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안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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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남미녀가 따로 없다[1]
마오안잉과 그의 처 류쑹린(류승린). 마오안잉은 결혼 후 1년 만에 전사한다. 하지만 그의 아내 류쑹린(류쓰치)은 2015년 현재 살아 있다.

1 개요

毛岸英(모안영). 마오쩌둥의 큰아들. 1922년 10월 24일 ~ 1950년 11월 25일

2 생애

1922년 10월 24일 중국 후난 성 창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마오쩌둥은 1927년 추수 봉기[2] 이후 도주하면서 가족과 헤어졌는데 마오안잉의 어머니 양카이휘는 1930년 중국 국민당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후 마오안잉과 그의 동생은 국민당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로 도주했으며 그 곳에서 중국 공산당 지하 조직의 보호를 받았다.

1936년 마오안잉은 파리로 건너갔다가 다시 모스크바로 건너갔고 거기서 가명으로 공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소련군에 들어가 동부전선에 참전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중국으로 돌아와 1949년 10월 류쑹린(류승린)과 결혼하였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인민지원군이 결성되었고 마오안잉은 이 부대에 지원하여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러시아어 통역관으로 참전해 펑더화이와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지 약 한 달 만인 1950년 11월 25일 북한 평안북도 동창군(현 삭주군) 대유동에서 미군 폭격기의 폭격을 맞아 전사했다. 전날인 11월 24일, 두 대의 정찰기(P-61 Black Widows)가 떠서 중국군의 위치를 탐지했고, 다음날 정오에 미군 폭격기 F-80이 4개의 네이팜탄을 투하하였다. 그 중 하나가 마오안잉이 있는 동굴 근처에 떨어져 사망하게 된 것이다. 펑더화이를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은 미군 전투기가 떨어뜨린 것이 네이팜탄이란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재빨리 탈출해서 살 수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어렸던 마오안잉은 일반적인 폭격인 줄 알고 책상 밑에 숨었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이때 그의 나이는 만 28세였다.

3 일화

마오안잉이 한국전에 참전하려고 했을 때, 펑더화이 등 중공군 장교들이나 공산당 고위 인사들은 이때 그가 죽거나 포로가 될 것을 우려해서제대로 못 지키면 목이 날아갈 테니 참전하지 않길 원했고, 마오쩌둥에게 마오안잉을 말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때 마오쩌둥은 "내 아들을 참전시키지 않으면 누가 전쟁터에 간단 말인가?"나 "그는 어쨌든 마오쩌둥의 아들이다."라고 하며 참전을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근 마오안잉 전사에 대해 새로운 증언이 나왔다. 전기 작가인 텅쉬옌은 최근 마오안잉은 당초 사령관 숙소에서 빠져 나오지 않았고, 북한이 선물한 댤걀을 몰래 삶아먹다가 변을 당했다고 증언했으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당시 사령부 작전실에는 달걀이 10여개 있었는데. 중국 공산당원이며 팔로군 출신으로 북한 정권 출범 이후 귀국해 내무상을 지낸 박일우 조선인민군 전선사령부 부사령관이 선물로 보내준 것이다. 그는 펑더화이 사령관이 고생을 한다며 어렵게 달갈 10여개를 마련해 광주리에 담아 보내주었다. 펑더화이는 먹지 않겠다면서 부상병들에게 주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지원군 사령부에는 부상자가 전혀 없기도 하고 달걀이 워낙 귀한 물건이라 누구도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러자 마오안잉이 이 달걀에 먹으려 했으나. 당시 사령부에는 아궁이는 없고 목탄으로 때는 조그만 난로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달걀을 컵에 넣고 난로 위에 올려 놓았다. 난롯불이 영 신통찮아 한참이 지나야 달걀 하나가 겨우 익었다. 그는 밤을 새가며 댤걀을 익혔고 그러는 사이 날이 밝았다. 전날 미군 정찰기가 오랫동안 대유동 상공에 머물러 있어 인민지원군 사령부는 이날 새벽부터 대피령을 내린 상태였다. 훙쉐즈 부사령관이 다급하게 숙소로 들어와 야전침대에 누워있던 펑더화이 사령관을 “아직도 누워계시냐”면서 끌어냈다. 펑더화이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버텼으나 참모들이 모시고 나갔다. 숙소에 있던 지도며 문건도 다 들고 방공호로 옮겼다. 펑더화이는 문을 나서면서 “안잉, 너도 빨리 나와라”하고 외쳤다. 그러나 마오안잉과 가오루이신은 그대로 난로 곁에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미군 전투기 4대가 산쪽으로 날아와 정확하게 산허리에 있는 인민지원군 작전실에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출처

그가 전사한 이후에도 마오쩌둥은 다른 인민들도 자식을 전쟁에서 잃었을 것임을 생각하여 아들의 시신을 가져오지 않았고, 훗날 '지도자라면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아들의 참전을 말리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그래서 마오안잉의 유해는 북한 평안북도 회창군에 소재한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부 열사릉원에 묻혀 있다. 그의 묘는 북한과 중국의 혈맹을 상징하는 정치적인 장치로 이용되고 있다.

펑더화이는 마오안잉의 전사 소식을 뒤늦게 보고했다. 그래서 마오쩌둥이 장남의 전사 사실을 저우언라이로부터 전해들은 것은 아들이 죽은 지 3개월이 지난 1951년 1월이었다. 마오쩌둥은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눈시울을 붉히며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더니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지..."라고 한탄을 했다고 전해진다.[3]

4 기타

유족으로는 결혼한 지 1년 만에 과부가 된 마오안잉의 처 류쑹린이 있었다. 마오쩌둥은 이렇게 생과부가 된 류쑹린을 소련 유학을 보내주고, 돌아온 후에도 계속 재혼을 권하고 남자에게 선을 주선해줬다고 한다. 결국 전 시아버지의 추천으로 류쑹린은 1962년에 공군 지휘관과 재혼했다. 마오쩌둥은 과부가 된 며느리의 재혼을 주선했을 뿐만 아니라 결혼부조금도 보내줬다고 한다.

2006년 5월 12일, 류쑹린은 전 남편이 죽은 지 56년 만에 전 남편이 죽음을 맞이한 북한 평안북도 삭주군 대유동의 지원군사령부 터를 찾아가 참배를 했다.

중국내에선 한국전쟁에서 마오안잉이 죽지 않았다면 김정일처럼 권력세습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청조 멸망 이후에도 중국인들이 전통적인 황제 중심의 군주제 사고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중국의 마오쩌둥도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처럼 아들에게 권력 세습을 하였을 가능성이 없진 않다. 마오쩌둥의 둘째아들인 마오안칭은 국공내전 시절 받은 고문으로 인해 형의 죽음 이후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정신질환자였기 때문에 예외.
  1. 천안문에 걸린 나이든 사진만 보면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인 마오쩌둥도 젊었을 적엔 상당한 미남이었다.
  2. 1927년 9월 7일 중국 후난 성과 장시 성 일대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일으켰다가 실패한 무장봉기이다. 이 봉기는 중국에서 최초의 공산당 무장봉기로 기록된다.
  3. 펑더화이가 그의 전사 소식을 뒤늦게 보고한 것이 나중에 문화대혁명 때 펑더화이가 숙청당하는 빌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