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부투 세세 세코


모부투 세세 세코(Mobutu Sese Seko, 1930년 10월 14일 ~ 1997년 9월 7일)

1 개요

콩고민주공화국독재자이자 콩고민주공화국을 말아먹은 장본인
착복왕이라는 별명을 가졌을 정도로 극도로 부패한 위정자

이 작자가 벌인 행동은 사실 독재자로서는 흔해빠진 평범한 수준일지 모르나[1],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키에 항목이 개설되고 자세히 다룰 정도가 된 건 상상 이상이었던 그의 착복 규모에 있다.

2 생애

모부투는 1965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카사부부를 축출하고 스스로 대통령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모부투는 자신의 정권안정을 위해 무소불위의 독재권력을 휘둘렀다. 모부투는 1967년 카탕가 반군과 콩고군에 편입된 백인용병의 반란으로 한때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해 카탕가 주의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고, 반군 지도자들은 앙골라로 망명했다. 그해 모부투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자 로랑 카빌라는 동부 산악지대 키부에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인민혁명당(People's Revolutionary Party, PRP)을 창당하고 금광채굴과 상아무역으로 자금을 충당했다. 한편, 모부투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카탕가의 구리광산 등 기업과 산업을 국유화하고, 자신의 인민혁명당(Mouvement Populaire de la Révolution, MPR)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불법화했다. 반체제 세력과 반군들의 끊임없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모부투는 1970년 대선에 단독후보로 출마해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71년 10월 모부투는 콩고민주공화국이라는 국명을 다시 자이르(Zaire)로 변경하고, 지명도 아프리카식으로 바꾸었다. 1972년 1월에는 자신의 이름도 조제프 데지레 모부투에서 모부투 세세 세코로 개명했는데 이 뜻은 "초인적 인내와 불굴의 의지로 지나가는 발자취마다 불을 남기며 정복에 정복을 거듭하여 전진하는 전능한 전사"라는 의미라고 한다. 한편 이 무렵 카탕가 주도 샤바 주로 이름이 바뀌었다. 모부투는 1977년 대선에서도 단독후보로 출마해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해 앙골라의 지원을 받은 카탕가 반군이 샤바 주를 공격해오자 모부투는 프랑스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였다. 카탕가 반군은 정부군의 반격으로 격퇴되었다.

서방진영은 냉전기간에 모부투를 아프리카에서 공산주의를 방어하는 보루로 생각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독재자 모부투는 국고와 천연자원을 착복해서 수십억 달러를 축재하면서 국가경제를 거덜나게 하는 등 도둑정치를 일삼았다. 확인된 횡령 금액은 40억달러 이상의 재산을 해외에 도피시킨 것으로 확인되며 이 금액은 콩고민주공화국 총외채의 3분의1에 해당하는 엄청난 돈이였다.

모부투는 개인 금광을 비롯하여 자이르에만 11개나 되는 궁전과 호화 요트, 서방세계에 별장구입 등 많은 재산을 축재했으며 반군이 점령한 자이르동부지역의 모부투 개인 금광 킬로 모토 광산은 8만3천km로 금매장량이 1백여t이나 된다. 모부투의 고향인 그비돌리테에 건축한 대리석 궁전은 악어떼가 우글거리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고 궁전 주변의 광활한 정원에는 사자코끼리들이 길러지고 있으며 국제공항이 이 안에 있을 정도다.

프랑스 리비에라(Riviera) 해안의 520만 달러짜리 빌라를 구입했을 때 그는 계약 후 대금을 달러로 지불할지 아니면 벨기에 프랑으로 지불할지를 물었다고 하는데 이는 39배 정도로 차액의 차이가 엄청난 거였지만 모부투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또한 자이르의 모든 산업을 장악하고 마음 내키는대로 중앙은행에 전화를 걸어 돈을 가져오게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긁어모은 재산을 스위스와 벨기에에 은닉했다고 훗날 재야인사들은 주장했다. 그는 1970년대 스위스 레만호 부근에 8백만 스위스프랑(SFR)의 별장을 구입했고 정기적으로 스위스를 드나들었으며 스위스에서 전립선암 수술을 받은 뒤에는 프랑스에 머무르기도 했다.

게다가 고질적인 부정부패와 정치적 무능력, 행정의 실패로 인해 국가의 기간산업이나 농업, 교통체계 등 국가 전체의 기반시설이 무너졌음에도 모부투는 서방 강대국들의 지원으로 쿠데타 기도나 외부의 침입과 같은 자신의 정권에 대한 도전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의 부패가 얼마나 심했는지 임기 막판에는 모부투의 지지 기반이었던 군인들에게 봉급조차 줄 수 없게 됐다.

냉전이 끝나자 서방 강대국들은 모부투에게 다당제와 권력배분 등을 요구하며 압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모부투는 1980년 대에 "내 두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야당은 안 된"며 그의 1당 독재를 공공연히 주장 했던 지라 계속해서 다당제 도입을 미루고 있었다. 자료 그러나 1990년 궁지에 몰린 모부투는 다당제하의 선거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1991년 모부투는 반대세력이 날로 확대되는 가운데 다당제하의 선거를 실시하고 과도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르완다의 종족분쟁으로 수많은 난민들이 자이르로 유입되면서 그의 권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모부투 정권은 1994년 르완다 내전에서 패배하고 자이르로 도주하던 50만명의 투치족을 학살하면서 동부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냉전 종식과 함께 등을 서방세계는 그에게 등을 돌렸고 모부투는 그 뒤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전립선암까지 얻은 그는 괜히 콩고 내전에 개입했다가 투치와 후투족의 종족분쟁 와중에서 정권 타도를 부르짖으며 봉기한 폴 카가메와 함께 손 잡은 로랑 데지레 카빌라에게 패해 병든 몸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정확히는1996년 모부투가 스위스에서 암 치료를 받으려고 콩고에 없던 사이에 로랑 데지레 카빌라가 이끄는 반군에게 콩고민주공화국의 대부분을 점령당했고, 1997년 5월 결국 반군의 정권 장악으로 축출 당했다. 그는 모로코에 머물면서 프랑스 등지로의 망명을 모색했으나 거부당한 뒤 대부분의 독재자처럼 쓸쓸하게 사망했다.

결국 그는 군병원에서 전립선암으로 사망했는데 그의 나이 66세였다. 그렇게 32년간 독재자로 군림하던 그는 로랑 데지레 카빌라가 이끄는 반군에 쫓겨 지난 5월 모로코로 망명한 뒤 암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는데, 사망직전 그의 체중은 40㎏도 되지 않았으며(모부투의 키가 187cm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 하루 빨리 죽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한다.[2]

3 기타

  • 표범 가죽 모자를 즐겨 썼으며 이로 인해 표범 가죽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그의 이른바 표범가죽 모자를 쓴 걸어 다니는 은행이었다.
  • 그는 월드컵을 정적을 제거하는 데 이용하기도 했다. 1974년 서독 월드컵 때 자이르는 아프리카 대표로 출전했고 유고 출신의 명장 비디치가 팀을 맡았는데 스코틀랜드, 유고, 브라질과 한 조에 속했다. 자이르가 첫 경기에서 스코틀랜드에 0대 2로 패하고 유고와의 두 번째 경기를 앞뒀을 때 자이르의 독재자 모부투 세세 세코는 “유고 출신이 유고와의 경기에 감독을 맡아서는 안 된다. 현지에 단장으로 가 있는 체육부 장관이 감독을 맡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6개월 전 조 추첨 때 유고와의 경기가 확정된 것인데, 새삼스럽게 트집 잡은 것이다. 축구 문외한인 장관이 벤치를 지킨 자이르는 유고에 0대 9로 참패했다. 그러자 모부투는 장관직에서 그를 해임했는데 월드컵을 이용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장관을 날려버린 일이 있다.
  • 개인 정원에서 재배한 과일로 직접 브랜디를 만들어 마셨다고 한다.
  • 모부투가 국가 권력을 이용한 국민침탈 행위를 가리켜서 도둑정치(kleptocracy)라는 영어가 생겼다.
  • 모부투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너무나 못되서 실제로 ‘사담 후세인’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 아이러니한 현실이지만 모부투가 물러난 뒤 그가 통치하던 시절과 비교를 불허하는 생지옥이 무려 3년 간이나[3] 펼쳐지고 지금도 혼란 상황이 지속되고 있으며, 새 통치자인 조셉 카빌라도 평범한 독재자에다가 무능하기까지 해서 콩고 국민들은 그나마 가난하기만 하던 모부투 시절을 그리워한다고 한다는 거다. 다만 이건 현재가 더 최악이라 마지못해 이런 것이지, 재평가도 아니다. 이건 북한조차도 김정일, 김정은 시대에 김일성을 더 그리워한다든지 후세인이라크에서 그리워한다든지 차우셰스쿠루마니아에서 그리워한다든지 하는 경우랑 같다. 그리고 콩고에서도 이런 감정에 대하여 비웃는 시각도 당연히 많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2015년 11월호 콩고강 관련 기사에서도 나오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콩고 사람들에서도 어느 콩고 사람이 반론하듯 비웃으며 그때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는 지옥이거늘,그저 예전이 기억이 희미하니까 그때가 더 낫다고 하는 것 뿐이다.라는 말에 모부투가 낫다는 다른 콩고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반론하지 못했다.
  • 여담으로,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방한한 적이 있다
  • 모부투가 얼마나 무서웠으면, 콩고 사람들은 모부투의 본명을 부르지도 못하고 '모 아저씨'라고 불렀다고 한다.
  1. 내전에다가 학살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인종말살 수준으로 계획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면 아프리카에서는 비난하기가 좀 어렵다. 국제법상 전쟁의 룰 등이 거의 지켜지지 않는 곳이 아프리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전 발발은 모부투 탓이라고만 하긴 좀 어려웠다.
  2. 말기암 대부분이 고통스럽지만, 전립선암은 그 중에서도 끔찍할 정도로 고통스럽다. 사실 말기암이 무서운 건 가망이 없어서가 아니다. 치료 가망이 없는 병은 넘쳐난다. 그보다는 죽기 직전의 삶이 너무나 비참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작자가 착복한 돈과 독재 행각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다지 동정은 가지 않는다.
  3. 물론 이후에도 내전은 계속됐지만 동부 지역에서의 공방으로 국한되었다는 점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