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벌귀족(중국)

門閥貴族

1 개요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이후 형성된 중국의 지배 계층

이전부터 지방과 중앙에서 세력을 갖춘 호족들이 구품관인법으로 관직을 날로 먹으면서 형성되었다. 다른 기득권집단과의 차이는 국가가 망해도 세력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벌귀족중에서 역사가 오래된 집안은 한나라부터 고위관료직에 오른 기록이 있을 수준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가문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해서 최전성기가 지나가 버린 당나라 시기에도 황제도 벼락출세한 한미한 가문이라는 소리를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문벌귀족의 격을 따지는 씨족지를 편성할 때마다 항상 당 황제들은 아니 왜 황실이 최고 등급 가문이 아닌 건데? 하고 따지고 들면서 억지를 부려야만 최고 가문 자리로 끼워넣어 줄 정도.훗날 주원장은 직접 가시몽둥이를 휘두르며 신하들을 계도합니다.

문벌귀족이 가장 세가 강했던 시기는 위진남북조시대이며 과거제가 시행된 수나라, 당나라 시대에도 위세가 계속되었으나, 당 말기 혼란으로 중앙 귀족들의 기반이 날아가면서 일단은 쇠퇴하게 된다. 다만 쇠퇴하면서도 과거제도에 적응한 집안은 옛 권리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북송시대까지도 관료가문으로 살아남아 귀족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이런 집안들은 관료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주류를 형성하였다. 북송사마광서진의 황족이었던 하내 사마씨이고, 명나라 때의 왕양명은 태원 왕씨이다.

2 주요 문벌귀족

위진남북조시대가 매우 혼란스러워서 가격(家格)이 일정하지 않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느라 연고지가 바뀌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시대부터 당나라까지 모든 귀족을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있고 아래와 같다.

2.1 군성(郡姓)

영가의 난이 일어나고도 강북에 남아서 오랑캐의 지배를 받은 귀족이다. 군성이라 부르는 까닭은 자기가 사는 군에서 확실하게 살기 때문이다. 북위부터 강북 귀족의 핵심이다. 산동귀족이나 하북귀족이 이들이다. 가장 순수한 한족 문화 전통을 대표한다고 자처하였다. 북위에서 귀족의 가격을 정하면서 6등급을 매겼는데 3대 이상 삼공을 지냈으면 고량(膏梁), 상서령이나 상서복야를 지냈으면 화유(華腴), 상서나 영군이나 호군 이상의 벼슬을 한 집안을 갑성(甲姓), 구경이나 방백을 지냈으면 을성(乙姓), 산기상시나 태중대부를 맡았으면 병성(丙姓), 이부낭관을 맡았으면 정성(丁姓)이라고 하였다. 가장 격이 높은 집안은 당나라를 기준으로 농서이씨(隴西李氏) 돈황선공파(敦煌宣公派)[1], 태원왕씨(太原王氏) 장군공파(將軍公派)[2], 형양정씨(滎陽鄭氏) 첨사공파(詹事公派)[3], 범양로씨(范陽盧氏) 고안혜후파(固安惠侯派)[4]·별가공파(別駕公派)[5]·사군파(使君派)[6], 청하최씨(淸河崔氏) 부군파(府君派)[7]·탁지랑공파(度支郞公派)[8], 박릉최씨(博陵崔氏) 합하파(閤下派)[9], 조군리씨(趙郡李氏) 시어사공파(侍御史公派)[10]이며 이들은 칠성십가(七姓十家)라 하여 조정에서 지정한 최고 귀족이다. 이들은 자기들끼리만 결혼했고 외부 귀족가문과 결혼할 때는 막대한 '빙재(聘財)' 를 받았다고 한다. 이들의 명망은 최고 수준이고 배타성도 높아서 흠좀무하게도 당실도 이들보다 격이 낮은 벼락출세자 가문으로 여겼다.[11] 이들은 5대 10국 시절까지도 사회적으로 우대를 받았으나, 후손들의 유학 실력이 형편없음이 드러나면서 그 후광도 빛이 바랐고, 과거제가 확대 실시되면서 서서히 묻혀갔다.

2.2 노성(虜姓)

낙양이 있는 하남군에 본관을 두었다. 위의 군성과 달리 4등급이 매겨졌는데 북위의 건국 공신 문중인 팔씨(八氏)[12]가 1등급, 북위 황실과 뿌리가 같은 십주(十胄)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하남원씨(河南源氏)[13]</ref>가 2등급, 세력과 존비를 따져서 3등급에 36족, 4등급에 92성을 매겼다. 이주영이 하음의 변을 일으켜 이들을 살육했지만 여기서 살아남은 귀족과 무천진 군벌이 연합하여 관롱집단을 이루었다. 우문태에 의한 서위 건국부터 대두되었다. 특히 우문태와 동향 가문인 무천진 출신 가문들이 8주국 12대장군을 독점하면서 관롱귀족의 핵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서위, 북주, 수, 당의 정치적 중추 세력이였고, 특히 군권을 장악하여 무력과 정치력을 한데 아울렀지만 측천무후의 등장으로 인해 약화되었다. 배타성도 낮은 편이여서 한족 국가가 아닌 국가의 왕족, 귀족과도 통혼하고 문화를 받아들이는 호한융합적 성격을 띄었다. 황실, 당 황실도 이쪽에 속한다.[14][15]

2.3 교성(僑姓)

강남 지역의 귀족으로 오호십육국시대에 남쪽으로 내려간 피란민에서 시작된 집단. 교성이란 이름도 원래 살던 군에서 떠난 귀족이라서 붙은 거다. 그만큼 배타성은 가장 강했다. 원래는 산동사성집단이 강남귀족안에 있었으며, 남조의 실권을 움켜쥐고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력했으나, 양나라 말기의 후경의 난을 겪고, 통일이 수나라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대타격을 연이어 받은 탓에 정치군사적 힘은 약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개발된 강남의 부를 독점하였기에 가장 부유한 귀족 집단이였다.

2.4 오성(吳姓)

강남의 토착 귀족이지만 진나라가 다시 서면서 강남에 유입된 교성에게 밀렸다. 다만 이들도 강남의 부를 독점하여서 부유하기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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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파조는 보(寶)다.
  2. 파조(派祖)는 경(琼)이다.
  3. 파조는 온(溫)이다.
  4. 파조는 도세(度世)다.
  5. 파조는 보(輔)다.
  6. 파조는 부(溥)다. 사군은 자사 및 사절에게 쓰는 경칭. 노부는 유주자사를 지냈다.
  7. 파조는 종백(宗伯)이다. 부군은 태수에게 쓰는 경칭. 최종백은 청하태수로 추증되었다.
  8. 파조는 원손(元孫)이다.
  9. 파조는 의(懿)다. 합하는 삼공에게 쓰는 경칭. 최의는 태위를 지냈다.
  10. 파조는 해(楷)다.
  11. 당나라 황실은 스스로 농서이씨라 일컬었는데도 보다시피 농서이씨가 다른 귀족의 위에 서기는커녕 오히려 씨족지에서 농서이씨는 세 번째로 나오기까지 하였다.
  12. 훈신팔성(勳臣八姓)이라고 하며 보륙고(步六孤)→하남륙씨(河南六氏), 하뢰(賀賴)→하남하씨(河南賀氏), 독고(獨孤)→하남류씨(河南劉氏), 하루(賀樓)→하남루씨(河南樓氏), 홀뉴우(忽忸于)→하남우씨(河南于氏), 구목릉(丘穆陵)→하남목씨(河南穆氏), 흘해(紇奚)→하남혜씨(河南嵇氏), 울지(尉遲)→하남울씨(河南尉氏)가 속한다.
  13. 성이 일본에서 유명한 그 성인데 우연이 아니다. 북위가 성씨를 탁발에서 원(元)으로 바꾸면서 소리가 같은 원(源)을 성으로 삼았는데 차아천황이 이 일을 본떠서 신적강하를 해도 뿌리가 같음을 나타내려고 같은 성을 내려준 거다.
  14. 수나라는 홍농양씨를, 당나라는 농서이씨를 자칭하였지만 진인각(陳寅恪)이 거짓임을 밝혔다.
  15. 위의 군성 6등급과 노성 4등급은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이 1차출처이고 유수원의 우서 제9권이형상의 원파기 병서가 2차출처이다. 칠성십가의 출처는 [1], 훈신팔성의 출처는 [2], 제실십성의 출처는 하남원씨 빼고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