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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
부친 | 로버트 크롬웰 |
모후 |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
생몰년 | 1599년 4월 25일 ~ 1658년 9월 3일(59년 4개월 9일) |
재위기간 (호국경) | 1653년 12월 25일 ~ 1658년 9월 3일(4년 9개월 22일) |
서명 |
크롬웰 문장 |
1 개요
잉글랜드 동부 헌팅턴의 젠트리 계급 지주 출신으로, 1628년 하원 의원이 되었다. 토머스 크롬웰의 먼 친척이다.[1]
2 왕의 목을 자르다
1642년 찰스 1세와 의회가 충돌,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자 크롬웰은 철기군(Ironside)를 조직하여 마스틴 무어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내전 초반 왕당파에게 군사적으로 밀리던 의회파는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후 크롬웰은 철기군을 중심으로 신형군(New Model Army)을 조직하여 네이즈비 전투에서 왕당파에 대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의외지만 찰스 1세와는 그렇게 사이가 나쁘진 않았다고 한다. 찰스 1세가 사로잡히고 나서도 크롬웰이 깍듯이 예우 했으며 찰스1세는 군대가 의회보다 자신에 우호적이라 여길정도로 착각하며 재기를 꿈꿀정도였고, 말이 포로지 행동의 자유를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찰스 1세의 편지보관함 궤짝이 발견되면서 사태는 변하는데 크롬웰을 비롯한 의회파들에게 사로잡혀서 좋은말로 속이고 있고 추후에 남김없이 모가지를 칠거라고 으시대는 내용의 찰스 1세가 왕비 에게 보낸 편지들이 발견되면서 크롬웰은 국왕 처형에 찬성쪽으로 기울었다고 한다. 이후 국왕과 협상하려는 장로파에 맞서 국왕을 극형에 처하자는 독립파의 수장이 되었으며, 결국 장로파를 몰아내고 결국 찰스 1세 처형의 주동자 중 하나가 된다.
이후 독립파가 중심이 되어 영국 역사상 유일한 공화정부인 '잉글랜드 공화국'을 세우자[2] 크롬웰은 국가 원수인 "호국경(Lord Protector)"에 취임한다.[3] 정식 명칭은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연방호국경(Lord Protector of the Commonwealth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으로, 최고 통치권과 정부권을 호국경에게 위임하는 것을 규정한 헌법이 영국 역사의 유일한 성문법 "통치장전(統治章典, Instrument of Government)"이다. 이는 의회가 아닌 장교회의 아이디어였다.
3 호국경
공화정부의 수장이 된 크롬웰은 1649년 영국 대내란이 끝나자마자 찰스 1세 시절 거의 동시에 가장 먼저 한 게 영국 본토가 내전으로 정신 없을 사이 거의 독립국에 가깝게 10년 내내 통제를 못 했던 아일랜드의 가톨릭 연맹의 평정이었다. 찰스 1세 시절 영국 내전으로 잉글랜드의 세력이 악화된 사이 아일랜드에서 폭동이 발생하여 10만~20만의 잉글랜드인들을 살해하고 신교도 교회를 불태웠기 때문. 게다가 찰스 1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사돈인 네덜란드에 딸을 시집보내면서 귀금속을 담보삼아 사채를 빌리고 이 돈으로 프랑스 로렌 공작을 매수하여 1만 병력을, 또 아일랜드에 가톨릭 신앙의 자유와 독립을 꼬드기며 1만 병력을 요청하려 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영국 내전 끝나고 나서 아일랜드 토벌군을 모집하여 파견하려 하자 그동안 전쟁에 지친 병력들이 파병을 거부하고 폭동을 일어켰다. 의회 대다수는 시골지주, 교수, 상공인 같은 무리들이었고 내전 기간 피를 본 군대가 이들 명을 받을 리가 없었다. 결국 군대를 이끌고 공을 세운 크롬웰이 나서서 항명을 일으킨 병력들을 주모자 몇 명을 처형했고 도망간 탈영 부대들을 추격하여 이들이 숨은 마을에 가차없이 포격을 하여 진압했으며, 잡힌 반란군 400명을 총살시켜 버렸다. ㅎㄷㄷ 이렇게 가차없이 폭동을 막은 공로로 이 과정에서 크롬웰이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반란 병력을 막고 나서 역시 군대를 스스로 이끌고 아일랜드에 친정을 하는데 처음엔 농민과 살인에 관계되지 않은 반란자들은 사면령을 내렸으나 사태가 여의치 않자 알다시피 크롬웰은 아일랜드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사정없이 초토화시키고 살인과 방화 약탈을 동반하여 진압했다. 이때 죽어나간 아일랜드인들이 당시 인구의 1/4 정도였던 20~30만 가량이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아일랜드에서 크롬웰은 아돌프 히틀러와 동급으로 증오받고 있다.[4]
군주제와 상원 의사당을 폐지하고 잉글랜드 공화국을 세웠으며 남아있는 의원들은 1653년에 전부 고향으로 돌려보내 버렸다. 의회의 대다수는 일단 청교도들이긴 한데 다수파는 장로회 였지만 크롬웰 그의 군대는 소수파에 속하는 독립파였기 때문에 원래부터 갈등이 있었고, 크롬웰이 찰스 1세가 마지막 저항 시도를 했던 스코틀랜드와 의회 장로회가 연관되었다고 약간의 조작과 진상조사 없이 그 구실을 핑계로 장로회를 숙청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공화정이라는 정부가 한 게 의회 해산(...). 그는 존 램버르트와 함께 영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는데, 전 유럽에서 헌법 작성은 최초로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그냥 본인이 갈아엎고 군사독재를 시작해 버린다(...). 평등한 선거를 주장하는 수평파, 그 외 가톨릭, 왕당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청교도 법령을 반포하는 등 군사독재권력을 휘두른다.
예를 들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제럴드 오하라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인데, 그가 스칼렛 오하라에게 이 얘기를 해준 적이 있다. 그래서 소설의 시점에서는 200년이나 더 이전에 일어난 '드로흐다의 포위' 사건을 떠올린 스칼렛은 레트에게 크롬웰 같은 학살을 셔먼 장군이 할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는데, 1649년에 함락시키고 남녀노소, 심지어 같은 개신교도들마저 2천 명 넘는 민간인을 학살한 드로흐다 공성전 이후의 학살을 의미하는 것이다.(레트는 "셔먼은 크롬웰하고는 달라요"라고 대답한다.) 영화에 언급될 정도로 드로흐다의 학살과 아일랜드 재정복 과정에서의 크롬웰의 폭력은 아일랜드인들의 역사적 기억에 뿌리 깊은 트라우마적인 상처를 안겼다.
이게 단순히 '우왕 크롬웰 잔인함 ㅋ'으로 끝날 게 아니라 상당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게, 크롬웰의 아일랜드 진압 정책의 핵심이 아일랜드 정복 이후로도 아일랜드 내부의 핵심적인 정치 세력으로서 정국을 주도했던 가톨릭 귀족들과 켈트족 족장들의 힘을 아예 기반부터 절멸시키기 위한 포괄적인 토지 강탈 및 재분배 정책이었다. 계획적으로 크롬웰의 병사들은 씨앗 한 톨, 돼지 한 마리 남기지 않고 아일랜드 전역을 처절하게 불지른 다음, 원래 주민들은 늪지대만 가득한 쓸모 없는 땅인 서부의 코노트 지방에 가두어 버리고, 나머지 알토란 토지는 전부 다 자신을 따라온 부하들에게 분배했다. 처절하게 가난한 대다수 가톨릭 소작농을 극소수의 개신교 지배층이 착취하는 아일랜드의 기형적인 사회 경제적 구조는 이렇게 크롬웰의 초토화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이 양반에 대한 증오가 아일랜드에서는 하도 뿌리 깊게 박혀 2008년 당시 아일랜드 총리였던 버티 아헌이 영국 고관대작 한 명을 만나 회담을 하는데, 그 회담 장소에 크롬웰의 초상화가 걸려있자 외교적 결례도 무릅쓰고 인상을 찌푸리며 그대로 박차고 나온 일까지 있었다.
1651년에는 항해조례(=항해법)를 반포하면서 네덜란드 중계무역상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로 인해 일어난 영국-네덜란드 전쟁(제1차 영란전쟁)에 간신히 무승부를 거두면서 네덜란드 유일의 패권체제에서 벗어나 잉글랜드가 제해권과 식민지 개척에 좀 더 공격적으로 나설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5]
하지만 국내 사정은 여전히 어지러웠다. 그 이유는 엄격한 청교도법령에 입각한 강력한 군사독재 정치 때문. 크롬웰과 청교도들은 그 '청교도 도덕성' 곧 엄격한 도덕주의를 지키도록 할 법을 도입했는데, 극장이나 운동 경기나 춤 등 청교도 입장에서 죄악시될 수 있는 행동들을 폐지하는 것.[6] 독실한 청교도임에도 불구하고 1290년에 영국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영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용했는데, 원래 크롬웰이 믿는 청교도가 속한 칼뱅파 급진주의 교단들은 이 때만 하더라도 공적인 스페인 중심의 가톨릭 절대주의를 막기 위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해적들과도 협력하는 등, 기독교 외부 종교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타종교에 대해 청교도가 관용적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말 그대로 당장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었기 때문에 손을 잡았다고 보는 편이 옳다. 마찬가지로 가톨릭 국왕인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도 합스부르크 견제를 위해 오스만 술탄과 손을 잡은바 있다. 여하튼 근본주의 성향에 가깝게 엄격했던 건 변함 없어서, 결국 민중들은 그나마 자유롭던 왕정 시대를 그리워하게 됐는데, 이 때문에 왕당파의 복귀를 두려워한 젠트리 계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크롬웰은 1654년 의회를 해산시키고 군부독재 하에서 종신 호국경이 되었다. 심지어 의회에선 그를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는 젠트리 계급이 그를 왕위로 올리는 대신 의회가 군부를 재정적으로 통제하려고 하던 일환이었는데, 군대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으면서 크롬웰 체제가 사후 붕괴하는 원인이 된다. 대신 양보로 크롬웰이 후임자를 지명할 수 있다는 정도로 타협한다.
4 사후의 수난
1658년 9월 3일 크롬웰이 독감으로 사망한 후, 그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호국경 자리를 이어 받았으나, 장로파를 중심으로 하는 의회의 반 크롬웰 세력이 망명 중이던 찰스 2세를 불러들여 그를 다시 왕으로 옹립하자 크롬웰 세력은 간단하게 격파당해 버렸다. 크롬웰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안장되었는데 왕정복고 이후 당연히(…) 무사할 수 없어, 찰스 1세 처형 12주년인 1661년 1월 30일에 복수심에 불타던 찰스 2세에 의해 부관참시[7] 당하고 추종자들이 줄줄이 교수형 당하는 것으로 짧은 영국 공화정은 막을 내린다.
짧은 통치 기간이었지만, 군사적인 연전 연승과 국왕을 처형하는 독단적 태도와 그리고 통치 시기의 무자비함 때문에 그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평가는 민간 신앙의 레벨로 승화되었다. 17세기 후반에는 강력한 폭풍을 '크롬웰 폭풍'이라 불르기도 하고, 그가 악마를 부렸다거나 초자연적인 검은 개를 끌고 다녔다던가 하는 전설들이 만들어졌다. 특히 큰 코에 대한 별명이 많았는데 구리 코, 빛나는 코, 심지어는 '전능하신 코'도 있었다.
단, 그의 머리는 많은 수난을 당했다. 그의 잘린 머리는 한동안 시가지에 효수되었다가 실종되었다. 이후 그의 머리를 지키던 경비병의 가족들이 경비병이 죽은 후 크롬웰의 머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프랑스인 수집가에게 팔아버렸고 프랑스로 건너간 후 무려 4번이나 주인이 바뀌어 가며 훈제 당하거나 창에 꿰어져 전국을 순방하기도 했다. 심지어 창에 있던 좀벌레가 머리로 옮겨져 턱엔 구멍이 생기고, 그 유명한 코도 폭삭 주저앉았다. 결국 찌그러질대로 찌그러진 그의 머리는 자그마치 300년이나 세상을 떠돌다가 1960년에서야 다시 모국으로 돌아와 그의 무덤 곁에[8] 묻혔다. 이 부분은 2015년 6월 14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그러나 실제 웨스트민스터 사원 관리인의 이야기로는 크롬웰의 머리가 효수되었다가 폭풍이 부는 날 바닥에 떨어졌고 그것을 경비병이 주워서 자기 집에 계속 보관을 해 두었었다고 한다. 그리고 1960년에 그 경비병의 후손들이 크롬웰의 머리를 그의 모교에 돌려주어 정원에 묻었다고 하였다. 발견되었을 당시 혐짤주의
어느 수집가가 그린 크롬웰의 머리
웨스트 민스터 궁 옆에 세워진 크롬웰의 동상
아마 이 사람만큼 최악의 고인 능욕 피해자는 인류 역사에 있을까 말까 할 것이다. 무려 300년이나 수난을 당했으니 말이 필요 없다.
5 군사적 능력
기라성 같은 무장이나 명장들이 사라져간 유럽의 전쟁사에서 크롬웰의 능력은 크게 부각될 게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꽤 기묘한 전력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40세 이전까지 거의 시골 소지주나 기껏해야 하원 의원으로 머물렀던 듣보잡 인물이, 어느 날 갑툭튀해서 나라를 평정해버렸으니 말이다.
비유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내전이 일어났는데, 어느 변두리 지방의 지역구 의원(...)이 정규군 상대로 동네 청년 몇 십명을 긁어모아 싸움을 걸더니 어느새 대통령의 목을 자르고 독재자가 된 셈. 물론 단순 비교는 곤란하기는 하다. 당시에 왕당파 세력이 크롬웰이 몸담던 의회 세력보다 군사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모집할 수 있었던 기병 전력의 수나 병력의 응집력 면에서 앞섰기 때문으로 딱히 병력의 질이나 전술, 전략적인 면에서 우위에 섰던 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병 위주로 구성된 의회군의 경우 일종의 향토예비군 성격이 강해서 자신들의 구역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기에 운용에 애로사항이 많았다.
여기서 크롬웰이 잘한 것은 지극히 기본에 충실했다는 점이다. 사실 백전노장의 전쟁경험자나 천재도 아닌데 기묘한 계책으로 상대방을 흔들 수 있었을리는 없다. 크롬웰은 기존의 약점을 충실히 보강하고 내실을 다져서 싸울 수 있는 '군대'를 길러내는데 중점을 두었다. 특히 기병의 운용과 질이 전술의 키포인트임을 파악하고 이를 육성하는데 애쓴 것, 싸울 의욕이 없는 병사들에게 명분을 심어준 것[9], 그전까지 민병대 수준이었던 군대를 강도 높은 훈련으로 정규군 수준까지 끌어올린 것, 귀족이나, 서열상 연장자라는 이유로 장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전투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나 제대로 지휘할 줄 아는 사람으로 대체한 것이 크롬웰의 군사행동의 핵심이었다.
사실 이 '기본'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도 크지만 이걸 제대로 할 수 있느냐, 못하느냐의 차이는 그보다 훨씬 크다. 당장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일본군만 봐도 알수 있다. 이 기본을 이론상으로 아는 것과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것에도 엄연한 차이가 있기도 하므로 이론만 안다고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크롬웰은 이걸 문자 그대로 백면서생이 해냈으니 대단한 것이다. 물론 당시 여러가지 상황이나 배경이 이 사람에게 유리하게 돌아간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차적으로 병력이 이리저리 분산되어 있어서 그렇지, 왕당파에 비해 의회파 군의 규모 자체가 엄청난 차이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는 점도 있다. 그리고 왕당파군은 잘 훈련된 군사전문가라기 보다는 적지에 들어가면 약탈자로 돌변하는 폭도에 가까웠다. 내전 초기에는 의회군도 비슷했었다. 아니, 오히려 왕당파는 찰스 본인의 왕위를 통한 인맥으로 30년 전쟁의 전장에서 당시 현대적인 대륙의 대규모 전쟁에서 잔뼈가 굳은 용병들을 많이 고용할 수 있어 군사적인 인프라는 왕당파가 더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청교도였던 크롬웰의 결벽증적인 성향과 체제를 정비하는 동안 매우 엄격해진 군율 등이 잘 맞아떨어져 이러한 폭도 성향은 줄어 들었고, 무엇보다 병사들의 봉급 체계가 확실하게 잡혀 더 이상 민가 약탈에 의존하지 않고 병사들이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어 이전에는 지역 유지들의 향토 방위군 수준에 불과했던 잉글랜드의 군대를 처음으로 유럽 대륙의 사례를 본 딴 정규군으로 진화시켰다. 즉, 크롬웰은 근세 유럽의 군대가 중세 시대의 개별 영주들이 독자적으로 모집한 군벌 집단에서 국가의 획일적인 관리 하에 지휘 체계가 딱딱 편성된 현대적인 의미의 정규군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기여를 한 것이 군사사적 관점에서 그의 가장 큰 의의라 할 수 있다. 크롬웰 아래 새롭게 재편성된 의회군은 신식군(New Model Army)이라고 불리며 전원이 당시 가장 값 싸고 병사들의 부상도 숨겨주는 효과가 있었던 저질 싸구려 붉은 색 염료로 도색된 옷을 일괄적으로 입혀 최초로 현대적인 의미의 군복이 생기는 것에도 일조 했으며, 이는 왕정이 복고된 후대의 영국군에게도 계승되어 그 유명한 영국 레드코트의 전설의 시발점이 된다.
그리고 크롬웰이 전공을 세워나가는 동안 내부에서 이렇다 할 큰 견제는 받지 않았던 것도 이점으로 작용했다. 그 때문에 크롬웰은 자신이 직접 육성한 철기대(鐵騎隊)의 육성 커리큘럼을 의회군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크롬웰의 지휘 능력도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필요에 따라 진형을 전환하거나 기병의 부무장으로 권총을 지급하는 등, 지휘관으로서의 유연성도 습득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실 크롬웰의 군사적 업적은 직접적인 야전 사령관이 아니라 군제 개혁가로서의 업적이다. 야전에서 크롬웰은 본인의 철기대만 지휘하는 기껏해야 대대장 정도의 지휘만 했지, 전체적인 의회파 신식군의 야전 지휘관은 그의 친구였던 '흑색 톰' 토머스 페어펙스 경이었다. 야전 지휘관으로서 페어펙스는 내전기 영국의 아일랜드 가톨릭 연방군의 오웬 로 오닐, 스코틀랜드 왕당파의 몬트로즈 백작 제임스 그래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장으로서, 당시 영국에서[10] 대륙식의 대규모 회전과 병과의 합동 전술을 이해하고 있는 몇 안되는 지휘관이었다. 정치적으로는 본인이 의회파의 수장이었을지 언정, 야전에서는 크롬웰도 페어펙스의 일개 부관에 불과했고, 사적으로도 친한 친구와 이런 미묘한 위치에 있으면 무슨 식으로든 마찰이 생기기 마련인데 크롬웰은 현명한 처신으로 야전에서는 페어펙스에게 전권을 확실하게 밀어주어 항상 대귀족과 왕족 출신 지휘관들의 군공 다툼으로 지휘 체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왕당파에게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6 기타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영국에 독일군이 상륙했다는 경보 암호가 '크롬웰'이었고, 그의 이름을 딴 순항전차 크롬웰도 만들어졌다.
어쨌든 크롬웰이 당시 제해권을 가졌던 네덜란드에게 한방 먹이면서 훗날 영국이 해상왕국이 되는 데 큰 기여를 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서, 현대 영국인들이 뽑은 영국 역사상의 위인 중에서도 항상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이다.
만화 헬싱 2권에서 아카드가 변신할 때의 "상황 A <크롬웰> 발동"이란 대사가 나오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암호와 크롬웰에 대한 민간 신앙적 두려움을 작가가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의 등장인물인 셰리 크롬웰의 성은 이 인물의 성에서 따 왔을 가능성이 높다.
영국의 국회 의사당인 웨스트 민스터 궁에 가보면 그의 동상을 볼 수 있다. 왕의 목을 딴(...) 인물이기에 국왕과 대귀족 중심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역사적으로 반대해 온 영국 하원의 반골 기질과 필요하면 힘으로도 의회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것을 상징하는 의회의 수호성인 비슷한 존재로 대접 받아 새워졌다. 현재도 영국에서는 소수 의견이지만 항상 존재해 왔던 영국 공화파의 상징적인 인물로 내세우고 있는데, 내력을 보면 오히려 의회의 견제 때문에 한번도 스페인, 프랑스와 같은 권위와 권력을 누려본 적 없이 항상 분리된 권력으로 나라를 다스리는게 전통이었던 잉글랜드의 왕들에 비해 훨씬 더 현대적인 의미의 독재자에 가까웠던 인물이기 때문에 뭔가 미묘한 점이 많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의 동상이 바라보고 있는 맞은 편 건물 뱅퀴팅하우스의 벽에는 찰스 1세의 두상이 걸려있다. 왜 하필이면 두상일까 이를 가리켜 서로가 서로의 숙적을 바라보고 있는 묘한 배치라고들 한다.
화가가 그의 얼굴을 그릴때 포토샵 왜곡하여 잘 생기게 그릴까봐, 내 얼굴을 본 모습 그대로 그리지 않으면, 아니 종기 1개라도 빼먹고 그리면 돈 1푼도 안준다고 한 바 있다고 한다...
알버스 덤블도어를 연기했던 리처드 해리스가 올리버 크롬웰을 연기하고 알렉 기네스가 찰스 1세를 연기한 영화 풍운아 크롬웰(Cromwell, 1970)에서는 제목처럼 주인공이다. 영국과 미국 합작에 감독인 켄 휴즈, 주연 배우인 리처드 해리스, 알렉 기네스, 티모시 달튼 등 배우진들도 싸그리 영국인들이다. 헌데 찰스 1세도 나쁘게 나오지 않고 둘이 같은 시대를 잘못 만났다 이렇게 나오며 처형당할때 왕자인 찰스 2세나 아내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장면을 보면 그냥 무난한 군주 정도로 나온다. 찰스 1세를 사형장으로 보내고 홀로 왕좌같은 자리에 앉은 모습으로 나오며 영화는 끝난다. 하지만 영화평은 그냥저냥 범작 수준 평가이며 흥행도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 ↑ 토머스 크롬웰의 great-great-grandnephew
- ↑ "Commonwealth and Free State"라고도 불렀다. 공화국이자 자유국. 혹은 연방 자유국 정도로 번역되는 이름. Commonwealth란 단어 자체는 영연방 등에서 사용되고 있다.
- ↑ 크롬웰에게만 줬던 직위가 아니라 직계왕족아닌 섭정을 호국경이라 한다. 리처드 3세도 호국경 시절이 있었는데 에드워드 3세의 고손자에 불과한 방계혈족이었고, 4대 글로스터 공작시절. 크롬웰 이전 최근 호국경은 에드워드 6세의 외삼촌 서머셋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
- ↑ 2차 대전 당시 아일랜드는 반영 감정으로 영국이 독일에 폭격 당해서 꼬시다는 소리도 있었지만, 전쟁 초기 벨파스트를 폭격하러 간 독일 폭격대가 구름 때문에 더블린을 불바다로 만들자 그런 소리는 쑥 들어갔다.
- ↑ 네덜란드가 영국에게 패전했다는 것은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유명해진 후 널리 퍼진 이야기지만, 이 나무위키의 영란전쟁 항목만 봐도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 ↑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크롬웰은 나라를 수도원으로 만들 셈이냐!
쉿!라는 대사가 나온다. - ↑ 당시 방부처리가 매우 잘 돼있어 머리를 자르는데 30번이나 내리쳐야 했다. 몸통은 네 조각이 났다.
- ↑ 정확한 장소는 비밀로 붙여젔다. 더 이상 몹쓸짓을 당하지 않기 위해... 그러다 보니까 그가 다니던 모교(케임브리지 대학교) 근처에 묻혔다든지 하는 소문도 있다.
- ↑ "찰스 1세는 사탄이고, 왕당파는 사탄의 부하다. 니네는 우리 땅에서 사탄과 그 부하들이 날뛰게 내버려둘 셈이냐?"하고 종교적으로 철저히 세뇌시켰다.
- ↑ 편의상으로 영국이라 부르는데, 이 시절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는 모두 다 국왕만 같지, 법이나 정치, 주권 등은 모두 다 분리된 개별 왕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