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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안창호 |
아호 | 도산(島山) |
출생년월일 | 1878년 11월 9일 |
사망년월일 | 1938년 3월 10일 |
출생지 | 조선 평안남도 강서군 |
사망지 | 일본제국령 조선 경기도 경성부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 |
활동분야 | 정치, 사회, 교육 |
업적 | 독립운동, 민족계몽운동,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 |
가족 | 아버지 안흥국, 어머니 제안 황씨, 부인 이혜련, 장남 안필립, 차남 안필선, 장녀 안수산, 차녀 안수라, 삼남 안필영[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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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한민국장(重章) 수여자 | |||
강우규 | 김구 | 김규식 | 김좌진 |
김창숙 | 민영환 | 서재필 | 손병희 |
신익희 | 쑨원 | 쑹메이링 | 안중근 |
안창호 | 여운형 | 오동진 | 윤봉길 |
이강년 | 이승만 | 이승훈 | 이시영 |
이준 | 임병직 | 장제스 | 조만식 |
조병세 | 조소앙 | 천궈푸 | 천치메이 |
최익현 | 한용운 | 허위 | 박정희 |
농담으로라도 거짓을 말아라.꿈에라도 성실(誠實)을 잃었거든 통회(痛悔)하라.
낙망(落望)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그대는 매일 5분씩이라도 나라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역사에 다소 관용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요 무책임이니,관용하는 자가 잘못하는 자보다 더 죄다.
목차
1 소개
한평생 정직과 성실로써 살아간 당대 최고의 신사.
민족과 청년을 진실로 사랑하여 그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교육자.
대한민국 비폭력 자강, 교육계 독립운동가의 독보적 인물이라고 불리는 독립의 원훈.[2]
안창호(安昌浩, 1878.11.9~1938.3.10)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로 호는 도산(島山) [3] 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종교는 개신교 중 장로교다 [4]
2 생애
평안남도 강서군 봉상도에서 농부인 안흥국(安興國)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안씨 가문의 선산이 있는 대동군 남관면 노남리를 속칭 노내미라 했고, 당시 사람들은 안창호의 집을 '노내미집' 이라고 불렀으며, 도산을 "노내미집 셋째"라고 불렀다. 선대는 대대로 평양 동촌(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에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로 옮겨왔다.
어려서부터 미소년에 고운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고 하며 옛날 이야기책을 소리내어 읽기를 좋아해서 동네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는데, 동네 노인들이 저녁이면 사랑방에 모여 "노내미집 셋째"를 불러다가 옛날 이야기책을 읽게 했다고 한다.
평안남도 대동군 대보면 용인리에서 출생한 봉산 김씨인 김희순(金羲舜)이 세운 한학당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후에 도산선생은 김희순 훈장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김희순의 제자 중에서 4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를 직접 세웠다고 한다.[5]
1895년 미국 북장로회 계통의 구세학당(救世學堂)에 들어가 처음 신학문을 접했고, 1897년 독립협회에 들어가 민족운동에 눈떴다. 그러나 이듬해 독립협회가 해산하자 곧바로 낙향하여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고 교육자로 변신했다.
3년 후인 1902년 그는 교육활동을 접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리버사이드에서 각종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하는 고학생활을 하면서도 1904년 의친왕, 정재관 등과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였다. 공립협회는 안창호가 귀국할 무렵인 1907년에는 지방회 일곱 개를 가진 북미 최대의 한인 자치단체로 발전한다. [6] 1907년 그는 불현듯 귀국, "대한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하는 애국계몽 운동을 펼쳤다. 신민회, 대성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서울과 평양 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설을 했다. 그의 뛰어난 웅변은 많은 청년들에게 감동을 주어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1908년 안창호는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였고, 1909년 김좌진, 이갑 등과 서북학회를 창립했다.
하지만 일제 탄압이 심해져서 105인 사건이 일어나 서북지역 항일 인사들이 대거 투옥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안창호는 준비론에 입각하여 실력양성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시영, 이동휘, 김좌진과 같은 급진파는 만주로 이동하여 무장항쟁을 준비하게 되었다.
안창호는 실력양성운동을 원활하게 전개하기 위해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11년 다시 도미, 1919년까지 미국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1913년 5월 13일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운동단체인 흥사단을 설립했다. 기본정신은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이었으며 단체의 상징은 기러기였다. 이후 흥사단은 3.1운동, 수양동우회 사건 등에 직, 간접적으로 관여해 독립운동에 기여했으며, 현재까지 이어져 서울 동숭동을 거점으로 활동중이다.
이후 박용만, 정순만, 이승만과 함께 미국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도산은 리버사이드에서 오렌지 따는 일을 계속 하다가 3.1운동으로 임시정부가 설립되려하자 모은 성금을 가지고 상해로 떠났다. 그리고 1919년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임명되었다.
2.1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2.1.1 실력양성론
그는 기본적으로 실력양성론을 견지하였다. 이 때문에 임시정부에 있었던 이동휘와 같은 급진적인 무장투쟁파와 갈등했고, 미국에서 같이 활동한 적 있는 외교론의 이승만과도 갈등했다. 그가 생각하는 바는 대략 이러하다.
우리 민족의 불행의 책임을 자기 이외에 돌리려고 하니 대관절 당신은 왜 못하고 남만 책망하려고 하시오? 우리나라가 독립이 못되는것이 다 나때문이로구나 하고 가슴을 두드리고 아프게 뉘우칠 생각은 왜 못하고 어찌하여 그 놈이 죽일 놈이요, 저 놈이 죽일 놈이요라고만 하고 가만 앉아계시오? 내가 죽일 놈이라고 왜들 깨닫지 못하시오? 우리 가운데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요.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될 공부를 아니하는 것이오?
여운형은 이러한 안창호의 뜻을 따랐는데, 여운형이 일본의 초청을 받고 일본행을 결심하자 여운형을 변호하면서 이동휘와 갈등하였다. 이동휘는 일본과 타협하는 일이라고 극구 반대했으나 안창호는 여운형을 믿고 일본행을 권유하였고 노잣돈까지 주었다고 한다. 강준식의 《적과 동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적을 알아야하니까니 가서 니야기를 들어보라우. 이거 얼마 되딘 않지만.""허나 임정 안팎에서 야단들입니다."
"뭐, 괜티않아. 나라 팔아먹는다구 야단들이디만 팔아먹을 나라가 이시야 팔아먹디? 하하하."[7]
《윤치호 일기》에 1933년 10월 4일자 내용에 따르면, 안창호는 윤치호에게 “일본인들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파는 500년간의 적이기에 먼저 기호파를 박멸하고 독립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여운형, 신흥우 등도 독립지사들과 함께 윤치호를 찾아가 서북파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기호파 비밀결사를 제안하였다고 한다. 윤치호는 이를 자신의 일기에 기록으로 남겼고, 윤치호는 안창호와 신흥우, 여운형 등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지역감정을 놓고, “지역감정 하나로만 봐도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
그런데, 이 '윤치호 일기' 내용에는 오류투성인데, 문제는 안창호가 1932년에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돼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1935년에 풀려났다는 것이다. 이게 과연 언제 그런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당시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 [8] 사장이었고, 여기에 엉뚱하게 신흥우가 나온것도 상황처리 앞뒤가 맞지않다. 아무래도 윤치호가 지어낸 이야기인가?! 아니면, 지난일에 회상하면서 적은건가?(그런데, 이건 선후맥락을 보면 앞뒤가 더 맞지않는다.) (신흥우는 193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나름 독립운동에 커다란 활동했던 인물로 주로 미주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신흥우는 이 시기 윤치호와 대립이 심했다. 뒤에 신흥우는 1930년대 중후반 무렵부터 친일파로 변절하게 되지만... [9]
그리고 여운형은 일본으로 건너가 회유에 굽히지 않고 도쿄 제국호텔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여 일본 정계를 술렁이게 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둔다.
1930년 상해에서 임정 여당인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2.1.2 VS 이승만
여운형이 일본에서 돌아온 다음 해에, 임정 초대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이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미국이 조선을 위임통치해 달라고 청원한 사실이 알려지자 신채호가 주동이 된 이승만 반대운동이 임정 안팎에서 격렬히 진행되었고 안창호 또한 이승만 반대편에 섰다.
이 때문에 미국 내에서 동지회 [10] 를 이끌고 있던 이승만은 대한인 국민회를 이끌고 있던 안창호와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어 임정 내에도 이승만계와 안창호계가 생겨나면서 이 대립은 각 인맥을타고 격렬한 암투로 발전하게 되었다. [11] 안창호와 치열하게 싸운 이승만은 안창호편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적대하였는데, 상해 임정 시절에 자신의 비서가 여운형과 사이좋게 지내자 "안창호 똘마니와 놀러다니지 말라"고 혼냈으며, 서북지역 출신을 폄하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안창호가 미국으로 건너가려하자 이승만은 미국쪽 고위층에게 "안창호는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서한을 보내어 미국에 입국하지 못하게 막기도 하였다고 한다. 물론, 안창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보수적인 성향의 인물로 절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1919년에는 이승만에게 임시정부에도 없는 직함인 대통령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고, 이는 헌법위반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말라고 전보를 띄웠으나 도리어 이승만에게 "떠들지 마시오"라는 답장만 받게 된다.
당시 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19. 8. 25. 상하이에서】구미위원부 이승만 각하
“초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이고, 한성정부는 집정관 총재 제도며,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지금은 각하가 집정관 총재 직명을 가지고 정부를 대표하실 것이요,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사를 하시면 헌법 위반이며 정부를 통일하려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마시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안창호
【답장】<1919. 8. 26. 워싱턴에서>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창호 씨
“우리가 정부 승인을 얻으려고 전력하는데, 내가 대통령 명의로 각국에 국서를 보냈고 대통령 명의로 한국 사정을 발표한 까닭에, 지금 대통령 명칭을 변경하지 못하겠소.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한테 돌아갈 것이니, 떠들지 마시오.”
워싱턴 이승만
2.2 국내 활동
1932년에 체포되어 [12] 국내에 압송, 5년 간 수감되었다가 출옥하였고, 고향에서 청년들을 가르치는 역할을 하였다.
1935년의 안창호. 왼쪽부터 여운형, 안창호, 조만식.
그러나 1937년 6월 28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또 다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 해 12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건강 악화로 출소 후 경성제국대학교 부속 병원에 입원했으나, 59세의 일기로 1938년 3월 10일 간경화로 별세하였다. 위인전에서 보통 자주나오는 그의 유언은 "목인[15]아,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
2.3 사후
별세한 직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다가 1973년 서울특별시에 도산공원이 조성되면서 부인 이혜련과 도산공원에 합장되었다.
3 그의 영향
이러한 안창호Vs.이승만은 광복 이후에까지 남한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비록 안창호는 해방을 미처 못보고 별세했으나 안창호와 가깝던 여운형과 수양동우회 소속이었던 최능진은 이승만의 정적이 되어 그를 견제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여운형은 암살을 당하고 최능진은 인민군에 협력했다는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지만.
4 평가
무장투쟁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안창호를 답답하다고 까지만...[16] 그래도 남한 내에서는 안창호의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민족 실력양성"이라는 노선이 지금까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심지어 그가 설립한 흥사단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으며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단 이광수가 실력양성론을 민족개조론이라는 병크로 매도한 점에서 실력양성론이 까이는 감도 있다. 하지만 안창호는 그런 이광수의 행보를 당연히 좋지 않게 보았고, 감옥에서 그가 넣어준 사식을 거절하기까지 했다. [17] 그리고, 안창호는 '실력양성론'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독립국가' 라는 전제하에 분명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직접 몸소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결코 이광수같이 '총독부에 순응하는 자치론' 을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것을 염두에 두자. 북한을 비롯한 일부 민족주의 좌파 진영에서는 안창호도 자치론자였다며 까지만, 일단 이광수는 자치론 이상은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노선이었고, 안창호는 언젠가 미래에는 독립해야 한다는 노선이었다. 아마도 안창호가 옥고를 겪지 않고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이에 대한 명확한 평가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5 기타
- 안창호의 연설은 매우 뛰어나서 젊었을 적 독립협회의 관서지부를 조직하기 위해 힘쓸무렵 평양 쾌재정[19]에서 교육진흥을 주제로 하여 '대국민계몽연설'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이 연설에 크게 감명받고 독립 운동에 투신한 사람이 많았다. 그중 한명이 바로 오산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한 남강 이승훈이다. 조만식과 여운형도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아 독립운동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승훈, 조만식, 여운형 모두가 말빨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사람들인데 이들을 말빨로 꼬셔버린 것이다.
- 나중에 여운형에게 감명받은 이범석이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 운동에 본격 투신하게 되니...
- 호인 도산은 일본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가던 중 하와이를 보고 지은 것이다. 그래서 섬 도에 뫼 산 해서 도산. 그래서 미국 본토 근처에도 못갔는데 하와이 보고 벌써 미국에 압도당했다는 평도 존재한다.
- 위인전도 상당히 많은편이다. 하지만 샤프한 이미지와 전혀 다른 모습을 삽화로 넣은 위인전도 있어 충공깽.
- 안창호 선생이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책도 있다. # 책 제목이 굉장무쌍하다.
- 2000년대 후반에 안창호 선생이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어이없는 일이 언론을 타고 알려졌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국민 집계를 일본 호구조사를 기준으로 했는데, 안창호는 이걸 하지 않아서 집계가 안 되었고 결과적으로 훈장까지 받은 독립유공자면서도 대한민국 국민은 아닌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다는 것.
- 현재 공식적으로 작사가 불명으로 되어있는 애국가의 작사가가 안창호라는 주장이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안창호의 비서와 자녀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다만, 증언들만 있고 구체적 사료가 없어서 단언하기는 어렵다. 이미 1955년도에 정부에서 조직한 '애국가 작가 규명위원회'에서 조사한 적이 있으나, 규명불가로 결론을 내렸다. 이 문제는 그것이 알고 싶다 946회 '누가 썼는가? 애국가 작사 미스터리'(2014-07-12) 편에서 다뤘다. 허나 박정희 정권에서 이장한 점에서도 결론을 못 내린 점은 윤치호 가능성을.더 높혔다.
- 도산의 장녀인 안수산 여사는 1915년 LA 출생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 해군 소위로 입대하여 이후 포격술 장교(대위)로 복무하였다가 일본군 암호를 해독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했다. 전역 후에는 1959년 까지 계속 중앙참고부서 NSA의 책임자로 복무하였다. [20] LA 카운티 정부는 2015년 3월 10일을 안수산의 날로 선포하였다. 이후 6월 24일 자택에서 수면 중 별세하였다. 기사. 향년 100세.
- 8월 15일 박근혜 대통령
최순실 봇은 광복절 경축사를 하는 자리에서 건국절을 연거푸 언급하면서 건국절 제정을 바란다는 의중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새누리당은 이에 발맞추어 건국절 법제화를 추진하며 논란을 키웠다. 건국절 논란 참고. 새누리당에 건국절에 대해서 강의하는 이가 류석춘 연세대학교 교수(전 이승만연구원장)라는 작자인데, "안창호는 미국인" 상하이 임시정부는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는 망언을 터트린 전력이 있다. 관련기사 유유상종에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새누리당 핵심인사들의 계보가 해방과 6.25전쟁 후 멸공을 부르짖으며 독재권력에 빌붙어 영달을 도모한 반민족적 친일인사들로부터 시작하고 있으니 이런 짓들을 일삼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닐 것이다.
- 2016년 8월 20일 방송된 무한도전 LA 특집에서 날림관광으로 잡은 코스인 코리아타운 IC, 남가주대(USC) 한국학연구소, 우체국, 한인회관[21]에 다 그의 이름(Dosan Ahn Chang Ho)이 붙어있다. 또한 도산의 자녀 5인 중 2016년 현재 유일한 생존자인 만 90세(2016년 기준)의 막내아들 안필영 옹이 출연했는데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상하이로 갔고 그 곳에서 체포되어 구금생활 후 세상을 떠났기에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22]. 이 말이 사실이라면 부자 둘 다 서로 평생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것임으로써 안타까움을 더한다. 장녀 안수산 여사의 아들이자 도산의 손자인 필립 안 커디도 나왔다.[23]
- 안창호 선생의 묘소가 망우리에 있는 이유는 그곳이 흥사단 동지인 태허 유태규[24] 선생이 안장된 곳이라 같은 곳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을 남기셨기 때문이다. 비단 유태규 선생 뿐 아니라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신 수많은 순국선열들의 업적을 밝혀내어 잊지않고 기리는 것이 하늘아래 떳떳한 도리이건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어 후손된 입장에서 죄스러울 따름이다. 당장 보훈처같은 담당 기관이나 관계자들이 하는 짓거리들을 보면 한숨만 나올 뿐이다.
-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7년 대선 후보 시절에 '도산 안창호 씨를 존경한다.'는 말을 하여 많은 지탄을 받았다. '씨'라는 호칭은 보통 공식석상이나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글에서 쓰는 게 아닌 한 윗사람에게는 쓰면 큰 결례가 되는 말이며 대체로 동료나 아랫사람에게 쓴다.
5.1 단편적인 일화들
워낙 유명한 독립운동가인 만큼, 알려진 일화들도 많은 편이다.
아래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당했을 때, 경성 지방법원 검사의 심문에 답한 것이다.
검사(이하 검) : "너는 독립운동을 계속할 생각이냐?"안창호(이하 안) : "그렇다.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먹었고, 잠을 자는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잤다.
이것은 나의 몸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검 : "너는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안 : "대한의 독립은 반드시 된다고 믿는다."
검 : "무엇으로 그것을 믿느냐?"
안 : "대한 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요,
세계의 공의가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요,
하늘이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
검 : "너는 일본의 실력을 모르느냐?"
안 : "나는 일본의 실력을 잘 안다.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지닌 나라다.
나는 일본이 무력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가지기를 동양인의 명예를 위하여서 원한다.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이웃나라를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하는 것보다
우정 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복일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
안창호는 강서 대보산의 송태라는 곳에 집 한 채를 짓고 은거하면서 검문하는 일본 경찰들을 피해가며 그를 찾아오는 청년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는데, 평양에서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 교회와 숭실학교의 존폐문제가 벌어지자 평안남도 도지사 가마우치 시코사쿠는 안창호에게 한 경찰을 보내어 "교회와 학교 대표자들이 신사참배에 대해 의논하다가 안창호는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서는 반대 의견을 취하니, 당신이 음모를 꾸미거나 선동을 하지 않아도 당신이 평남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동이 되는 것이오. 그러니 당신이 평남을 떠나주기를 바라고 될 수 있으면 미국으로 가기를 바라오. 당신만 미국으로 갈 의향이 있다면 여행권은 내가 주선해주겠소." 라고 전했다. 그러자 안창호는 "이렇게 지사께 전하시오. 만약 안창호의 존재가 민심을 악화시킨다면 평남에 있거나 미국에 갔거나 마찬가지라고. 아마 감옥에 잡아 가두거나 죽이더라도 마찬가지라고. 2천만 한국인이 다 안창호와 같은 사람인데 일개 안창호를 송태에서 내쫓았다는 것이 불명예나 될 뿐이지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고."라며 그 일본 경찰을 돌려보냈다.
참고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 ↑ 안필립은 1978년에, 안필선은 2001년에, 안수산은 2015년, 그리고 2016년 6월 18일에 차녀 안수라가 타계함으로써 2016년 8월 현재 자식들 중 삼남이자 막내 안필영만이 생존해 미국에 살고 있다.
- ↑ 당대에 실력양성를 부르짖던 대표적 민족 지도자들의 말로가 어떠하였는지를 상기함, 또한 사회진화론 같은 제국주의적 논리에 기반한 우승열패 사상이 조선과 일본, 나아가 전세계를 잠식하고 있었던 당시의 세태를 고려함, 실력양성론을 끝까지 견지하면서도 피지배민족이었던 조선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의지를 최후까지 붙들고 있었단 건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 어찌 봄 무장, 폭력투쟁론을 외쳤던 측의 투쟁적 독립운동가들 이상의 정신적 꿋꿋함과 비타협적 강직성을 끝까지 고수했단 방증이라고 볼 수도 있다.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고락을 나누며 신념을 지키는 쪽과, 동지들이 모두 떠나버린 자리를 홀로 지키며 자신의 초심을 잃지 않는 것, 둘 중 정신적으로 보다 고될 쪽은, 역시 후자쪽일 터이다.
- ↑ 참고로 도산의 유래는 미국으로 건너간 뒤 주로 활동을 하던 하와이다.
- ↑ 구세학당을 세운 미국인 언더우드 선교사가 장로교였으며, 결혼식도 구세학당에 있던 미국인 밀러 목사 주례로 치룬 것을 감안하면 구세학당 입학 후 장로교도가 된듯 하다. 그러나 재림교에도 사랑과 믿음을 보여 주어 지덕체의 삼육 이념을 전수해 주었다.(스토리 카드)
- ↑ 평안남도대동군군민회가 발간한 '대동군지'라는 책에 나와있다. 김희순 훈장의 손녀가 을지로에 있는 고기집인 우래옥의 사장이라고...
지금은 돌아가셨겠지만 - ↑ 공립협회는 이후 1909년 국민회, 1910년 대한인국민회로 개편된다.
- ↑ 당연하지만 안창호는 서북 출신이기에 서북 방언을 사용했다고 한다.
반면 7,80년대 반공영화에서는 줄기차게 표준어를 썼다 - ↑ 현재의 중앙일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 ↑ 다만 1932년 10월 4일자 일기내용만 가지고 선후맥락없이 판단한할 경우 오류가 될 수 있는것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사실 안창호가 지역감정의 소유자라는 이야기를 윤치호가 들은건 1920년 8월 일기에서도 나오는걸 봐서 당연히 1932년도보다 이전에 해당될것이다. 실제로 1932년1월8일자 일기에는 오후에 안창호가 수감되었다는 이야기가 언급되어있고 윤치호 자신이 안씨석방을위해 당국자들과 접촉하고 있다는 소식에 김활란이 분개하고 있는것 같다라는 내용도 기술되어있다. 즉 안창호가 감옥에 수감중인 상태라는 건 본인도 당연히 알고있는 상태에서 글을 썼을것이다. 또한 윤치호 일기를 보면 안창호가 지역감정이 섞인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식으로 기술되어있지 그가 직접 그런 말을 했다고 기술되어있지도 않다. 안창호가 출옥 후 1935년 3월 24일짜에는 안창호를 직접 방문하여 대화를 나눈 이야기가 있는데 안창호는 이 자리에서 자신은 지역감정소유자가 아니며 오히려 이를 타파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기록되어었다.
- ↑ 동지회는 '이승만 친위대'라 불릴만한
정치깡패조직으로 미주 한인 사회에 많은 분열을 조장한 원흉 단체다. 이들은 기존에 한인 사회를 주도하던 대한인 국민회에 자주 테러를 가하고, 당시 자금이 많았던 국민회를 털어 자금을 쓱싹하기까지...(...) - ↑ 한편 여운형은 자신의 출신지로 보면 이승만의 기호파였지만, 안창호의 서북파로 분류되었다. 안창호와 가깝기도 했지만 초기부터 여운형이 임정의 권역을 벗어나 명예를 올리고 다닌다는 임정 주류파의 질투도 작용하였다.
- ↑ 안창호가 체포된 것을 살펴보면 불운이 겹치고 겹쳤다. 윤봉길이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했었을 때 김구는 윤봉길의 의거 하루전에 상하이 내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에게 미리 통보한다. 다만 안창호에게만 통보하지 않았는데, 안창호가 이끌었던 흥사단이 개방적인 조직이라 자칫 잘못하면 비밀이 샐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거사 당일 오전 9시에 안창호가 살던 집에 사람을 보내 거사 여부를 알리도록 했다. 불행히도 안창호는 이때 지인의 집에 가고 없었다. 그것도 지인의 아들에게 2원을 주기 위해서였다. 평소 안창호의 지론이었던 어린아이라도 소중히 대해야 한다.를 실천하다가 체포된 셈. 안창호는 일본 경찰이 그를 잡아갈때도 의연했다고 한다.
- ↑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당시의 도산 안창호(1937년 11월 1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 도산 안창호의 순국 4개월 전에 찍었던 사진이며 남아있는 사진 중 그의 생전에 마지막으로 찍힌 사진이다.
- ↑ 메이지 덴노 무쓰히토(睦仁)
- ↑ 주로 민족개량주의 양성을 시킨 장본인이라고 깐다.(...)
- ↑ 그런데 이광수의 후손은 안창호의 이름을 팔아먹으면서 이광수를 변호하고 있다.
이런 썩을 놈들 - ↑ 참고로 총 세 명의 한국인이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남겼는데, 나머지 두명은 아들 이름을 안필립으로 지은 안성기와 이병헌이다.
- ↑ 경북 상주의 그 쾌재정과 다르다
- ↑ 출처.
- ↑ 회관은 기념관이며 그 앞의 광장
- ↑ 안필영은 1926년생이고, 아버지인 안창호 선생이 세상을 떠난 것은 그보다 12년 뒤인 1938년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유복자가 아니지만, 안창호 선생이 안필영이 출생하기 전부터 투옥되어 사망 전까지 구금생활을 했으므로 12년간 단 한 번도 만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안창호, 이혜련 부부의 늦둥이이기도 한데 형님들, 누님들과도 나이가 상당히 차이가 난다. 큰형님 안필립이 1905년생으로 무려 21살이나 차이나고(이 덕분에 안필영이 말하기를, 큰형님인 안필립이 자신의 아버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안필선(1912년생)하고는 14살, 안수산(1915년생)하고는 11살, 바로 위 누나인 안수라(1917년생)하고도 9살이나 차이가 났다.
- ↑ 이 때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있는 도산의 다섯 곰방대 중 가장 작은 곰방대에 담배를 담는 통이 없는 이유가 밝혀졌는데 알고 보니 어린 시절의 이 분이 몰래 빼내신 것(...). 다행히 지금도 가지고 계시는데 무도 멤버들한테 도산의 붓글씨 배달을 부탁했지만 곰방대는 끝끝내 가지고 계시겠다고.
- ↑ 의사이자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 1회 입학생이며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 선생과 동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