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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열린 회의. 국내외 독립운동단체 71개, 지역 23개 대표 125명이 참석해 공론과 공결을 통해 독립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관과 운동노선을 세울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처음 회의가 개최된 것은 1923년 1월 3일이었다.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1] 민국로(民國路)의 미국인 예배당이 첫 개최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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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방해와 교통사정 등으로 개회 당일 참석자는 62명이었다. 국민대표회의의 대표는 자격심사를 거쳐 뽑았는데, 대표로 확정된 인원은 국내·상해·만주 일대·북경·간도 일대·노령·미주 등지의 대표 124명이었다.
그 후 1923년 6월 7일까지 총 74차례의 회의를 개최하였다. 창조파와 개조파 그리고 현상유지파의 대립이 있었으며, 마지막에는 창조파가 주도권을 잡고 새로운 정부기관의 건설을 결의하기까지 하였으나, 김구, 조소앙 같은 현상유지파의 반대와 자금난으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2 배경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시기부터 다소간의 갈등이 있었다.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수립된 임시정부는 연해주에 위치한 대한국민의회와 서울에 위치한 한성정부, 상하이에 위치한 상하이 임시정부로 그 체계가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정부에 소속된 사람들 중 겹치는 사람들이 있었다.[2] 따라서 독립운동의 효율성을 위해 이 정부들을 하나로 합칠 필요가 있었는데, 어디에 정부를 만들 것이냐를 놓고 많은 말이 오갔다.
한성정부는 13도 대표가 집결해 구성된 정부였지만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위협을 받을 우려가 있어 처음에는 무장투쟁을 하기에 용이한 연해주에 정부를 만들려 했다.[3] 그러나 연해주도 한반도와 가까워 역시 일제의 위협이 있다고 판단, 일본으로부터 충분히 멀리 떨어진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꾸리게 되었다. 당시 상하이는 조계지가 설치되어 있어[4] 일본이 간섭하기에 쉽지 않았고 각국 외교관들을 통해 외교활동을 하기도 쉬웠다.
하지만 상하이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은 이렇다 할 만한 성과가 없었다. 그러던 중 당시 임시정부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것이 논란이 되었다.[5] 또한 한성정부 계승 문제, 연통제, 교통국의 발각으로 인한 어려움,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이 겹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부로서의 기능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김창숙, 박은식, 윤해, 남형우 등의 제안으로 열린 것이 바로 국민대표회의였다.
3 경과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크게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신채호, 남형우, 윤해, 문창범, 신숙을 위시로 한 창조파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없애고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 본격적인 무장투쟁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였으며, 안창호, 여운형, 이동휘를 위시로 한 개조파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근거로 임시정부를 계속 유지할 것을 주장했다.[6]
1923년 3월 21일 국민대표회의 의장이 개조안을 본회의에 상정하려 하자 창조파가 이에 반대하여 본회의에서 탈퇴하는 소동이 있었고, 다시 4월 11일부터 다시 정식회의가 개회되었으나 '개조'와 '창조'를 둘러싼 시국문제에 있어서는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1923년 5월 15일 서로 군정서군과 한족회의 대표소환 지시로, 당시 만주대표로 활동하던 개조파의 김동삼·배천택·김형식·이진산 등이 국민대표회의에서 탈퇴했고, 국민대표회의는 이제 창조파 중심으로 꾸려지게 되었다.
이후 윤해를 의장으로 하여 6월 3일 창조파만으로 진행된 회의에서는 새로운 기관을 세워 국호를 '한(韓)'으로 정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창조파는 6월 7일 새로운 헌법 제정과 함께 국민위원회를 조직하고 국민대표회의 폐회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개조파 위원 57명이 반대성명을 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이에 반대하여, 국민대표회의의 결정은 사실상 구속력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임정 내무총장인 김구는 내무령 제1호로서 국민대표회의의 해산을 명령했다.
이에 일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중심의 창조파는 노령으로 돌아가 레닌 정부의 승인을 얻어 새 정부를 수립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한'정부를 따라갔던 창조파 인사들은 1924년 2월말을 전후하여 중국 지역의 각 단체에 복귀해 개별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물론 창조파 및 개조파의 대다수가 임시정부를 떠나면서 임시정부 역시 사실상 초창기의 대표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임정은 오랜 침체기에 빠지고 말았다.- ↑ 조계(租界): 19세기 후반에 영국, 미국, 일본 등 8개국이 중국을 침략하는 근거지로 삼았던, 개항 도시의 외국인 거주지. 외국이 행정권과 경찰권을 행사하였으며, 한때는 28개소에 이르렀으나 제이 차 세계 대전 이후에 폐지되었다.
- ↑ 이승만은 한성정부에서 집정관 총재,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를 하고 있었다.
- ↑ 주로 무장독립론을 주장했던 사람들에 의해 주장되었다.
- ↑ 임시정부는 프랑스 조계지에 설치되었다.
- ↑ 신채호는 이를 두고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았다."라는 말을 하였다.
- ↑ 이동휘는 그 전까지 무장독립론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국민대표회의에서는 개조파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