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 중의원에 당선되었을 때. 가운데에 있는 남자가 박춘금이다.
朴春琴.
1891년 4월 17일 ~ 1973년 3월 31일
깡패질로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까지 올라갔다! ㄷㄷ 참고로 일본 제국 시대 중의원중 유일한 조선인이었다.[1][2] 이 사람이 저지른 깡패질은 수도없이 많은데, 주로 노동쟁의, 소작쟁의 활동 있을 때마다 깡패들을 동원해서 농민, 노동자들 때려잡았다는거. 대표적으로 1924년 전남 하의도에서 농민들이 소작쟁의 벌였을때, 깡패들 동원해서 농민들 때려잡은 사람이 박춘금이다.
1932년 일본 제국 중의원선거에서 도쿄시 제4구(혼죠구, 후카가와구)[3]에 후보로 나서서 당선, 이후 1940년과 1942년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제국의회 중의원으로 활약(?)하면서 "조선인과 내지인의 동등한 권리 실현"이나 "참정권, 자치권 획득"을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쉽게 말해, 독립운동과 정 반대의 사회운동을 한 것. 일단 당시 조선인들은 식민지의 2등국민 위치였기 때문에 국가운영에 전혀 참여할 수 없었고, 조선반도의 지배는 내지(일본)에서 파견된 조선총독부 관료들에 의해 행해졌다. 여기에 대항하여 조선인 협의회를 설립하고, 지역마다 조선인 자치기구를 만들려 한것.[4]
광복 후에는 일본으로 도피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반민특위 조직이 결성되자, 1949년 7월 반민특위에서 반민족행위 1급 피의자로 지목해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과 GHQ 사령부에 '박춘금을 체포하여 강제 국내송환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부에 의해 와해되고 해산되면서 박춘금은 일본에서 평생동안 기거하게 된다. 이후 박춘금은 도쿄 민단 중앙본부 고문을 맡았다.[5]
1955년 6월 조국통일촉진협의회를 조직했으며 1957년에는 일한문화협회를 설립하고 상임고문을 맡았다. 1962년 도쿄에 있는 아세아 상사의 사장으로 재직했다. 1962년, 한일회담이 진행되었을 무렵에 잠깐 국내로 귀국했던 적이 있었다. 이때 굉장히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었는데... 1973년 3월 31일 게이오대학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후 밀양에 몰래 묻히고 송덕비까지 세워졌다가 이게 발각되어 시민들의 항의 끝에 파묘되고 송덕비까지 철거되었다. 당연히 친일인명사전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그는 아시아주의라든가 오족협화 사상을 진짜로 믿은 이상주의적 친일파였다고 한다. 이미 1910년대부터 한일합방 자체가 1:1의 동등한 합방이 아니고 일본 주도의 일방적인 병합, 병탄임이 드러났고, 당시 일진회의 주도자였던 이용구같은 경우 나중에 속았다고 할 정도였는데, 아시아주의를 실제로 믿고 있었다니 머리가 나쁜건지 아니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던건지 희한할 따름이다. 아니면 둘 다던지
- ↑ 조선 친일파들에게 선심쓰듯이 나눠준 귀족원 의원도 아니고 무려 도쿄 한복판의 일본인 유권자들이 뽑는 중의원에 3번이나 조선인으로서 당선된 것을 보면 이 사람이 얼마나 악질 친일파였는지 알 수 있다.
- ↑ 전후에 한국계 아라이 쇼케이가 중의원이 된적이 있으며 아라이는 일본으로 귀화한 이후에 중의원이 되었다.
- ↑ 혼죠구는 현재의 스미다구 남부, 후카가와구는 현재의 고토구 북서부 일대에 해당한다.
- ↑ 불행하게도 1930년대 중반쯤 가면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노선을 타게 된다. 특히 민족개량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이러한 경향이 많이 보였다. 대표적으로는 춘원 이광수나 최남선같은 경우가 그러했는데, 당시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자였고,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이었다. 일본이 망할리가 없는 강대국이라 생각해서 독립을 포기하게 된 것. 그래서 박춘금같은 인물을 자치론 옹호자들은 매우 좋게 평가했다.
- ↑ 여담이지만 당시 민단은 의외로 파시스트나 친일파 내지는 친일경력자들이 많았다. 삼무사건이나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에도 민단이 관여하고 있었다.
지하에 계신 박열 선생이 이 사실을 알면 뒷목 잡으실 일이다.사실 박열 선생은 민단 최초의 단장이었으나 민단 내부의 파시스트나 친일파들과의 갈등으로 생전에 민단에서 나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