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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한민국장(重章) 수여자 | |||
강우규 | 김구 | 김규식 | 김좌진 |
김창숙 | 민영환 | 서재필 | 손병희 |
신익희 | 쑨원 | 쑹메이링 | 안중근 |
안창호 | 여운형 | 오동진 | 윤봉길 |
이강년 | 이승만 | 이승훈 | 이시영 |
이준 | 임병직 | 장제스 | 조만식 |
조병세 | 조소앙 | 천궈푸 | 천치메이 |
최익현 | 한용운 | 허위 | 박정희 |
역대 대한민국 국회의장 | ||||||
초대 1기 이승만 | ← | 초대 2기 ~ 2대 2기 신익희 | → | 3대 1기~4대 1기 이기붕 |
신익희(申翼熙, 1894년 6월 9일 ~ 1956년 5월 5일)
"나라는 완전 독립되어야 하고(國家須完全獨立;국가수완전독립).민족은 철저 해방되어야 하며(民族須澈底解放;민족수철저해방).
사회는 필히 평등하여야 한다(社會必須平等;사회필수평등)." [1]
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가·독립운동가.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여구(汝耉)이며 호는 해공(海公)이다.
2 유년시절
경기도 광주군 출생.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 탄금대 전투를 이끈 신립의 직계 후손이다. (평산 신씨) 조선시대 때 판서를 지낸 신단과 그의 넷째 부인인 정경랑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단의 여섯 아들 중 막내였고, 동복 형제가 2명 있었다.
어렸을 때는 한문에 능통했으나[2] 1908년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했다. 이때부터 우파적인 성격을 띄어 "영국 젠틀맨"이란 조롱을 당했다.
3 일제강점기
1913년 일본 유학을 가서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들어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벌며 고학을 했다.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를 조직하고 총무·평의회장·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하여 학생운동을 하였다. 1915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 고향에 동명강습소를 열었으며, 서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현 고려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3.1 운동에서 독립선언서 작성에 관여했으며,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후 내무차장·외무차장 등을 지냈다. 이때 백의사의 단장 염동진(본명은 염응택)이 남경중앙군관학교에서 교관들을 까는 폭동에 가담했다가 쫓기자 그 를 숨겨주었던 것이 백의사와의 인연이 되었다.[3] 그외에도 중국 국민당의 육군 장성으로 복무했다가 한국 광복군에 뛰어든다. 임정과 국민당의 관계를 보면 알지만 이는 당시엔 흔한 일이었다.
4 해방 이후
광복과 더불어 귀국했는데, 처음엔 한민당과 송진우 등을 친일파라며 강경하게 비판했지만, 해를 넘기면서 김구 등 임시정부 계통과는 노선을 달리하여 정치공작대·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신탁통치 반대에 앞장서고 단독정부를 주장하며 이승만과 행보를 같이했다. 백의사를 이끌었고 심지어 김일성을 죽이기 위해 백의사를 북에 보냈다고 한다. [4] [5] 이런걸 보아 해방정국에서 세력을 모으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는듯.[6]
1946년 이승만파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초대학장, 대한체육회 회장 등을 겸했다. 그 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일종의 국회의원격) 대의원에 피선, 1947년 의장이 되었다. 1948년 7월에는 초대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최연장자라는 이유로 선출된 국회의장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자 국회의장직을 계승했다.
대한국민당을 창당할 때 앞장섰으나 독선적인 이승만과 부딪치면서 1949년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김성수, 조병옥, 장면, 윤보선, 박순천과 함께 야권을 이끌었다. 다시 1950년 다시 국회의장에 선출되어 부의장 장택수, 조봉암과 함께 이승만을 불신임까지 밀고 나갔으나 (당시 대선은 국회 간선제) 6.25 전쟁이 터지면서 이승만은 위기를 모면했고 발췌 개헌을 통과시킨다.
사사오입 개헌이 터지자 호헌동지회를 구성했고 이를 바탕으로 민주당(1955년)을 창당했다.[7]
5 대통령 후보 출마와 사망
이후 민주당 구파의 수장으로 장면을 이기고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30만이 운집한 한강 백사장 연설 등에서 선전했지만, 5월 5일 어린이날 선거를 열흘 남기고 전주로 가기 위해 전라선 열차를 타던 중 호남선 구간인 함열역 부근에서 뇌일혈로 졸도했고 이리역에 급히 내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열차 안에서 이미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8]
사실 60을 갓 넘긴 상황이었고 전국순회유세로 건강이 우려되는 시점이라 아주 놀랄 일은 아니었다. 조병옥 등도 그의 수행을 자처할 정도였다. 신익희는 선조들이 조선시대에 60세 이상 장수한 점을 자랑하며 자신의 건강에는 이상이 없다고 강조했지만 그 역시 63살에 죽었다. 죽기 이틀전인 5월 3일 한강백사장 연설에서 너무 흥분해서 효자동 자택에서도 흥분이 가시질 않아 정말 위험했다고 한다.
넥타이를 매다 졸도한 뒤, 깨어나 홍차를 마시고 종손이자 비서인 신창현에게 뒤지(휴지)를 달라고 말한 것이 그의 마지막 한마디가 되었다. 이승만의 독살설도 있지만 정황을 보면 음모론으로 봐야할 듯 하다.
6 사후
그가 죽은 직후 비 내리는 호남선(남행열차는 아니다)이란 노래가 유명세를 탔다. 종로6가 효자동의 자택에 묻혔다.
그의 사후 진보당의 조봉암은 단일화를 주장했으나 민주당은 거부했고, 이에 5월 15일 선거 당일 대량의 무효표가 "추모표" 격으로 던져졌다. 그 숫자가 무려 185만표에 달해 단일화(조봉암 210만)를 했다면 부정선거의 의혹에도 불구하고 이승만(500만)을 위협할 정도였다고.
그의 사후 지역구인 경기도 광주군에서 재보궐선거가 치러졌는데 아들 신하균이 당선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비서였던 유치송은 전두환 정권 때 관제야당인 민주한국당을 창당하여 총재가 되었다.
- ↑ 여기서 수(須)는 '반드시'의 의미이다. 흔히 알려진 해석 가운데 '자유'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해석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 ↑ 심지어는 삼국지연의를 잘 못읽는 청나라 사람에게 대신 삼국지를 술술 읽어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은 김구에게 불만이 많았다. 국민당에게도 그렇고. 여담으로 김구는 백의사를 만주에 파견하고, 만주를 폭격할 계획까지 세웠었다. 흠좀무.
- ↑ 백의사와 정치공작대는 1946년 3월 1일 평양의 3.1절 기념식에서 김일성에게 수류탄을 던진다. 그러나 이 수류탄은 김일성 옆에 있던 소련군 장교 노비첸코가 주워서 던지려다가 노비첸코의 손에서 폭발한다. 그는 한쪽 손이 잘려나가고 한쪽 눈이 실명되지만 김일성은 무사했다.
깝 - ↑ 심지어 미군정을 물러나게 하기 위할 쿠데타에 가까운 중경 임시정부 추대운동을 주동했던 적도 있었다고. 하지 중장은 그에게 사살 위협만을 하고 풀어주었다. #
- ↑ 사실 적극적이다란 말로도 부족한 과격파다. 정치공작대나 이후 지청천의 대동청년단과 합세하여 대한국민당을 결성하고, 임정 내무부장에 있을때 경위대라는 사설 친위대를 만들려 한것을 보면 상당히 파시스트적인 면모가 보인다. 아니, 사실 후대에는 "독재에 대항한 야당 지도자"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로 1950년대 이후의 야당 지도자나 핵심인물들을 보면 알게 모르게 다들 극우 단체나 파시즘적 행보와 연관이 있다. 이유는 대부분의 중도파가 몰락하고, 대부분의 좌파가 죽거나 월북한 다음 남은 사람들이 이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 이때 조봉암을 참여시키는데 미지근한 태도를 취했다.
- ↑ 다음 선거(1960년)에 출마했던 민주당 구파의 리더였던 조병옥도 선거 중 급사했다.
이승만이 기가 세서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