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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관 폭탄의거 사건의 주역 3인방. 왼쪽부터 강윤국,조문기,유만수 순이다. |
1945년 7월 24일 경성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의사당)에서 터진 폭탄 사건.
일제강점기의 사실상 마지막 의거.
1 개요
1945년 6월, 정치깡패 박춘금이 '대의당'을 조직하여 당수에 취임했고 7월 24일 경성 부민관에서 대의당 주최로 '아시아 민족 분격대회'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러 승기는 거의 연합군으로 넘어가 있던 당시 친일 부역배들이 눈앞으로 다가온 일본의 패배를 부인하고 국민들을 선동하여 전쟁터로 몰아넣을 심산으로 개최한 행사였다. 이 날 행사에는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 征四郎)를 비롯한 고위 관료와 장성, 친일 세력들이 다수 참석했으며, 일제의 괴뢰정권인 난징정부와 만주국의 대표 등도 연사로 참여했다. 이 때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세 애국지사가 연단 밑에 다이너마이트 시한폭탄을 설치하고 연설 도중 터뜨려 대회를 무산시켜버렸는데, 이를 '부민관 폭탄 의거' 라고 한다.
이로 인하여 '아세아 민족해방'은 훼이크고 덴노 폐하를 위해 죽으러 가라 이란 주제로 강연하려던 박춘금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또한 이 사건으로 1명이 폭사하고 수십명이 부상을 입었다.
당시 총독부는 이 사건으로 발칵뒤집혀졌다. 이 사건의 여파로 비밀결사 단체였던 건국동맹의 정체가 탄로났고, 주요 간부였던 조동호가 검거당했다(이후 광복 후에야 출옥). 그리고 박춘금은 의거의 주역인 조문기와 유만수, 강윤국을 체포하기 위해 직접 사재를 털어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지만, 시간은 그놈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한 달도 안되어 해방이 된 것이다...
2 의거인들의 향후 행보
이 사건의 주역 3인방은 1977년 건국포장, 그리고 상당히 늦은 1990년 건국훈장 4등급(애국장)을 수여받았다[1]. 그리고 주역인 조문기 선생(1927년 5월 19일 ~ 2008년 2월 5일, 당시 만 18세)은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 활동해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커다란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강윤국 의사(1926년 9월 28일 ~ 2009년 10월 3일)는 당시 만 19세로 세명 가운데 가장 오래 사셨다. 향년 만 83세. #
3 각종 매체에서 다루는 부민관 폭탄의거 사건
대구 학병 집단탈출 사건과 함께 해방 직전 국내에서 벌인 반일의거이기 때문에 의외로 매체에서 숟가락 놓기 잘 다루어진다.
3.1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여명의 눈동자에서는 OSS의 지령을 받은 장하림이 이들과 함께 작전을 꾸민 것으로 나온다. 다만 소설판에서는 실제 인물들과 장하림이 데리고 온 OSS 요원들이 벌인 일로 그리고 성공한후 완전히 자취를 감추지만 드라마판에서는 윤여옥도 참가하고 실제 인물들이 안 나오고 모두 가상의 인원으로 다루고 있으며 현장에서 윤여옥이 생포된다. 그리고 부민관 건물 고증도 영 좋지 않다.
3.2 드라마, 야인시대
야인시대의 중요 사건/사고 | |||
부민관 폭탄의거 사건 | 중앙극장 습격 사건 |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 |
단성사 저격 사건 | 황금마차 습격사건 |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 | |
충정로 도끼 사건 | 고대생 습격 사건 | 국회 오물 투척사건 |
강준식의 "적과 동지" 에서는 이 전에 성고문...으로 음모를 알아내지만 결국 일본 경찰이 막지 못한걸로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