을 가진 바스크 출신이었다. 그의 부모는 커스텀 에이전시를 운영했는데 아나톨은 공부와 운동 양쪽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서 아나톨이 공학을 배우는 것을 허락했다.
1.2 선수 생활
한편 아나톨은 축구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는 내내 수비수로 활약을 했다. 첫 데뷔는 1920년에 고향팀 이룬에 있는 레알 우니온에서 이뤄졌다. 이 당시에는 공부와 운동을 병행했고, 축구 외에도 육상 선수로서 활약하기도 했다. 1923년에 잠시 레알 소시에다드 힘나스티카에서 활약한 아나톨은 다시 돌아와서 1924년의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1925-26시즌 무렵, 아나톨은 빌바오로 건너가서 공학을 계속 공부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레알 우니온에서는 그의 대체자를 찾지 못해 이적을 허락지 않았고 결국 10월까지 클럽을 떠나지 못했다. 하지만 1926년. 결국 아나톨은 아틀레틱 빌바오로 이적하는데 성공하였고 이곳에서 두 시즌을 보냈다.
1928년, 그는 병역을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에 갔고[3], 라싱 드 파리와 프랑스 육군 축구팀에서 뛰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고 프랑스 대표팀에까지 승선하였다. 1929-30시즌에는 프랑스에서의 병역이 끝나면 스페인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측했다. 빌바오, 레알 마드리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레알 오비에도 등과 링크가 떴지만 아나톨은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공학도로서의 경력을 끝내기 위해 1932년 결국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레알 바야돌리드와 계약 직전까지 갔지만 최후의 선택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였다. 공부와 가족의 생활에 따른 결정이었다. 하지만 아나톨은 공학 일 때문에 바빠서인지 시즌 동안 단 7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결국 프랑스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몽펠리에 HSC와 라싱 드 파리에서 한 시즌 씩을 보낸 후 32살의 나이에 선수 생활을 접었다.
1.3 국가대표
아나톨이 처음 프랑스 대표팀 명단 주위에 오르내린 것은 1925년 무렵부터였다. 하지만 그런 실력의 소유자를 스페인 역시 뺏기길 원치 않았고 비슷한 케이스인 레네 프티까지 묶여서 이 싸움은 1928년까지 계속되었다. 1929년에 처음으로 프랑스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아나톨은 총 16경기에 출전하였고 1930년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중거리 슈팅으로 1골을 기록하였다.
이후에는 파리에서 무기 공장을 관리했다.
2 플레이 스타일&평가
강력한 피지컬과 운동 능력으로 게임을 진행한 파이터형 수비수였다. 그리고 아나톨은 달리기도 매우 빨라서 200m 달리기에서 스페인 타이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상술했듯 육상 선수로도 활동을 했지만 1924년 올림픽에 참가가 좌절된 이후에는 축구로 완전히 전업하였다.
3 뒷이야기
- 그는 모터 스포츠의 열렬한 팬이었다.
- 아나톨이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몇 달 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감독이 될 것이라는 뉴스가 떴다. 하지만 이 뉴스는 아나톨과의 인터뷰로 허위로 밝혀졌고 결국 아틀레티코의 사령탑은 바르셀로나의 초기 레전드였던 조제프 사미티에르였다.
- 아나톨의 형제 중 두 명은 프랑스의 최고위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여동생 마리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드 코멧에서 수십명의 동맹국 조종사들이 스페인-프랑스 국경을 넘도록 도와줬다. 또한 그의 남동생 헤수스 마리아는 물리학 박사로 화학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몇몇 신약을 개발하였으며 역시 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