뱌아체슬라브 미하일로비치 몰로토프
Вячеслав Михайлович Молотов
Vyacheslav Mikhaylovich Molotov
(1890년 3월 9일 - 1986년 11월 8일)
1 개요
소련의 바텐더 정치가이자 외교관. 러시아 쿠카르카(지금의 소베츠크) 출신, 1890년 3월 9일 생. 1986년 11월 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 인민위원회 의장(총리), 외무인민위원(외교장관) 등을 지낸 소련의 대표적인 외교관으로서, 20세기 역사를 보면 여기저기서 이름을 볼 수 있다.
2 생애
2.1 초창기
1906년부터 볼셰비키 당의 당원이자 조직원으로 활동했다. 1909년과 1915년 체포되었다. 지방 당조직에서 활동하다가, 1921년 정치국 후보위원 및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1924년 블라디미르 레닌 사후 이오시프 스탈린을 지지했다. 1926년 정치국 정의원으로 승진, 모스크바 당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 1930년 인민위원회 의장(소련의 총리)에 올랐으며, 1941년 까지 지위를 유지했다. 물론 스탈린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2.2 외교관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 5월에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서방과의 우호적 태도를 추진하던 막심 리트비노프를 대체함으로써 소련의 외교적 테세 변환을 뜻하였고, 1939년 10월에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1941년 5월 스탈린은 몰로토프를 대신하여 각료회의(이전의 인민위원회) 의장이 되었고, 몰로토프는 제1부의장 지위로 내려갔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국가방위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영국, 미국과의 동맹 체결, 국제연합을 창설한 샌프란스시코 회의(1945), 테헤란 회담(1943), 얄타 회담(1945), 포츠담 회담(1945) 등 연합국의 각종 굵직한 회담에 모두 이름을 내밀었다. 1947년에는 미국의 마셜 플랜에 대항하는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 계획인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1949년 1월부터 이것이 실행되었다.
다만 외교 활동을 하면서 다른 것은 신경 쓰지 못한 탓인지 소련 내의 보직들은 라브렌티 베리야에게 많이 잃게 되었다. 전차 생산, 핵무기 개발, 등등. 물론 스탈린과의 오래된 친분과 신임으로 인해 영향력은 건재했으나 이는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몰락하게 된다.
2.3 몰락
결국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몰락과 죽음 이후에 후계자 자리에 공백이 생기자 스탈린은 몰로토프를 지명하였고 일시적으로 2인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곧 정권을 위임하고 휴가를 가는 스탈린의 시험으로 이어졌고 여기서 몰로토프는 서방과 화해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또한 스탈린이 은퇴한다는 소문들이 떠돌기 시작한 것 때문에 바로 스탈린의 불신임을 얻었고, 결국 1948년 12월에 아내가 체포되고, 1949년 3월에 외무장관직을 사임하게 된다 [1]. 다만 스탈린의 살벌함을 두려워한 다른 측근들의 배려를 통해 완전히 숙청되거나 쫓겨나진 않았으나 스탈린은 그를 끝까지 냉대했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하자 다시 복귀하였고, 라브렌티 베리야를 몰아나는데 한 몫 했으나, 니키타 흐루쇼프의 반스탈린 정책이 시작되자 그와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1957년 6월, 흐루쇼프 제거 음모를 이끌어 정치국에서 7-4 투표로 그를 몰아내는데 성공한 듯 했으나, 흐루쇼프는 이를 거부했고 그때까지 정치국에 밀려 상징적이었던 기관인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소집하는 것으로 반격했다. 이 위원회 모임은 몰로토프, 흐루쇼프, 및 모든 고참 공산당원들이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진흙탕 싸움이 되었으나 결국 흐루쇼프의 승리로 끝났고, 몰로토프는 모든 고위 관직을 잃게 된다.
이후 몽골 대사(1957∼1960년), 국제원자력기구 상임대표(1960∼1961년)을 역임, 1962년 은퇴했다. 1964년 6월에 당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반당 행위를 비판받아 모든 당적을 박탈당했다고 발표되었다. 이후 조용히 살다가 1984년 명예회복, 복권되었다. 몇년만 더 살았으면 자기가 건국에 공을 세운 소련이 붕괴하는 것까지도 보았을지도...
3 여담
3.1 몰로토프 칵테일
화염병을 뜻하는 은어인 몰로토프 칵테일은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 소련과 핀란드 사이에서 벌어진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이 폭격기로 핀란드에 폭격을 퍼붓고 있을 때 몰로토프가 선전방송으로 "우리 군은 핀란드 인민에게 빵을 공수하고 있다"는 망언을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빵은 빵이다 이 발언에 빡친 핀란드 측에서 "빵을 받았으니 칵테일로 돌려주마!"라면서 화염병에 이름을 붙인 것이 어원이라고 한다(참조).
어찌된 영문인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는,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몰로토프 칵테일'이라고 알려지게 된 화염병의 생산을 명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참조).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소련의 KS 방화수류탄의 별명이 '몰로토프 수류탄'이라서 혼동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는데, 인용 문헌이 없어서 확실하지 않다(참조).
말하자면 핀란드에서는 "몰로토프에게 주는 칵테일"이라는 의미에서, 나중에 독소전쟁 때는 "몰로토프가 주는 칵테일"이라는 의미에서 몰로토프 칵테일이 널리 쓰인듯 하다. 말 그대로 빵빵 터지는 네이밍 센스다
아무튼 본인은 딱히 화염병을 만들었는지 불확실하지만, 화염병 이야기만 나오면 몰로토프가 언급되면서 화염병의 대명사(...)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우리 문명이 멸망한 뒤에는 화염병의 신으로 추앙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