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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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複章)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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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홍병기황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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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단 주요 간부들과 함께. 가운데 앉은 이가 박열.

1 개요

박열(朴烈, 1902년 2월 3일 ~ 1974년 1월 17일). 한국의 독립유공자. 아나키스트. 언론인. 시인. 우익 교포 단체인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의 초대 민단장.

2 생애

경상북도 문경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咸陽), 어렸을 때의 이름은 준식(準植)이었다. 3.1 운동과 관련되어 경성제2고보 (현 경복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한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배달을 하면서 학업을 계속했다.

1920년 최초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하였으나, 이듬해인 1921년 정치적인 견해 차이로 인해 김약수 등의 공산주의자가 이끄는 북성회와 박열 등의 무정부주의자가 이끄는 풍뢰회(이후 흑우회로 개칭)로 분리된다. 이후 일시 귀국하여 조선 최초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로회(黑勞會)'를 조직하였다. 흑우회는 "후데이센징(太い鮮人)"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일본 당국이 '조선인 불온분자'를 일컫는 "불령선인(후레이센진)"과 비슷한 발음의 단어로, 일종의 말장난을 통한 조롱이었다. 몬데그린

1923년 4월,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등과 함께 비밀결사 '불령사'를 조직하고 보다 적극적인 반일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던 중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자 조선인 학살을 피해 기타 잇키[1]의 도움을 받아 피신하였으나, 보호 검속이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에 의한 취조 도중 박열의 폭탄 구입 계획이 알려지게 되었고, 일본 정부와 검찰은 이를 천황 암살을 꾀한 조직 사건으로 날조, 과장하여 보도하였다. 이를 '대역 사건'이라고 한다. 이 혐의로 1926년 3월 사형 선고가 내려졌으나,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후세 다쓰지의 도움으로 박열과 후미코는 옥중에서 결혼하였다.

이 때 일본에선 박열과 후미코의 사진 스캔들이 터지기도 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일본 언론에 실렸는데, 도저히 중범죄자의 모습이라곤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롭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해당 사진 이 스캔들은 담당 판사가 해임되고 정치적 공세로 인해 1927년 당시 일본 내각이 총사퇴할 정도로 파장이 컸다. 1926년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자살하였다.[2] 후미코의 시신은 후세 다쓰지가 수습하여 박열의 가족을 통해서 문경에 안장했다. 박열은 22년 2개월 동안 복역한 끝에 해방 이후(1945년 10월 27일) 석방되었다.

수감 생활 도중 박열이 전향을 했다는 일각의 주장이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1934년 일본 사법당국은 박열이 옥중에서 전향하여 자신의 죄를 반성하는 글을 썻다고 발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 여부가 불확실한 편이다. 전향서에 나타나는 문체가 이후 박열이 직접 쓴 글과는 확연히 다른데다 일본의 발표에 따르면 이후에도 박열은 전향 선언을 여러차례 했었으나 정작 일본은 박열을 석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강요에 못이겨서 박열이 매우 형식적으로 전향서를 썻거나, 처음부터 전향서를 일제가 날조할 가능성이 크다.[3]


출옥 당시 그를 환영하는 재일교포들 인파

이후 도쿄로 돌아와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하였으며, 김구의 부탁을 받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 송환의 책임을 맡았다. 이후 반공주의 노선의 신념을 밝혔으며, 신조선건설동맹은 타 우파 단체들과 통합되었고 '재일조선인거류민단(민단))이 발족하였다. 박열은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의 초대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1948년 양근환, 김구, 박열.

1948년 8월 15일에 일시 귀국하였고, 이듬해에는 영구 귀국하여 서울에 머물렀다. 한국전쟁 도중 북한에 납북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서울에 진주한 북한 보위부가 납북했다고 한다. 자진 월북한 인사들도 있었고[4], 반동 혐의로 체포된 사람들도 있었으며, 북한군과 보위부 고위 관계자들이 와서 "선생, 이곳은 위험하니 우리가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다"라며 설득하여 북으로 데려간 경우가 있다. 조소앙, 김규식이 이러한 모시기 공작으로 끌려간 경우이며, 박열도 북한이 연행한 경우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 박열은 주위의 피난 권고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모두 서울에 남아있는데 독립투사인 내가 그들을 버리고 서울을 떠날 수 없다"며 서울에 잔류했다고 한다. 아마도 당시 김구극우 테러결사인 양근환혁신탐정사에 연관이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주변에서 많은 우려를 한듯. 북한에서는 한국전쟁 휴전 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했다. 이 단체는 북한/정치 항목을 참조.

1974년 1월 17일 평양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에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묘지는 평양 신미리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특설묘지에 있다.

3 기타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이야기가 다뤄진 적이 있다. 그러나 프로그램이 프로그램인 만큼 단순히 연애담 정도로 다뤄졌다(...).
  • 워낙 성격이 불같고 강직해서, 북한에 있을때도 당국에서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1955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식에서 당시 조국전선의 일원이자 평화위원회 서기장이었던 최성환과 의견다툼 있었는데, 최성환은 늑골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어떻게 말싸움을 하면 늑골이 부러지냐 박열의 북한에서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여러가지 자료를 종합해 보건대, 박열은 북한 생활에 불만이 많았지만 북한 당국에 눈이 날 행동은 하지 않았던것 같다. 일설에 따르면 북한 당국이 위로 차원에서 차려준 연회에서 납북/월북자들이 희희낙락하는게 꼴보기 싫었고, 결국 그 사람들과 시비가 붙자 두드려 패놨다는 이야기도 있다(...). #
  • 박열 의사의 고향인 경북 문경에는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박열의 생가도 복원했으며 후미코의 묘소도 이곳에 있다. 본래 후미코의 묘소는 주흘산 근처의 박열 집안의 선산에 있었는데 기념관을 세우면서 현대의 위치로 이장했다.
  • 박열 선생의 자녀들은 1남 1녀가 있는데, 아들 박영일은 대한민국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육군 예비역 장성 출신으로 준장까지 지냈다.(재일교포 출신으로는 육군사관학교 최초 졸업자라고 한다.#)

4 참고항목

  1. 아이러니한게, 기타 잇키는 국가사회주의자, 즉 파시스트의 거두였다. 이후 2.26 사건에 적극적으로 관여해서 그 죄로 사형을 당하는 인물이었을 지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살을 피해 온 박열을 기꺼이 보호해줬다. 기타 잇키 외에도 의외로 극우-제국주의 성향의 인물들 중 일부가 학살을 비판하고 조선인을 보호한 사례가 있었다. 바꿔 말하면 이들조차 비판할 정도로 당시 학살을 저지른 자들이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2. 실제로는 의문사로 진상은 알 수 없다
  3. 다만 그의 연인이자 동지였던 가네코 후미코의 평전을 쓴 야마다 쇼지는 박열의 수감 이후 행적에 대해 강도 높게 비난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확인 바람
  4. 3일만에 서울이 점령당하자 이제 끝났다고 생각한 케이스 또는 남한의 파시즘적 체제보다는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가 낫다고 판단한 케이스. 당시만 해도 북한은 여러가지 파벌이 횡적으로 연대한 연립정권 형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