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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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배드민턴 선수
셔틀콕의 황제

하지만, 세계의 황제, 한국의 머슴

2 선수 생활

1964년 12월 5일 생으로 고향은 전라북도 임실이다. 아버지의 권유로 라켓을 잡아 배드민턴에 입문해 두각을 나타내면서 고등학교 1학년 때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다. 이 때 박주봉의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는데, 한국과 일본의 배드민턴 단체전 시합에서 고교 1학년의 듣보 선수가 1번으로 출전하자 일본 측에서 우리를 무시하냐고 항의를 했다. 원래 배드민턴 단체전의 관례가 1번 단식 주자는 그 팀의 최고 에이스가 출전하는 것이기 때문. 하지만, 박주봉은 이런 항의를 세트스코어 2-0의 완승으로 잠재우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1982년 덴마크 오픈 복식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역대 최연소 국제대회 우승 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이용대가 깨뜨렸다. 어쨌거나 그렇게 화려하게 등장한 박주봉은 그 뒤로 천하무적으로 군림하면서 그야말로 국내와 국제 무대를 가리지 않고, 전 세계 복식 무대를 씹어 먹었다. 남자 복식은 주로 김문수와, 혼합 복식은 처음에는 유상희, 나중에는 정명희와 짝을 이루면서 전 세계를 누비면서 각종 투어 대회를 섭렵했는데, 그 결과 총 72회의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장식하며, 1991년 기네스북에 배드민턴 최다 우승자로 이름이 올랐다.

세계선수권에서 5번 우승(남자 복식 2회, 혼합 복식 3회), 아시안 게임 3회 우승, 전영오픈 9회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세우면서 승승장구했다. 국내 무대에서는 한 술 더 떠서 만화라고 해도 믿기 힘든 106연승의 신화를 쓰면서 적수가 없는 존재로 부상했다. 세계적인 배드민턴 선수로 명성을 얻으면서 이미 신화가 된 것. 다만,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올림픽에는 정식 종목이 아니었던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특히 정말 강했던 정명희와의 혼합 복식은 불운하게도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이 늦어지면서 결국 올림픽 데뷔를 못했다.

마침내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배드민턴이 정식 종목이 되자 대표로 참가했고, 남자 복식에서 평생의 파트너인 김문수와 짝을 이뤄 아주 손쉽게 우승을 차지했다. 결승전 스코어는 15-11, 15-7로 큰 위기 없이 여유있게 승리했다. 이로서 배드민턴 역사상 최초의 남자 복식 금메달리스트로 이름을 올렸다. 박주봉의 뛰어난 공격력과 명석한 판단력이 강한 체력과 서비스를 가진 김문수와 잘 조화를 이룬 것이 컸다. 물론 두 사람 모두 공격력은 최고 수준이었지만, 박주봉이 좀 더 강력했다는 평.

올림픽 이후에 학업에 전념하겠다면서 한동안 은퇴를 선언했다가, 1996 애틀랜타 올림픽을 앞두고 협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혼합복식 출전을 위해 복귀한다. 그런데 여기서 박주봉은 협회와 틀어지게 된다. 바로 출전 파트너 선정 과정에서 잡음이 빚어진 것. 협회는 심은정을 추천했고, 실제로 둘이 호흡을 맞췄지만, 박주봉은 자신의 제자인 라경민과의 호흡을 주장했고, 이 때문에 갈등이 빚어지면서 한 때 출전이 불투명하기도 했다. 결국 라경민과 호흡을 맞췄는데,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그만 대표팀 동료인 김동문-길영아 조에게 지면서 은메달을 차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때 출전을 못하면서 꼬인 심은정은 조기 은퇴했고, 결국 박주봉의 입지는 묘하게 되었다.

3 코치 생활

애틀랜타 올림픽 이후 완전히 은퇴하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배드민턴 계의 슈퍼스타를 그냥 보고 있을 국가는 없었다. 사이가 묘해진 한국과의 관계를 비집고 들어온 쪽은 먼저 영국이었다. 유학 비용까지 다 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그를 코치로 영입했다. 그러다가 계약이 끝나자 이번에는 말레이시아가 그를 모셔갔다.

말레이시아 코치 생활 이후에는 2003년 한 해동안 전 세계를 돌면서 배드민턴을 보급하는 인스트럭터로 활약했다. 그리고 잠시 한국에서 지도자 생활도 했다. 하지만 2004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대표팀 감독을 맡아,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일본의 배드민턴 실력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박주봉 감독은 일본 배드민턴 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한 뒤 일본 선수들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것들 위주로 굉장히 혹독하게 훈련시켰다고 한다. 일본 배드민턴계의 훈련 체계를 완전히 갈아엎었을 정도였다. 2016년에 일본 여자 배드민턴이 전영 오픈에서 39년만에 우승했을 때도 TV보도에서 가장 많이 언급한 것은 메달을 딴 선수가 아닌 박주봉 감독이었다. 리우 올림픽에서 여자복식 마쓰토모 미사키/다카하시 아야카 조가 일본 최초의 배드민턴 금메달을 획득하며 우리나라에서도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2001년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세계배드민턴연맹 선정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4 에피소드

  • 말레이시아에서 경기를 할 때, 길거리 좌판에서 햄버거를 만들어서 이름을 '주봉 버거' 라고 붙이고 이 버거를 먹어서 박주봉이 잘 하는 거라고 약을 팔아 선전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주봉 쥬스라는 브랜드는 정말로 나왔다고 한다.
  • 1996 애틀랜타 올림픽을 앞두고 복귀를 선언하자, 한창 연습중이던 모든 선수들이 좌절했고, 특히 덴마크의 조는 아예 혼합복식 출전을 포기하고, 각자 남녀 복식으로 선회했다.
  • 역시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당시 전격적으로 컴백을 선언하자, 전 세계의 배드민턴 계가 그의 현역 시절 비디오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우승 후보, 황제의 귀환인데 그 정도는 당연하다는 반응.
  • 말레이시아 총선에서 여당이 박주봉을 영입해서 감독으로 앉히면 지지율이 올라갈 것이라는 흠좀무한 예측도 있었다. 실제로 전성기 때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를 가면 한류 아이돌 스타 못지 않은 인기와 사인 공세에 시달렸다고 한다.
  • 허버트 스칠 상의 여덟번 째 수상자인데, 이 상이 무슨 상이냐면 세계 배드민턴 계가 역사적인 업적을 남겼다고 인정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그런데 이거 정기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그럴만한 공적이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이 나타날 때만 주는 상이다. 물론 대개는 2년에 한 번 꼴로 수상하기는 한다. 어쨌든 한국인으로는 유일한 수상자다.
  • 농구에서 마이클 조던의 이름을 딴 에어조던이라는 브랜드가 있는 것처럼, 배드민턴에서도 박주봉의 이름을 딴 박주봉 스포츠(PJB Sports)라는 브랜드가 있으며, 이 브랜드의 모토는 Power of Legend'이다. 흔히 알려져 있는 '주봉'이라는 브랜드와 박주봉은 관련이 없다. (계약 기간이 진작에 끝났다)
  • 박주봉을 모르는 세대들은 박주영+따봉 으로 아는경우도 있는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