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북전쟁 당시의 총검돌격을 묘사한 삽화.
목차
1 개요
일각에서는 이제 총검은 필요가 없으며, 차라리 탄약을 더 지급해야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이 길이 15㎝의 날붙이가 생사를 가를 수도 있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죠. - 히스토리 채널, 밀리터리 Q&A
탄약이 충분히 남아있다면 총검을 사용할 필요가 없지만, 탄약이 다 떨어지면 빈 총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총검으로 싸우는 상황은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잘 훈련된 사람이 살아남을 것이다. - 미 육군 제100보병사단, 프랭크 E.행콕 병장
총검을 소총에 착검(소총의 앞부분에 대검을 장착)한 뒤, 적에게 돌격하는 것. 백병전 상황에서 같은 크기의 칼을 손에 드는 것보다 소총 앞에 장착할 경우 보급 및 사정거리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게된다. 백병전은 높은 수준의 훈련이 필요하고 이기는 싸움에선 압도적인 성과를 거두었기에 화력이 지금보다 한참 떨어지던 1차대전 시기까진 훌륭한 성과를 보였다.
총검돌격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훈련 수준, 화력지원, 보전협동, 허를 찌르는 방향에서의 공격이다. 이중에 갖추지 못한것이 있다면 최소한 적의 사기를 무너뜨려야만 성공해낼 수 있으며, 이러한 조건을 갖추었어도 적의 사기가 꺾이지 않았다면 실패하거나 희생이 클 것이므로 아군의 훈련 수준과 사기가 높으며 적의 사기가 꺾이지 않는다면 적을 21피트 이내(코앞)에서 조우하길 기대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2 등장배경
중세 말에 총이 전장의 주역이 되었지만 당시 총은 정확도나 재장전 시간이 그렇게 좋지 못했다 특히 재장전은 아무리 숙달되어도 1분에 2발 쏘기가 힘들었고, 적이 근접해 백병전이라도 벌이면 총을 몽둥이처럼 휘두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 때문에 전투에서는 테르시오의 창병처럼 냉병기로 무장한 보조병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에 총기 사용자들은 자신의 총에 무거운 손잡이나 칼 가끔은 도끼나 창을 끼워서 백병전에 대비했고 각국 군대들도 총병이 창병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방법을 궁리했다. 그 결과 1600년대 쯤 머스킷총에 끼울 수 있는 단검인 총검이 등장하고, 전열보병들은 일제사격으로 몇발을 쏜 후에 총검이 달린 머스킷을 들고 돌격해서 백병전으로 전투의 마무리를 지었는데 이 백병전이 총검 돌격의 시작이었다.
1700년대 까지 총검 돌격 전술은 보병전술의 핵심중 하나가 되었고, 총검 훈련이 잘된 군대가 숫적우세를 극복하고 총검 돌격으로 이기는 사례가 허다해서 각국 보병장교들, 특히 프랑스군이 착검 돌격을 죽어라 훈련시켰다. 유럽의 일본군
그러나 1800년대에 총은 엄청나게 진화해서 강선과 탄피를 통해 과거 머스킷의 약점인 명중률과 재장전 속도를 상당히 극복했고, 냉병기를 이용한 총검 돌격은 남북전쟁부터 구식전술이 되어갔다. 실제 게티스버그 전투때 피켓의 돌격이라는 착검돌격은 돌격한 병사 12500명 중 절반 이상을 사상자 명단에 올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총검 돌격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은 기관총의 발명이였다. 방아쇠만 당기고 있으면 분당 수백 발의 탄환을 발사하는 기관총 때문에, 평지에서 벌어지는 섣부른 총검 돌격은 그야말로 죽으러 가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1]
제1차 세계대전때 고급장교들은 아직도 머릿속에 총검돌격이 박혀있었고 그결과 전쟁초기에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 악명높은 서부전선 참호전의 진상. 어디까지나 초기다. 개막장으로 유명한 1차대전도 이를 극복하고자 수많은 노력과 시도가 있었지만, 전차의 등장 전까진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수단은 참호 난입을 위한 일제 돌격 말곤 없었다. 그나마 갈리폴리 전투에선 오스만 제국군이 시도하여 비록 성공은 하지 못했어도 영연방 연합군에게 꽤 큰 타격을 준 바 있다. 오스만 제국군 57연대가 무기가 떨어지자 너죽고 나죽자 돌격한 것이었는데, 결국 전 연대원이 전멸하였지만 이들의 돌격에 고전한 연합군이 물러선 덕분에 오스만 제국군 다른 부대는 새로운 보급을 받을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나중에 57연대는 영웅적인 전공을 보인 부대로 추앙받아 현재 터키에서도 전설적인 부대로 남게 되었다.
현대에는 전술적으로는 별로 의미가 없지만 이 전술이 성공하려면 최소한 3가지의 조건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이 3가지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아군의 사기와 훈련이 적보다 월등할 것2. 충분한 화력지원 및 공중지원이 있을 것
3. 아군의 접근을 적군이 인지하지 못할 것
일반적인 경우에 이 정도의 조건이 갖추어진 상황이면 이미 이겼다는 소리다. 통상작전으로도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다. 즉, 총검돌격이란 이미 이긴 상태에서 승리를 굳히거나[2], 탄약의 고갈 등 불리한 상황에서 사용할 마지막 수단이 된 것이다. 총검 돌격이 현대전에서 사장된 가장 큰 이유이다.
이후 현대전에선 대체적으로 이런 공격을 지양하게 되나 최근의 몇몇 전장에서 의외의 성과를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3 총검 돌격의 실패 사례
현대전에선 일반적인 소총도 위력과 연사력이 올라가고 전투가 분대단위로 세분화되어 비중이 확 줄어버렸지만, 어딜 가나 정신줄 놓고 돌아가는 조직은 있어서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까지도 닥치고 착검돌격을 선호하는 국가가 있었으니, 바로 다 죽자는 반자이 어택의 나라 일본군. 심지어 돌격 시 화력지원할 때 쓰는 경기관총에까지 착검장치를 달 정도니 할 말은 다 했다.
억지로 긍정적인 면을 찾아 보자면 총열이 무거워져 연사시 적은 반동으로 안정된 사격을 할 수 있으며 총열의 열을 일부라도 흡수한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무거운 군도를 장착할 때 총열이 휘어 단발 사격능력이 떨어지고 총기의 수명이 떨어지는 단점이 존재한다. 어차피 기관총이니 거의 연사라서 이런점은 단점이 아닐 수 있겠지만, 앞서 말한 장점은 그냥 삼각대만 장착하면 끝이다. 거기다 삼각대에는 단점도 없다.
일본은 화력에서 밀리면 있는거 다 털어먹고 그야말로 남은건 총검 뿐이라, "천황폐하 만세(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전원 착검, 연합군 전선에 돌격(+야습)을 걸었지만, 처음 몇번이나 먹혔지 태평양 전쟁 중기 이후부터는 반자이 어택을 걸어도 워낙 연합군이 단단하게 준비해놓고 환영파티를 벌이는 판이라 그냥 털려나갔다.
거기에 이자들의 총검술은 사실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 총검술이기까지 했다. 17~19세기의 전열보병처럼 밀집 대형을 이룬 상태에서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한, 오직 길게 찌르는 것에만 치중한 총검술이었던 것이다.
4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총검 돌격의 성공사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이다. 전술과 군사기술 및 개인화기의 발달로 착검돌격 따위(일본군 제외)는 아예 없어질 줄 알았으나,[3] 위에서도 잠시 언급한 것처럼 전쟁에서 예측 불허의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은지라 의외의 곳에서 착검돌격이 발생[4]하고, 뜻밖에 성공적인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번쩍거리고 끝이 뾰쩍한 물건을 들이대면서 적이 돌격할때 그 거리가 21피트 이내로 상당히 짧다면, 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 상대가 돌진해 들어오는 시간이 더 짧아진다는 21피트 법칙(21피트는 미터법으로 6.4미터 정도) 때문이다.
특히 착검돌격하는 쪽이 훈련된 정규군이고 당하는 쪽이 게릴라 등의 비정규군이거나 훈련도가 낮을 경우에는 돌격 시도만으로도 전선이 무너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총보다는 칼날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감을 극복하는 것에서 훈련된 정규군이 비정규군이나 게릴라보다 낫기 때문이다. 이렇듯 총검 돌격의 효과는 아직 남아있고, 세계적인 전쟁의 추세가 저강도 분쟁화되면서 총검돌격이 여전히 유효한 전술임이 증명되었다.
4.1 한국전쟁
4.1.1 프랑스군
프랑스군은 단 1개 소대, 25명의 총검돌격으로 중공군 1개 대대를 쫓아버린 적이 있다. 1951년 1월 10일에 있었던 지평리 전투에서 있었던 일로, 프랑스군의 피해는 부상자 단 두 명 뿐이었다. 당시 소대장은 그 공으로 미군으로부터 엄청난 찬사를 받고 은성훈장까지 수상했는데, 이에 대한 프랑스 대대 사령관인 몽클라르 중령중장[5]의 평가는 간단했다.
"뭐라고? 우리 병사들이 한 총검돌격은 보병전술의 기초 중의 기초잖아! 그런데 저 양키놈들은 그걸 가지고 왜 난리인 거지?"
프랑스군 지휘관인 몽클라르가 이렇게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미군은 감명을 받았고, 제8군 사령부는 예하 전 미군에게 리지웨이 장군 명의의 이런 명령서를 내렸다.
총검은 아마 연합군의 최후의 비밀 무기는 아닐지라도, 귀관들이 무시할 수 없는 전략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총검이 단지 통조림 깡통을 따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든 장병들은 유의해 주길 바란다. - 리지웨이 -
4.1.2 터키군의 금양장리 전투
터키군 역시 한국전쟁에서 전설을 만들어 냈다. 151고지(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 전투에서 터키군은 중국군 제50군 예하 150사단에 맞서 돌격했고, 30분만에 중국군 474명을 박살내며[6] 중국군을 패주시켜 151고지를 점령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1900명사상, 터키군은 12명이 전사했으며, 오오 터키의 기상 오오! 때문에 연합군에서는 백병전의 터키라 칭했고 API 기자의 보도 자료로 전세계에 알려졌다.
4.2 한국전쟁 이후
포클랜드 전쟁 당시 영국군이 사기 진작차원에서 최후에 착검돌격을 한 적이 있었고,[7] 러시아군이 체첸전쟁 중 사용한 우라돌격은 러시아니까 가능하다고 넘어가더라도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전장에서 나온 사례가 있으니…
4.2.1 이라크전
2004년, 이라크 바스라에서 영국군 아가일&서덜랜드 하이랜더 연대 소속 병사 20명이 랜드로버에 탑승한 채 이동하던 중 시아파 민병대인 마흐디 민병대 100여명에게 공격을 받았다. 당시 마흐디 민병대는 RPG, AK-47, PKM, 박격포 등을 동원한 상황이었고, 영국군의 랜드로버는 방탄능력이 없던 관계로 차량에서 하차 후 방어대형을 형성하며 대응했으나 화력과 수적 열세에 직면했다. 근처 영국군 부대에 지원요청을 했으나 올 수 있던 지원병력은 1개 분대 뿐이었으며, 그나마 그들도 같이 고립되었다. 그리고 탄약은 떨어지는 절망적 상황. 이때 영국군 지휘관은 착검 돌격을 명령했고, 영국군 병사들은 200m를 착검한 채 내달려 민병대들을 찌르고 쏴댔다. 이에 당황한 마흐디 민병대는 도망가기에 급급했고 한순간에 포위가 풀렸는데, 영국군 사상자는 달랑 경상 3명에 그친 반면 마흐디 민병대는 최대 35명 사망, 9명이 포로로 잡혔다. 하이랜더 연대라서 그런거야 설마? 쓰레기 총을 많이 쓰다 보니 백병전을 선호하게 된 걸수도...
원인은 마흐디 민병대가 애초에 영국군을 우습게 봤고, 더불어 착검 돌격이 워낙 돌발적 행동이었던데다가, 착검돌격을 한 방향이 박격포 진지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정규군은 착검돌격 훈련을 받지만 민병대는 받지 않는다는 것도 작용했다. 번쩍번쩍하고 날이 서 있는 총검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적군 장병들의 사기를 꺾어버린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었다.[8] 물론 잘 훈련되지 않은 민병대나 그렇고 정규군에게 그랬다가는 개죽음 그 이상도 아니다
참고로 영국군의 이 행동이 우연에 의해 나온 것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부대의 조직력과 개개인의 전투 지속의지가 크지 않은 게릴라 등에게선 적군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기 시작하면 바로 무너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대게릴라전에선 비슷한 사례가 자주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로디지아군은 게릴라 수색임무를 자주 수행했는데, 의심되는 마을에 들어갔다가 매복에 걸려 포위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다 싶은 순간에 로디지아군이 최후의 발악으로 일시에 수류탄 투척과 총격을 가하며 총검 돌격을 하자, 의외의 사태에 빠진 게릴라들이 도리어 포위를 풀고 도망가거나 패배한 사례가 몇차례 있었다. 이런 사례들은 당연히 다른나라 특수부대와 대게릴라전을 수행하는 군대에도 알려져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토록 욕을 먹는 SA80이 불펍임에도 착검기능을 넣었다는 점[9]이 있다. 이렇듯 의외의 상황에서 쓰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F2000 같은 최신 불펍소총에도 착검 기능이 있다.
5 발도 돌격과의 비교
발도 돌격 항목 참조. 결론적으로는 수치적인 효용성은 총검 돌격이 앞서지만,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심리적 쇼크 효과에서는 그 때 제한적인 상황에서[10] 제한적인 시절에선 발도 돌격이 앞선다고 볼 수 있다.
6 기타
현실에서 확실히 사용되었던 전술이지만, 대부분 착검돌격이라 검색을 하면 워해머 40K의 가드맨 그림이 더 자주 뜬다. 아니면 일본군의 병크가 나오든지. 둘다 처참한 결과가 기다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2010년 6월에 첫 방영된 한국 드라마 전우에서 착검도 안하고 총검돌격을 하는 장면이 나와서 수많은 밀덕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기어즈 오브 워 3에서는 설정상에서 존재했던 총검식 레트로 랜서 기관총이 등장하였고 근접공격모션으로 총검 돌격이 가능하게 되었다. Wraaaagh!
http://www.youtube.com/watch?v=R3nHd1XW29g
한국산 게임 중에서는 의외로 크로스파이어(2009년)가 먼저 착검 기능을 등장시켰다. 정확히는 게임 내 등장 총기인 AK-47과 동일한 스펙에 끝에 착검이 된 AK-47 Knife란 무기 한정인데, 특수 기능 버튼으로 동작 시 부착된 단검으로 찌르기 공격을 한다. 이 공격은 상반신은 즉사, 하반신은 두방에 사망이라서(물론 사실은 즉사가 아니고 높은 대미지를 가하는게 전부이다. 그래서 나노전의 나노에겐 얄짤없다) 있어서 나쁜건 없다는 평. 이후 서든어택(2010년)에서 따라했다(……). 이름도 똑같고 구성도 똑같다. 이후 아바에서도 2012년에 캡슐 총기와 쿠폰 총기로서 상륙했다. 본격 셀프표절(?) 스펙은 둘 다 똑같으나 쿠폰 총기는 기간제 무기이다.
7 관련항목
- ↑ 여담이지만 이때문에 남북전쟁 후기 전투들은 원시적인 참호전 양상을 보인다. 이미 1850-60년대부터 한계를 보이고 있었던 것.
- ↑ 이마저도 훈련된 병사 한명 한명의 가치가 더더욱 높아진 현대에서는 굳이 멀쩡한 총을 놔두고 목숨을 내놓고 돌격할 이유가 전혀 없다. 윤리적, 정치적 의미를 무시하고 군사적 가치만 보더라도 총알 그까이꺼보다 사람 몇명 더 살아 있는 게 더욱 유용하다.
- ↑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미군 신병들은 "1차 대전 때나 쓰던 무기를 쓰라고? 미쳤냐?" "깡통이나 따는 걸로 적군하고 싸우라고?"라는 반응을 보였다.
- ↑ 아르덴 대공세때, 총알이 다 떨어진 미군 보병들이 착검하고 독일군에게 달려든 사례도 있었다. "방금 착검하라고 한 X색히가 누구야?"라는 반응이었지만... 아무튼 이들은 착검하고 죽자고 덤벼들었고, 적군을 물리쳤다!
- ↑ 프랑스군은 한국전쟁 당시 파병 결정을 내리고 대대급 파병 계획을 짜고 지원병을 모았는데, 이중 대대장 자리에 지원한 사람이 당시 현역 중장이었던 몽클라르 중장이다. 이 사람은 대대장을 맡기 위해 스스로의 계급을 중령으로 강등해달라고 신청했는데, 강등은 안 당했어도 결국 바라던 대로 중령 계급장을 달고 대대장 자리에 올라 파병됐다. 하지만 당연히 당시 유엔군사령부에서는 이 사람을 중장 대우해 주었다.
- ↑ 사체를 확인한 결과 대부분 총상이 아닌 개머리판이나 칼등에 의한 타박상, 자상으로 인한 시체였다.
- ↑ 다만 훈련도가 적은 군대에게만 통한다는 교리에서처럼, 아르헨티나 일반 보병들에게는 충분히 먹히는 전술이었지만, 정예로 꼽히는 아르헨티나 해병대는 전혀 굴하지 않고 총검 돌격에 맞서 싸웠다.
- ↑ 당장 눈앞에 보이는 칼날을 번뜩이며 돌격하는 정식으로 잘 훈련된 장병 앞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모르는 건 둘째 치더라도, 적이 저렇게까지 나오는 것은 이미 우리는 끝장난 상태이니 마무리용이다 라고 생각하며 눈앞이 캄캄할 것이다. 당신이라면 안그렇겠는가?
- ↑ 그러나 SA80 총검의 문제는 총검을 총열이 아니라 총구에 덮어씌운다는 것이다. 총검을 끼운 채 사격하면 손잡이도 금속제여서 총구의 열기 때문에 뜨겁게 달아올라 탈검하기 힘들다.
히트소드? - ↑ 잘 훈련되고 무장된 군인들 앞에서 칼들고 설치면 "쟤들 뭐하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외의 반응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