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拔刀 突擊. 도검을 뽑아들고 하는 돌격. 먼 친척뻘로 하이랜드 차지가 있다. 부족한 화력을 매꾸기 위해, 또는 자신에게 유리한 근접전으로 몰고가기 위해 상대방을 사격으로 견제 한 후 기회를 봐서 닥돌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상대방이 돌격력을 상회하는 화력으로 맞받아 치거나 근접을 걸어도 물러섬 없이 맞받아 치면 망한다는 것도 같다.
발도 돌격이라는 것은 근대 일본의 내전이었던 무진전쟁과 서남전쟁에서 일부 군대들이 보인 행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따지고 들자면 근대 유럽 군대에서 사용했던 장교들의 발도 돌격[1]이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구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도 넣어야하겠지만 실제로는 총검을 든 병사가 절대다수였다는 점에서 발도 돌격과는 다르며, 총검 돌격에 포함하는 것이 맞다.
발도 돌격이라는 현상이 가능했던 것은 기본적으로는 당시 전쟁에서 공성전, 시가전, 산악전, 매복 등 다양한 근거리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대 서양에서는 같은 상황에서 총검을 이용한 총검 돌격이 주류를 이뤘던데 반해 일본에서 발도 돌격이 자주 행해진 것은 당시 일본의 독특한 상황 때문이었다. 우선 전쟁의 주축이 사무라이들(즉 거의 전원이 도검에 익숙하고 도검을 상시 패용하고 있던 집단)이었던데다, 체구가 작았던 당시 일본인들로서는 4,5kg에 달하던 당시 소총으로 백병전을 벌인다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때문에 본인들이 익숙하기도 하고 사용하기도 좋은 일본도를 이용한 발도 돌격이 벌어진 것이다.
사쓰마-초슈나 막부이외의 재정이 풍부하지 않은 번들은 대부분 총기 보급이 시원치 않았다는 것도 발도 돌격이 자주 벌어진 이유 중 하나였다. 한 세대 전의 전장식 미니에 소총이나 일본도와 창 등 냉병기를 여전히 사용해야 했던 번들은 자연히 돌진지향적인 전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막부육군이나 전습대 역시 종대 돌격을 주특기로 하는 프랑스식 전술을 교육받았기 때문에, 백병전 발생 가능성은 꽤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발도 돌격이 도검 단독만으로만 이루어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실패했다. 무진전쟁 내내 발도 돌격은 대포와 총이 활약하는 가운데에서 벌어지는 백병전의 한 장면을 장식하는 정도였다. 총포의 지원을 받지 않는 발도 돌격은 대부분 실패했다. 가령 토바 전투에서 미마와리구미는 선제포격을 맞고 혼란에 빠진 막부군이 전투대형으로 전개할 시간을 벌기 위해 발도 돌격을 개시하였지만 사쓰마군의 총격 앞에 접근도 못하고 참패했으며, 후시미 전투에서는 봉행소로 날아들던 포격을 참다 못한 신선조(新選組)가 발도 돌격을 감행하였으나 쵸슈번의 일제 사격 앞에 다시 봉행소로 도주하는 추태를 보인 바 있다. 히지카타 토시조가 이끄는 막부군 잔당이 우츠노미야 성을 공격할 때 상대측도 도창갑사대를 내보내 격렬한 백병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히지카타가 도주하려는 병사 한명을 베어 사기를 올려 결국 성을 탈환한 이야기가 유명하다.
사실 발도 돌격은 동시대 총검돌격이 그랬듯이 전술 중 하나로서, 전쟁의 향방을 좌우할 정도로 대단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이는 전쟁의 승리가 최신 대포와 총으로 무장한 삿쵸군대에 돌아간 점에서도 확인된다. 흥미로운 것은 무진전쟁보다 10년 뒤에 일어났던 서남전쟁에서 발도 돌격의 비중이 더 높았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1.1 서남전쟁의 사정
서남전쟁 당시 발도 돌격을 애용했던 쪽은 막부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킨 사쓰마번군 쪽이었다. 그런데 사쓰마번군은 무진전쟁에서는 최신식 암스트롱포와 후장식 스나이더 소총을 이용해 압도적인 화력을 구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군대였다. 즉 사쓰마번군은 무진전쟁 당시만 하더라도 칼에 크게 의지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10년 후의 서남전쟁에서 발도 돌격의 대명사처럼 여겨진 대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하야한 후 사학교당을 열고 파벌을 형성하자 긴장한 신정부는 반란 직전에 몰래 스나이더 소총과 총기및 탄약제조설비를 반출해 버렸다. 그런데 스나이더 소총과 관련 설비들은 사쓰마 무사들이 사재를 털어 각출해서 마련한 것으로 사쓰마인들의 공동재산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때문에 신정부의 반출이 반란의 빌미가 되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어쨌든 사이고 다카모리 암살지령 폭로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사쓰마번군이 화기를 손에 넣을 경로가 상당히 막혀 있었다. 때문에 사쓰마번군은 전장식 엔필드 소총으로 무장한 채 드라이제, 샤스포, 스나이더 후장식 소총을 장비한 신정부군을 상대해야 했다.
따라서 전쟁 내내 사쓰마군은 물량으로 압도하는 신정부군과의 사격전에서 열세를 보였다. 때문에 신정부군이 약진을 거듭하여 방어선까지 접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서남전쟁 최대의 공방전인 타바루자카 전투에서는 내내 비가 크게 내렸는데, 화약을 직접 털어넣어야 하는 전장식 소총은 화약이 비에 젖어 격발불량이 날 확률이 크게 높았다. 실제로 1877년 3월 20일, 타바루자카 방어선을 신정부군이 돌파한 데에는 악천후로 인해 사쓰마군의 화력이 크게 저하된 것이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쓰마군은 총검을 앞세워 돌파를 시도하는 신정부군에 대해서 발도 돌격으로 응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사쓰마 군은 전원 사족이었으며 모두들 칼을 가지고 있었고, 최소 10년 넘게 검술을 수련한 무사들이었으므로 칼이 훨씬 손에 익었다. 더군다나 사쓰마의 검술은 돌격하여 내려베는 것을 주특기로 하는 지겐류이다. 또한 사족을 점점 압박해가는 정부 정책속에서 일본도가 사족들의 정신적 상징처럼 여겨지면서 오히려 이전보다 중요시되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이유였다. 이러한 실용적-상징적 요인들이 겹쳐져, 발도 돌격은 이러한 무사들의 멘탈을 수호하기 위한 (다소 과시적인 형태의) 정체성 확인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발도 돌격은 의외로 큰 효과를 보았다. 무진전쟁 때는 전투주체가 모두 사무라이였지만, 서남전쟁 당시의 신정부군은 징병령을 통해 모은 평민출신 장병들이 대부분이었다. 평민 출신의 정부군 병사들은 방금 전까지 승기를 잡고 있다가도, 사쓰마군 사무라이들이 칼을 휘두르면서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면 공포에 질려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여 공격당하거나, 흩어져 도망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 총검으로 대항해 보려 해도 백병전에 익숙치 않은 관계로 제대로 응수하지 못하고 베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번뜩이는 칼날은 원초적 공포를 이끌어내며 특히 훈련도가 차이나는 상황에서는 화력 열세를 뒤집을 위력을 가진것이 여러번 증명되었다.
결국 신정부군은 구 사족 출신으로 특별히 모집한 발도대(拔刀隊)를 투입하고서야 사쓰마군의 발도 돌격에 겨우 대응할 수 있게 된다. 검술을 오랜 기간 수련했고 무진전쟁에서 실전 경험도 있는데다가, 봉록을 잃고 궁핍하게 살던 구 막부측 번사들도 대거 참여했기 때문에 사쓰마에 대한 증오가 대단해서 매우 큰 전투력을 발휘했다.[2] 사쓰마군의 발도 돌격에 돌파의 여지를 찾기 어렵던 타바루자카 전투에서도 총술과 검술이 모두 뛰어난 발도대는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은 군인이 아니라 경찰신분으로 투입되었는데 이는 현대식 국민개병제 운영이 막 루트에 오른 상황에서 구사족 출신을 특채할 수 없었기 때문. 그래서 서남전쟁 이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바람의 검심 영화에서도 경찰이 발도대를 운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2 근대 군대의 발도 돌격
전 병력이 아닌 장교와 부사관만으로 한정할 경우, 근대 군대에서 발도 돌격은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물론 다른 병력들은 총검으로 돌격하지만, 장교의 지위를 상징하는 용도로 모든 장교는 검을 패용하고 있었고, 사격명령이나 지휘용도에 바로 이 검이 쓰였다. 지휘봉처럼 휘두르거나 흔들면서 명령을 내리는 방식. 총검돌격을 개시할 때에 장교가 명령을 내리며 보병들과 함께 달려나갔는데, 이때 부사관은 검 혹은 스펀툰, 장교는 검을 가지고 돌격하여 적과 싸웠다. 검을 쥘 경우 당시 군도는 대부분 한손검이었기 때문에, 남는 왼손에는 권총을 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세기 장교용 군장에서 권총집은 오른쪽에 차고 왼손으로 뽑게 만든 것이 많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 기인한다. 발도를 한 다음 권총집을 열고 왼손으로 권총을 뽑기 위한 이유.
구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도 이 서양 군대의 총검돌격과 같은 종류라고 봐야 한다. 유신 이후 프랑스, 프로이센 육군의 제도를 따 오면서 일본군도도 근대 유럽적인, 위치와 역할을 나타내는 권위의 상징 겸 호신용 무기의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인들의 도검에 대한 고정관념과 전통 검술과의 괴리 때문에 양손세이버나 신군도가 등장하고 사무라이를 중시하는 정신교육도 발생해서 좀 시대착오적인 냄새를 풍기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서양식 관념 아래에 있었다. 반자이 돌격과 같은 시대착오적 행동은 1차대전 당시 프랑스가 하던 행동에 큰 감명을 받고 그걸 충실히 따르고자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외에도 다양한 이유가 있다. 러일전쟁당시 러시아군은 오히려 일본군에 대해 우라돌격을 감행해 진지를 재탈환하거나 공격을 좌절시킨 선례가 있었고 일본군은 독일식 화력주의 교리만을 신봉하다 이것에 큰 감명을 받기도 했으며, 프랑스의 엘랑 비탈로 대표되는 지치지 않는 감투 정신 이론과 1차대전 당시 1차 마른 전투에서 프랑스 주력은 패배했음에도 끝까지 전투의지를 지킴으로써 전선의 붕괴를 막는 데에 성공했다. 일본군은 이걸 보고 마땅히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기네들 중심 교리화 시켰는데... 돌격정신은 자살성 돌격으로, 지치지 않는 의지는 자살 의지로 변질된 것이 바로 반자이 돌격이었다.뭘 가르쳐도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위엄. 일본군이잖아
2 발도돌격 vs 총검돌격
검과 총검을 붙이면 누가 유리할까는 총검이 실용화된 17세기 말부터 끊임없는 논란거리였다. 스코틀랜드의 검술 마스터인 토머스 매슈슨(Thomas Mathewson)이나 잉글랜드의 핸리 앤절로스(Henry angelos)같은 경우 검이 총검 안으로 파고들기만 하면 총검이 대응할 방법이 없으니 검이 이긴다고 했지만, 앨프리드 허턴같은 사람은 검보다 리치가 길며 중량과 레버리지가 뛰어나고 두손으로 잡으므로 검이 쉽게 이기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서남전쟁에서는 발도돌격이 총검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지만, 이것은 사쓰마 측이 10년 넘게 검술을 수련한 베테랑에, 정부군은 칼이라고는 구경도 제대로 못해본 평민 장정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해야한다. 정작 초창기 일본군 내에서 총검술을 채용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벌어진 논란에서는 총검술 중시파인 사이토 도쿠아키(斎藤徳明)가 검술의 우위를 주장하던 야마지 모토하루(山地元治)를 대련을 통해 우위를 입증으로써 총검술 채용이 결정되었던 일도 있었다. 실력이 대등할 경우 총검이 유리함을 입증하는 일례라고 할 수 있다.(다만 당시의 총검술이란게 2.2m짜리 목총으로
창다루듯 하는거여서 실전과 상당히 떨어져있긴 했다.)
그러나 서남전쟁뿐만 아니라 러일전쟁, 청일전쟁, 중일전쟁에 이르는 다양한 전쟁에서의 보고는, 총검이 주지 못하는 본능적인 공포를 도검은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총과 대포보다도 압도적인 인상을 남기는 경우가 많다. 이 점이 실전에서는 상대의 주저와 포기로 나타나고, 심하게는 적전도주와 항복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이 점이 총검돌격이 갖지 못하는 발도 돌격만의 큰 특성이다. 또 근대 총검술이 형성되던 18세기 초와는 달리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더이상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짓고 돌격하는 전투 방식이 사라졌으며, 분대 혹은 소대 단위로 흩어져 전투하고 병력간 간격도 상당히 넓어졌다. 이 시점에서 사실상 찌르기 외에 다른 선택권이 없는 총검은 측면으로 적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는 환경에 노출된 것이고, 바로 이 시점에서 도검은 찌르기뿐만 아니라 베기까지 가능하여 보다 융통성있는 선택으로 다양한 상황에서 적을 유린하는 것이 가능했다. 리치와 레버리지의 열세를 심리적 공포와 융통성으로 극복하는 것이 가능했다. 특히 시가전과 같은 근접전에서 총검보다 훨씬 짧은 도검류는, 특히 항일대도는 높은 실전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처럼 발도돌격과 총검돌격은 나름대로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한쪽이 압도적으로 우월하지는 않다. 산술적으로는 총검이 유리하되 실전사례에서는 발도돌격이 갖는 장점이 크게 드러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총검은 총을 쏠 수 있다는 점이 도검을 압도하는 가장 큰 장점이라서, 20세기 초까지 발도 돌격은 화력이 크게 차이나면 실패하는 경우가 잦았다. 어떤 돌격이든 화력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장점이 드러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총기가 급속도로 발전한 20세기, 특히 제2차 세계대전에 들어선 발도돌격은 시가지나 정글에서의 기습적인 공격이 아닌 이상 효과는 기대할수 없게 됐으며 , 기습공격 마저도 상대가 권총이나 총검같은 근접무장을 갖추고 있다면 안하느니만 못하게 되었다. 물론 예외는 있다 총검돌격이긴 하지만 비슷한 맥락인 반자이 어택은 화력이 받혀주지 못한 돌격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제대로 보여준다고 볼수 있다. 적어도 우라돌격은 포격이나 전차 등의 지원이 뒷받침되는 전술이다.
결국 세계대전 이후 현대전에선 오지에서나 볼수 있을법하게 됐으며, 심지어는 그 오지에서마저도 무기거래 등으로 총을 쉽게 구할수 있게 되어[3] 이제는 사라진 전술이나 다름없다.
다만 남미등의 갱단은 아직도 정글도로 싸우기도 하고 아프리카 부족들도 총기가 너무 살상력이 뛰어나 피해가 막심하단 이유로 서로 총기 비사용으로 조약을 하는경우도 있다는듯.
다만 선진국의 군인들도 총검, 대검이 아닌 다른 날붙이에 의한 사기 충격효과를 아주 무시하지는 않아서인지 주력으로 쓰지 않을 뿐이지 토마호크나 날을 갈아둔 야전삽을 총검 대신 근접전용으로 사용하는등 명맥 자체는 어느정도 이어지고 있다.
- ↑ 스웨덴에서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 때 일제사격 후 버디슈나 레이피어 같은 냉병기를 들고 돌격하는 전술을 즐겨썼다.
- ↑ 드라마에서는 구 아이즈번사를 비롯한 막부측 무사들의 발도대 지원을 중점적으로 그리지만, 실제로는 사쓰마 번사가 절반을 점했다고 한다.
- ↑ 세계 최빈국 소말리아에도 이미 AK-47과 RPG-7이 최소한의 무장으로 자리잡아 있으며, 당장 국가 이하 단위인 아프리카 오지의 부족들도 문명과의 교류가 있다면 당연하다는듯이 총을 구해다 쓰고 있다. 아프리카만큼 오지에서 살고있는 남미 부족들은 아프리카만큼 부족간 알력이 치열하지 않기에 총기로 무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나, 이 역시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구할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