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고굴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Attachment/unesco-worldheritage.png
이름한글막고굴
영어Mogao Caves
프랑스어Grottes de Mogao
국가·위치중국 간쑤 성 둔황

등재유형문화유산
등재연도1987년
등재기준(i)[1], (ii)[2], (iii)[3], (iv)[4], (v)[5], (vi)[6]
지정번호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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莫高窟

1 개요

중국 간쑤성 둔황에 있는 불교 유적 석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주로 둔황ㆍ돈황 석굴이라는 명칭이 유명하다. 둔황 천불동이라고도 하며, 보통 '막고굴'이라는 명칭으로 이 일대의 석굴 전체를 통틀어서 일컫는다. 오호십육국 시대인 전진(前秦) 시대부터 원나라 시대에 걸쳐 1,000 여 년의 시간 동안 세워지고 만들어진 동굴, 유물이 많이 모여있는 불교 유적이다. 동굴 735개, 벽화 총 연장길이 45km, 각종 불상 2415 기의 거대한 규모이며, 현존하는 유적 중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유물도 가장 풍부한 불교 미술 유적이다. 1961년에 중국 국무원(國務院)에 의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에 지정되었고, 198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2 내용

막고굴은 북조(北朝) 시기부터 원나라 시대에 걸치는 긴 시간 동안 만들어진 동굴 735개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석굴은 남쪽과 북쪽의 두 구역으로 나뉘는데, 남쪽 구역은 막고굴의 중심이다. 과거 승려들이 종교 활동을 행하던 장소로서 487개의 동굴이 있으며 모두 벽화 또는 불상이 있다.북쪽 구역에는 248개의 동굴이 있는데 이 중 단 5개만 벽화나 불상을 갖추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승려들이 수행, 거주, 그리고 죽은 뒤 매장되던 장소이다. 거주 구역에는 중국식 온돌(土炕), 아궁이, 굴뚝, 벽감(壁龕), 등잔 등의 생활 시설이 갖춰졌다. 막고굴 전체로 따져보면 총 492개의 동굴에 벽화와 불상이 있다. 아울러, 암벽에 세워진 당ㆍ송시대 목조 처마 지붕 구조물이 5개 남아있다.

막고굴이 최초로 만들어진 시기는 오호십육국 시대 전진 시대인 366년으로 추정된다. 승려 낙준(樂僔)이 이 곳 암벽에 석굴을 파고 불상을 조각한 것을 시작으로, 그 후 법량선사(法良禪師) 등이 계속 동굴을 파고 수련하게 되면서 이 곳은 막고굴(漠高窟), 즉 '사막(沙漠)의 높은[高] 곳의 굴'이라 불리게 되었다. 후대에 들어 한자 '막(漠)'과 '막(莫)'을 통용하게 되면서 이름도 막고굴(莫高窟)로 바뀌게 된다. 오호십육국 시대부터 북조(北朝) 시기사이의 기간에 만든 동굴은 모두 36개인데,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제268호굴, 제 272호굴, 제275호굴은 아마도 북량(北涼; 397년 또는 401년 ~ 439년)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석굴의 벽화, 불상의 양식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오호십육국 시대인 북량, 북위 시대에는 서역(西域) 불교의 미술적 영향이 강하며 부처의 일생, 부처의 전생 이야기인 본생담(本生譚), 천불(千佛) 등이 주로 그려졌다. 서위 시대 이후로는 표현 양식에서 중국풍의 영향이 눈에 띄게 커진다. 수ㆍ당 시기는 막고굴의 전성기로, 시대가 가장 긴 당나라 때에 만들어진 석굴이 225개로 추정되어 역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 많은 것이 수나라 시대의 석굴로 97개를 차지한다. 이 시기의 불상은 중국풍이 더욱 강해지고, 전에 없던 대형 불상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또한 불화(佛畵)도 주제가 더욱 풍부해지고, 화면구성도 대담, 웅장해지며, 색채도 화려해 지는 등 미술적 기교의 수준이 최고조에 다다른다.

북송 시대를 거쳐 둔황 일대가 서하의 지배 들서가면서 새로 만들어지는 석굴의 수는 점차 줄어들게 된다. 기존의 석굴만 보수하고 새로 만드는 석굴은 상대적으로 거의 없다시피하여, 서하 때 만들어진 석굴은 20개, 원나라 때 만들어진 석굴은 7개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몽골의 쇠퇴과 중앙 아시아에서 건너오는 이슬람 세력의 진출, 그리고 결정적으로 원나라 제국의 멸망으로 실크로드 무역이 크게 쇠퇴하면서 둔황도 이와 더불어 같이 쇠락하게 된다. 이후 오랫동안 막고굴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잊혀지게 되었다. 청나라 강희(康熙) 40년(1701년) 이후에야 다시금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천불동(千佛洞)'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또 세월이 흘러, 막고굴이 다시 한번 크게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은 1900년, 이른바 '둔황 문서'가 발견되면서 부터이다. 그러나 둔황 문서가 발견되었음에도 정작 막고굴 자체의 보존, 보호 노력은 별로 없었고, 그러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손상을 입었다. 막고굴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되고 본격적으로 보호되기 시작된 것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의 일이었다. 막고굴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저우언라이의 보호 지시로 이미 1961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 있었던 덕분에 1966년 발발한 문화대혁명은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3 장경동

1900년, 돈황 석굴에 살고 있던 도사 왕위앤루(王圓籙; 왕원록)[7]가 새로 도교 사원을 지을 목적으로 대규모 청소 작업을 시작했다. 그의 조수 양(楊) 아무개가 제16호굴 벽에 대고 담뱃대를 털었는데, 뭔가 울림 소리를 듣고 왕위앤루에게 알렸다. 벽을 두드려본 결과 속이 빈 공간이 있음을 깨닫고 벽을 헐어내자, 북쪽 통로 벽에 작은 문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문을 열고 다시 길이 2.5m, 너비 2.5m, 높이 3m의 석굴을 발견하였는데, 이 밀실안에서 약 5만여 점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불경과 관련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유명한 돈황 유물의 정수인 제17호굴 장경동(藏經洞)의 발견이다.

왜 장경동에 고서들을 감춰두었는지는 아직도 논란이지만, 크게 2가지 설이 있는데 바로 폐기설과 피난설이다. 스타인은 폐기설을 주장했다. 즉 당시 기준에는 이미 쓸모없어저 버린 문서들이었지만 그렇다고 불경과 고서들을 파기하거나 태워버릴 수는 없으니 한곳에 넣고 폐기해버렸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펠리오의 주장으로, 당시 서하 군대의 침략을 피하려던 승려들이 문서, 유물들이 파손될까 두려워 몰래 숨겨놓고 도망가버렸다는 피난설이다. 왠지 사해문서와 비슷하다 피난설을 회의적으로 보는 측에서는 장경동의 유물들은 석굴 속에 수장되기 전에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었고, 석굴 입구도 밀봉하고 채색벽화를 그 위에 그려두는 등, 아주 신경써서 은폐 조치를 취한 점에 주목한다. 최근 피난설을 주장하는 측에서 기존의 서하 침공설 대신 1006년 카라한의 침공으로 호탄 왕국이 멸망한 것을 원인으로 제시했다. 카라한은 곧바로 동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경을 숨길 시간이 충분했다는 것이 기존 비판에 대한 반박이다. 진실은 저 너머에...

아무튼 최초 발견자인 왕위앤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청나라 정부는 유물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몇번이고 장경동의 발견을 보고했으나 관리들은 시큰둥한 반응만 보일 뿐이었고, 서태후에게까지도 직접 글을 올렸으나 역시 소식이 없었다. 정부의 안이한 반응에는 당시의 혼란한 중국 상황도 한 몫 했다고 여겨진다. 한편 유물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은 서방 탐험가들이 하나 둘 둔황에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1907년에 영국의 오렐 스타인(Aurel Stein; 1862년 ~ 1943년), 1908년에는 프랑스의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년 ~ 1945년)가 찾아와서 왕위앤루와 흥정 끝에 수많은 희귀 고서, 유물들을 사들여 중국 국외로 유출시켰다. 역설적으로 이는 중앙 아시아 역사 연구, 불경 연구 등과 둔황학(敦煌學)이라는 학문의 탄생에도 이바지하였다.

폴 펠리오는 언어에 뛰어난 소질이 있어 중국어 등 13개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고 하며, 머무르는 도시마다 현지인들 틈에 섞여 며칠만에 해당 언어를 습득할 정도였다고 한다. 1906년 이미 신장(新疆)지역을 탐험중이었던 펠리오는 1908년, 둔황에서 고문서가 나왔다는 소식에 우루무치를 떠나 막고굴 도착한 뒤, 그 곳에서 3주 동안 머물며 가치있는 문서 약 2,000 점을 꼼꼼히 추려내서 은 500냥에구입했다고 한다. 이 때 그 입수한 문서들 중의 하나가 바로 혜초왕오천축국전이다. 반면 스타인은 은 200냥을 들여서 문서 24상자, 기타 유물 5상자를 사갔으나 한문, 중국어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반출한 물건 중엔 별 쓸모 없는 것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유학중이던 영국에서 스타인의 둔황 문서 획득 소식을 접하게 된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년 ~ 1948년)도 서방 탐험가들의 행렬에 끼어들어서 실크로드를 통한 불교 전래 경로를 탐사한다. 오타니는 나중에 교토 니시혼간지 사의 주지가 되어 직접 해외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대신 3차례에 걸친 탐험단을 조직, 후원하며 중국 서역(西域) 각지에서 손에 넣은 약 5,000점의 유물을 일본으로 유출시켰다. 이것이 이른바 오타니 컬렉션으로서, 이 중 베제클리크 천불동(Bezeklik Thousand Buddha Caves)(영어 위키백과) 관련 유물이 가장 유명하다. 이렇게 유물 획득을 후원하는 과정에서 방만한 재정 관리 덕분에 자금난에 빠진 오타니는 회계부정 등의 말썽을 일으키며 니시혼간지 주지 자리에서 쫓겨났다. 오타니 컬렉션도 세 토막이 나서 1/3은 일본에 남았고, 1/3은 현재 오타니가 은퇴후 머물렀던 뤼순에 있으며, 1/3은 일본의 광산업계 재벌인 구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에게 넘어갔고, 구하라는 이권을 얻을 목적으로 위하여 이를 다시 조선총독부에 기증하였다. 해방 후 조선총독부가 철수하면서 이를 그대로 한국 땅에 두고 갔고, 이리하여 오늘날 막고굴의 둔황 문서 중 일부가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 남게 되었다. 독일의 고고학자 알버트 폰 르 콕(Albert von Le Coq; 1860년 ~ 1930년)도 베제클리크 천불동에 찾아와 벽화를 뜯어 베를린에 보냈고, 대부분이 2차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고 만다.

한편 청나라 정부는 나중에서야 이 문서, 유물들의 가치를 인식하고 1910년에 남아 있는 유물들을 베이징으로 옮겨는데, 당초 발견된 5만여 점의 문서, 유물 중 막고굴에 아직 9,000 여 점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이를 베이징에 옮기고 다시 확인 해 보니 남은 것은 결국 8,757점에 불과했다. 이 문서들은 현재 베이징의 중국국가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여기서 발견한 금강경 한역본 돈황사본에 상당수의 오류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단어의 생략, 첨삭, 오기, 반복, 필사시 빠뜨린 단어, 혹은 문장을 오른쪽 옆 빈 行에 기록한 경우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은 예들로 보아 금강경 돈황사본은 신앙과 기원을 위하여 필사한 것이다.[8]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5.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
  6.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7. 승려가 아닌 일개 도사가 석굴에 살고 있다는 것은 이미 이 지역에서 불교의 영향력이 많이 쇠퇴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8. 최종남, "범(梵),장(藏),돈황본 『금강경』 대조 연구" , 인도철학 2009년, 제27권 247~2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