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족혁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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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30년대에 존재한 중국 내 독립운동 단체이자 민족유일당 운동의 결과물.

처음 시작은 1926년으로, 김원봉김성숙이 주축이 되어 사회주의계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된 단체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임정에 속해 있던 정치세력이 각자 떨어져 나왔지만, 일제의 탄압이 가속화되자[1],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은 새로운 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안창호, 이동녕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전선통일동맹 이라는 단체를 결성했고 동맹에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이 '단체'와 '독립군'을 망라하여 '정치정당'을 결성 이 정치정당들이 모여 소위 민족단일당을 창설하려고 하였다. 김구는 참가하지 않았는데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유지를 원했기 때문이다.

1935년 7월 난징에서 결성된 민족혁명당에는 김원봉의 의열단신익희 등의 신한독립당, 김규식등의 미주한인독립당, 조소앙 등의 한국독립당, 최동오 등의 조선혁명당 등이 모여 통합, 결성했는데 민족주의 성향의 신익희부터 무정부주의 성향의 김원봉, 김성숙. 공산주의 성향의 최창익 등 인물들까지 두루 망라되어 있었다. 이들은 기관지를 발행하고 상하이로 인력을 파견해 의용대를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당의 강령은 사회주의적인 성향이 있었는데 독립이후 토지와 중요산업의 국유화와 더불어 인민이 무장할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기도 했다.[2]

그러나 애시당초 성향이 다른 인사들이 모인 탓에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이라는 취지와는 달리 내부에서는 치열한 주도권 경쟁이 벌어졌는데 특히 고려공산당 출신의 상해파와 시베리아파, 중국공산당 출신, 의열단 내 민족주의파들이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의 성향을 부차적 문제로 만드는 가장 큰 논제는 민족단일당을 결성하느냐 마느냐의 여부였는데 민족혁명당으로의 단일당 형성은 기존의 단체들의 해체가 전제되기 때문으로, 당초에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던 백범 김구가 민족단일당을 만들자는데 별 관심이 없었던 까닭이 그것이다. 때문에 두달만에 조소앙이 탈퇴해 항저우에서 한국독립당을 재건해버렸고 애초에 참여의사가 없었던 백범 김구 선생은 상해 임정의 집권 여당으로 한국국민당을 만들었다. 백범 김구는 민족혁명당 결성운동에 부정적이었지만 반대하진 않았고, 단일당 결성을 논하는 상태에서 자신이 정당을 결성하면 단일당 운동에 재 뿌리고 난 따로 놀겠다고 선언하는 형태가 되기에 조소앙의 이탈이 확실시 된 뒤, 그러니까 자신이 정당을 세워도 이제 민족단일당 운동에 누가 되지 않을 시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35년, 민족혁명당은 결성이 이뤄지긴 하는데 주석엔 김규식, 총서기엔 김원봉, 총사령관엔 지청천이 협력하였다.

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2차 국공합작이 이뤄지자 임시정부의 김구의 한국국민당과 조소앙의 한국독립당은 난징 근처의 우익계열 독립운동세력들을 끌어모으고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동년, "민족혁명당"은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하였고 지청천은 조선민족혁명당을 이탈해 "조선혁명당"을 창설, 김구에 합류하였다. 한편,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은 38년, 난징, 한커우, 무창 근처의 좌익계열 독립운동세력을 연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는데, 이엔 김규광의 "조선민족해방자동맹", 최창익의 "조선청년전위동맹", 유자명의 "조선혁명자연맹"이 동참하였고 김원봉이 이끄는 군사세력이던 조선의용대가 중핵이 되었다.

1939년, 김구와 김원봉은 연합전선을 펼쳐보려 "전국연합진선협회"를 꾸려 논의하였으나 역시 35년과 같이 단일당을 형성하느냐 마느냐의 여부에 대한 견해차를 놓고 두 사람의 연합은 결국 결렬되었다. 하지만 김원봉과 김구는 끝내는 같은 배를 타게 되는데 1942년 이후 "조선민족혁명당"의 후신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은 김원봉이 조선의용대 본대[3]를 데리고 42년 중경임정에 합류할 당시 그를 따라 함께 임정에 합류하였다.

  1. 사실상 만주에서는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의 탄압으로 독립군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2. 이것은 프랑스 헌법의 저항권에서 영향을 받은 것일지도?
  3. 김원봉이 이끌고 있어서 본대라고 하기는 하는데, 절대 다수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라는 이름으로 화북으로 떠나서 중국공산당 산하의 팔로군에 합류하였다. 그래서 대략 300여명의 소수만 남은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합류한 김원봉은 임정내에서 거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자세한 내용은 조선의용대, 김원봉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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