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카가메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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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Kagame.
1957년 10월 23일 ~ (58세)

아프리카의 박정희[1]

르완다의 6,7대 대통령이자 독재자. 다만 자기만 생각하고 국민들은 굶어 죽건 병들어 죽건, 나라가 망하건 말건 신경 끄고 사는 아프리카 다른 나라 독재자들과는 달리 국가 발전과 국민 복지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게 사실이라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다. 예전에 우간다의 현 대통령인 요웨리 무세베니의 측근이었던 걸로 알려져 있다.

2 생애

1957년 르완다 남부 탐브웨(Tambwe)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투치족이었으며, 그가 어렸을 때 투치족 학살이 일어나 1960년 우간다로 피난해 난민촌에서 살았다. 이후 우간다독재자 밀턴 오보테에 반대하는 게릴라 국민저항군에 입대했다. 1986년 국민저항군의 리더 요웨리 무세베니가 우간다의 대통령이 되었고[2] 카가메는 국민저항군의 장관이자 무세베니의 측근이 되었다.

당시 르완다는 하뱌리마나 독재정권 하에서 다수의 후투족이 소수의 투치족을 탄압하는 형편이었으며, 이 무렵 카가메는 미국의 레번워스 기지의 미국 육군참모 대학에서 훈련받았고, 르완다 내전에서 투치족들의 르완다 애국전선(RPF)을 이끌게 되었다. 초반에 RPF는 상당한 세를 얻었으나 프랑스벨기에 등이 후투족 독재 정권을 지원함으로써 RPF는 점차 밀리게 되었다. 결국 1993년 아루샤 조약으로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직후 후투족 출신의 르완다부룬디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야 말았다.[3]

이에 후투족들의 인테라함웨나 임푸자무감비 등의 단체는 투치족 학살을 시작했다. 약 세 달 동안 최대 100만 명, 르완다 인구의 20%가 학살당했다. 학살당한 인원은 대개 투치 족이었으나 일부 온건파 후투 족과 피그미 족의 일파인 트와 족도 학살당했으며, 투치 족의 70%, 트와 족의 30%가 학살당했다. 이에 RPF는 반격을 개시해 수도 키갈리를 점령했으며, 이어 르완다 전체를 장악했다. 그사이 UNAMIR 소속 평화유지군들은 감축되었고, 프랑스는 민간인 보호를 (비공식적으로 후투족을 지원) 위해 투크쿼이 작전을 개시하여 안전지대를 구축하였다. 그러자 후투 족은 이 기회를 잡아 자이르, 즉 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으로 피난을 떠났다.

이 피난민 중에는 수십만 명의 인테라함웨가 섞여 있었다. 이에 카가메는 이들을 진압한답시고 자이르를 침공했고, 침공한 김에 자이르 동부의 로랑 데지레 카빌라가 이끄는 산적[4]게릴라와 연합해 1,600km를 진격해 모부투 세세 세코의 자이르 독재정권을 전복하고 카빌라를 대통령으로 하는 콩고민주공화국 정부를 세운다. 그러나 카빌라가 대통령이 된 이후 카빌라가 르완다와 거리를 두자 다시 콩고민주공화국을 침공했고, 이 내전 동안 540만 명의 콩고인이 사망했다. 당시 내전 기간 동안 르완다군과 동맹군 우간다군은 수많은 콩고인을 학살했으며, 내전이 끝난 후에도 르완다는 콩고민주공화국 동부의 여러 반군을 지원하며 자원을 챙겨갔다고 한다.

한편 카가메는 2003년 비로소 치러진 대선에서 95%의 엄청난 지지율로 당선되어 정식으로 르완다 대통령이 되었다. 새 르완다에선 인종, 종교, 민족에 대한 차별이 금지되었고 여성 의원 할당제가 실시되어 의원의 56%가 여성인 국가가 되었다. 경제사정이 개선되어 8% 정도의 경제성장률이 기록되었고 치안사정도 개선되어 현재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에서도 주변국을 보통 여행제한국(콩고민주공화국, 부룬디)이나 여행자제국(우간다)으로 지정해 놓았지만 르완다는 콩고민주공화국과 부룬디 국경을 제외하면 여행유의국에서 그치는 수준이다. 또한 세계 최빈국인 르완다임에도 의료보험을 널리 적용시켜 아주 고급의 서비스는 아니어도 르완다에선 위협적인 질병이었던 설사, 폐렴, 말라리아나 영양실조 등에 대해 대비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업적 때문에 빌 클린턴, 조지 부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그를 "르완다를 지옥에서 건져낸 인물"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그러나 폴 카가메는 독재자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르완다의 언론자유지수는 전세계 179개국 중 무려 169개국을 기록하기도 하였으며 대선 직전 의문에 폭발사고가 일어나거나 정치인에 대한 체포 혹은 실종 등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기사

그리고 2010년에 대선에서는 약 93%의 지지율로 당선되어 7년 임기를 시작했는데, 대선 과정에서 유력 야당 지도자들이 투옥되거나 살해되거나 강압에 의해 재집권에 성공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실제로 콩고민주공화국의 반군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대선 출마가 좌절된 빅투아르 잉가비르 민주세력연합(UDF) 총재는 "자유 투표가 보장되지 않았다"면서 대선 결과에 반발했다. 또한 르완다에서 스웨덴 망명자들을 감시하다가 외교관이 쫓겨난 사례도 있으며, 무엇보다 폴 카가메는 콩고 내전 당시 이뤄진 여러가지 전범 혐의를 받고 있기도 하다.

게다가 폴 카가메가 이끄는 RPF는 르완다의 모든 부를 독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르완다 기업인들이 주축이 돼 지난 2009년 설립한 투자회사 크리스탈 벤처스는 그 자산만 5억달러(약 5700억원)로 평가되는 우량기업이다. 현재 서류상으로는 카가메 대통령이 소속된 여당 소유로 돼 있으나 사실상 카가메 대통령 본인이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크리스탈 벤처스는 각종 인프라와 부동산, 모바일 사업 등에까지 손을 뻗고 있다. UN은 콩고민주공화국의 광물 자원을 탈취한 범죄에 카가메 대통령의 회사가 연루돼 있다고 공개한 바 있다.

2015년 4월부터 부룬디에서 대통령이 3선 도전을 선언한 이후 부룬디에서는 은쿠르진자에 반대하는 시위가 번져나가자, 은쿠르진자는 이를 탄압했고, 이에 폴 카가메는 TV에 출연해 "사람들이 매일 살해되고 있다. 시신들이 거리 여기저기에 널부러져 있다","은쿠룬지자가 살인으로 시간을 때우고 있다"고 은쿠르진자를 비판했다.[5]

그러나 앞에서 은크룬지자를 비판한 것과는 별개로 본인도 진정한 독재자가 되려는지, 아니면 자기가 물러나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안정이 물거품이 될 거라는 두려움 때문인지 3선 개헌을 시도하고 있다. 르완다 의회는 폴 카가메 현 대통령의 3선 도전을 가능하게 만드는 헌법 개정안을 2015년 10월 29일 승인했다. 만약 헌법이 개정되면 무려 2034년까지 대통령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르완다 학살 이후 정권을 잡은 이래 40년 이상 통치할 가능성이 높다. 폴 카가메 측근들은 전체 유권자의 60%가 카가메 정권 연장을 희망하는 청원서에 서명했고 이에 부응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일반 르완다인들 사이에서도 경제성장과 치안 안정을 시킨 것은 사실이므로 르완다 사람들도 폴 카가메는 좋아하지만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제한된 르완다에서 이번 헌법 개정 시도는 수많은 아프리카 국가의 대통령들처럼 그저 권력에 집착하는 독재자와 똑같다고 비판을 받고 있다.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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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부산 해운대 벡스코에서 열린 제4차 세계개발원조총회 개막식에서 기조연설을 하기도 했다.

키가 190cm에 육박하는 상당한 장신이다. 그의 자식들은 2m가 넘는다. 투치족은 유럽인들과 비교될 정도로 평균 신장이 매우 큰 편이다.

제3공화국 시기에 시행된 새마을운동을 매우 좋아한다고 하며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인터뷰에서 새마을 운동에 대해 극찬을 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아스날 FC의 팬이라고도 한다.
  1. 실제로 둘다 평가가 극으로 갈리며 경제성장에 성공했으나 독재적으로 나라를 운영한다는 점이 같다.
  2. 2014년 현재까지 집권중이다(...) 처음엔 아프리카의 신세대 지도자로 주목받았으나 현실은 200만 명의 사람들을 강제수용소에 가둔 막장 독재자이다. 참고로 저 200만 명은 오타가 아니다!!! 르완다 인구의 6분의 1을 잡아 넣은 것이다!!!!
  3. 프랑스 등의 주장으로 카가메의 소행이란 설이 있었으나 일단 2012년 재조사에서 아니란 결론이 나왔다.
  4. 카가메의 지원을 받기 전에 카빌라가 이끄는 게릴라는 민간인 납치로 먹고 사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5. 은쿠룬지자와 폴 카가메는 한 때 좋은 관계를 였으나, 2012년 부터 사이가 틀어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