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전쟁

무진전쟁(戊辰戦争).
1868년부터 1869년에 걸쳐 벌어진 일본내전. 1868년이 무진년이었기 때문에 무진전쟁이라고 불린다. '무진'을 일본식으로 읽어서 '보신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메이지 유신의 근간이 되었으며 근대 일본을 만든 사건이다.

1 무진전쟁 전의 정치상황

1853년 미국의 매슈 페리 제독이 함선을 이끌고 내항한 이른바 흑선내항 사건은 도쿠가와 막부 200년의 국시였던 쇄국양이를 외국의 군사력에 굴복하여 지키지 못했던 사건이자, 일본 제일의 무력 보유자로서 각 번을 힘으로 찍어누르던 막부의 권위를 심각하게 실추시킨 사건이었다. 더불어 막부는 1856년 고메이 덴노의 칙허를 받지도 않고 독단적으로 미국과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조인. 덴노를 무시하고 조약도 전형적인 불평등조약이었으므로 당시 일본 각 지방 번에서 왕성하던 국학[1]을 신봉하던 젋은 무사층의 커다란 반발을 가져오게 되었다.

실추된 막부의 권위와 무사층의 반발에 직면한 막부는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주도하여 조정과 반발무사층을 무자비하게 찍어누르는 대탄압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을 결행, 국학파의 학자인 요시다 쇼인을 비롯 반막부 세력을 대규모로 처형한다. 이에 미토 번사쓰마 번의 탈번무사들은 1860년 이이 나오스케를 에도성 사쿠라다문 밖에서 습격하여 참살하는 사쿠라다문밖의 변(櫻田門外の變)이 발생, 막부의 권위는 오히려 더더욱 추락하고, 각 번의 무사들의 증오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에 유신지사들이 정권을 잡은 사쓰마, 조슈, 도사 등의 웅번들이 내부 개혁에 성공, 세수 확대와 부국 강병을 이룩하면서 막부에 대응한 군사력을 갖추고자 하게 되며, 점차 이들은 일본 전국에 있던 유신지사들의 산실이자 정신적 지주가 된다.

사쿠라다문 사건 이후 막부의 중심에 있던 로주(老主) 안도 노부마사(安藤信正)는 지나친 강경책이 피를 불렀다고 보고 조정과의 화해를 도모한다. 반 막부세력의 정신적지주인 조정과 정권을 나눠 함께 정치를 수행하고자 하는 이 시도를 공무합체운동(公武合體運動)이라고 한다. 이것을 위해 고메이 덴노의 이복 여동생인 카즈노미야 치카코 공주를 장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부인으로 맞이하는 정략결혼을 추진하지만 존왕양이파의 큰 비난을 받고 안도 노부마사는 에도성 밖에서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책임론을 제기받아 몰락하게 된다. 막부의 권위가 연일 실추되는 시점에서 사쓰마 번의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가 1862년 4월 군대를 이끌고 상경하여 과격한 존왕파들의 준동을 막고 양자를 중재하고자 나선다. 이 과정에서 교토 데라다야(寺田屋)에 머물던 과격파 지사를 참살하는 데라다야 사건을 일으키고 칙사를 대동, 막부에 압력을 가한다. 이에 막부도 사쓰마의 의견을 받아들여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후견에 임명하고 교토 수호직을 신절하여 아이즈(會律) 번의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를 임명하게 된다.

그러나 조슈 번은 사쓰마의 정국 주도에 반발, 조정 측 인사들을 움직여 1862년 10월 통상조약을 파기하고 양이를 명하는 칙허를 막부에 전하고, 막부는 각 번에 양이령을 내린다. 조슈가 정국을 주도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쓰마와 아이즈 번은 연합하여 1863년 8월 18일 쿠데타를 결행, 조정 내 양이파 쿠게 7명과 조슈 세력을 모조리 추방하고[2], 1864년 이케다야에서 쿠데타를 모의하던 조슈 유신지사들을 신센구미를 동원하여 참살, 마침내 이케다야 사건으로 자극받은 조슈 번은 군대를 이끌고 상경, 전쟁을 벌이나 사쓰마-아이즈 연합군에 의해 단 하루 만에 참패한다. 이것이 금문의 변(禁門の變)이다. 결국 책임을 지고 조슈 번 가로 스후 마사노스케가 할복했으나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는 다시 구니시 시나노 등 3명의 가로가 추가로 할복할 것을 요구해 이를 관철해낸다.

사쓰마와 막부군은 조슈로 진격, 마침 조슈의 양이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4개국 함대가 시모노세키에 설치된 조슈 번의 해안포대들을 공격, 완파하고 지상군까지 상륙시키는 완승을 거두어 조슈 번은 보수파가 집권하게 되고 유신지사들을 감옥에 가두고 항복을 선언한다. 그러나 타카스기 신사쿠 이하 유신지사들이 기병대(奇兵隊)[3]를 동원하여 내전을 거쳐 다시 조슈 번의 정권을 잡았고, 막부가 잘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쓰마는 조슈에 군사적/금전적 지원을 하고 있었다.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1866년 1월 21일 삿초동맹이 이루어진 후 막부는 제2차 조슈정벌을 통해 강경파가 다시 득세한 조슈 번을 재정벌하려고 하였느나 사쓰마는 참전을 거부, 진격한 막부군은 근대화한 조슈 번에 의해 참패를 거듭하고, 내적으로는 쌀값상승에 의한 잇키 등의 악재가 겹쳤다. 도쿠가와 이에모치마저 병으로 사망하여 막부군은 실패하고 퇴각, 이로써 막부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 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후견인에서 장군으로 즉위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이 점을 노려 프랑스군에서 고문단을 초빙하여 프랑스식으로 근대화를 개시하고, 전근대적인 행정체제를 개편하여 육군/해군/외교/회계/국무로 나누어 근대적인 중앙집권형 시스템을 도입했다. 더불어 1867년 마침내 사쓰마와 조슈가 무력으로 막부를 쓰러트릴 것을 결의하자, 정권을 덴노에게 반납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실시,[4] 명분을 주지 않음과 동시에 현실행정에 경력이 전무한 조정 측이 견디지 못하고 막부 측에 행정대행을 맡기게 되고, 공무합체하에서 각 번들이 참여하는 의회의 수장 격을 맡으면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쓰마와 조슈는 12월 9일 무력으로 쿠데타를 결행, 공경 이와쿠라 토모미를 이용하여 공무합체파를 쫓아내고 왕정복고를 결행, 독자적으로 덴노 중심의 이른바 신정부(新政府)를 수립한다. 신정부는 전근대적인 행정체제를 폐지하면서 막부도 폐지할 것을 결의했고, 그날 당일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내대신 직위와 영지의 반납을 결의했다.

2 1기 막부군 패주

관직과 영지를 반납할 것을 명받은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덴노측과의 충돌을 우려하여 오사카 성으로 퇴거한다. 요시노부는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가신들을 진정시키고 다음 방책을 모색할 작정이었으며 신정부측도 그러한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생각해 얼마간의 여유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막부와 전쟁을 할 생각을 굳힌 사쓰마번은 에도 시내에서 도발을 감행하고, 과격파의 사쓰마 토벌론이 격화되어 마침내 요시노부는 구와나번, 아이즈번, 막부군, 신선조를 동원하여 사쓰마 정벌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목적은 교토를 봉쇄하여 신정부를 압박하고 정치적 우위를 되찾기 위한 공산이 컸다.

막부 출병의 소식을 들은 사쓰마-조슈는 크게 동요하였으나 신정부는 이 전쟁을 사쓰마와 막부간의 사전(私戰)으로 보아 토벌령 선포를 거부했고, 동원령을 각 번에 내리도록 했지만 사쓰마와 조슈 이외에는 도사 번의 일부 병력만이 출병하여 병력면에서도 크게 열세였다. 막부는 프랑스식의 전습대를 비롯, 총동원 15,000명이 가능했지만 유신웅번측이 당장 동원할 수 있는 것은 고작 3,000명에 불과했다. 따라서 웅번 측은 비상시에 덴노를 데리고 교토에서 탈출할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다.

2.1 도바-후시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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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1월 3일 막부군은 2갈래로 나뉘어 각자 도바 가도(鳥羽街道), 후시미 가도(伏見街道)로 나뉘어 교토로 진입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도바 가도로 진입한 막부군은 막부보병대(幕府步兵隊)[5]미마와리구미(見廻組)였으며, 막부보병대는 총과 대포로 무장했지만 미마와리구미는 전통적인 갑옷과 창검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사쓰마군은 도바 가도상에 포진하여 막부군과 대치하였는데 막부군은 자신들의 위세를 믿고 행군대형을 풀지도 않고 그대로 지나가려다 사쓰마 측과 대치하게 되고, 사쓰마군의 선제 공격이 발생. 초반 포격전에서 운 없게도 막부 측 대포가 맞아 폭발하면서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어서 쏟아지는 사쓰마군의 총격에 장전조차 안해놓고 있던 막부보병대는 반격을 가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사령관인 타키가와 하리마노카미가 탄 말이 총을 맞고 폭주, 타키가와 사령관은 등자에 발이 걸린 채로 말에 끌려가며 전장에서 이탈(...)당했다. 사령관이 도주하는 걸 눈앞에서 본 막부군은 패닉 상태에 빠져 대탈주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마와리구미가 돌격을 하여 보병대가 전투대형으로 전개할 시간을 벌어 주고, 막부보병대는 대탈주가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반격을 감행했으나, 영국식 화력방어전술[6]을 사용하는 사쓰마군에게 결과적으로 패배, 그중에서도 신형 스나이더 후장식소총을 사용하는 사쓰마군 부대에게 화력으로 압도를 당했다.

한편 후시미 가도로 진입한 막부군은 신센구미와 합류하여 교토 외곽의 봉행소[7]로 진입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전근대적인 장비를 갖춘 신센구미와 막부군은 신정부군이 가도를 봉쇄하고 대포로 봉행소를 포격하자 봉쇄되어 교토 진입이 불가능한 처지에 놓인다. 신센구미는 봉행소의 담을 넘어 주특기인 창검을 이용한 돌격을 감행하지만, 사쓰마군의 소총사격에 밀려 다시 봉행소로 돌아오는 추태를 보였다. 사쓰마군의 봉쇄를 풀기 위해 다른 막부군도 여러차례 돌격을 감행했으며 특히 아이즈 번병은 조슈 번병과 철혈의 사투를 벌이지만 시가지의 엄폐물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조슈 번병의 총격 앞에 실패하고 지휘부의 무능으로 지원병력이 도착하지 않자 마침내 봉행소는 전소, 거점을 상실한 막부군과 아이즈 번병, 구와나 번병은 탈출해 교토 외곽으로 후퇴한다.

두 전투 모두 지휘관의 무능이 우세한 막부군을 패배로 몰아넣었다. 도바 방면의 막부군을 지휘하던 타키가와 하리마노카미 토모타카는 마땅히 적병이 있음을 감안하고 전투대형으로 경계태세에 들어가야 했지만 아군의 위세만을 믿고 그대로 지나가려다 패주의 원인을 제공했다. 후시미 방면에서는 막부군이 거점을 굳혔으나 거센 반격을 당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케나카 시게카타가 이끌던 지원병력은 행방불명, 총사령관인 사키노 육군봉행을 비롯한 지휘부는 도바-후시미 전투 3일간 딱히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다. 이들의 무능으로 패전한 이 전투는 이후 정황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막부가 목표인 사쓰마 번으로 향하지 않고 교토로 향한 것은 덴노와 조정에게 사쓰마 토벌의 선지를 무력시위를 통해 받아내어 대의명분까지 얻어내기 위한 행동으로 분석된다. 교토에 주둔한 사쓰마-조슈병은 소규모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령관인 타키가와 토모타카도 크게 방심했다고 전해진다.

2.2 요도-야마자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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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키노미하타(그림)

도바-후시미 전투 다음날인 1월 4일, 도바 방면의 막부군은 퇴각 후 급히 야전축성을 감행해 사쓰마군과 대치했지만, 어느 정도 안정된 후시미 방면에서 온 사쓰마군에게 측면을 찔려 재차 퇴각을 감행하게 된다. 한편 후시미 방면에서는 전날 어디로 사라졌다가 이제서야 나타난 지원병력이 합류, 호리 강 동안에 진지를 축성하여 사쓰마-조슈군과 대치 중이었다. 후시미 방면의 막부군은 이때를 반격의 호기로 판단, 우익의 우지 강을 건너 후방으로 돌아 공격하는 작전계획을 입안했는데, 하필이면 지원병력 사령관인 타케나카 시게카타가 작전상담을 위해 후방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각 부대 간 연락이 불통되어 이에 따른 혼란으로 후시미 방면의 막부군도 후퇴하게 된다.

1월 5일 막부군은 요도 방면에서 집결, 삿초 군대와 교전을 계속하면서 요도 성으로 입성하여 농성할 계획이었지만, 요도 번에서 이를 거부해버리는 바람에 결국 요도 다리를 끊어버리고 남산(男山)과 기슭의 마을인 하시모토(橋本)에서 진을 친다. 그러나 이미 4일에 교토에 공격을 가했다는 이유로 막부 측은 조적(朝敵)으로 규정되고, 조정의 깃발인 니시키노미하타(錦旗)가 나서, 유신군은 신정부군, 또는 관군(官軍)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5일에는 니시키노미하타가 요도의 제1선까지 진출하자 이걸 본 막부군은 사기가 크게 추락하였다고 한다. 6일에는 하시모토 마을로 진입한 신정부군을 신센구미가 매복하여 격퇴하기도 했지만, 쓰 번병이 배신하여 막부군에게 포격을 가하자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막부군은 오사카성으로 퇴각한다. 하지만 그때 이미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전함을 타고 에도성으로 떠나고 있었다.

결국 퇴각하던 아이즈 번병, 구와나 번병, 막부 육군의 잔당들은 육로를 돌파해서 에도로 퇴각했다. 또 이 교토 근방에서 이어진 전투의 패배와 삿초군이 관군이 된 것 때문에 원래 눈치만 보고 관망하던 서국의 여러 번들이 일제히 관군측에 붙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관군은 각 번의 벙력들을 거느리고 기세를 몰아 막부의 중심지, 에도로 진격을 개시했다.

2.3 고슈가시오(甲州柏尾) 전투[8]

에도로 후퇴한 신센구미에게 고후(甲府)분지에 위치한 고후성(甲府城)으로 입성하여 신정부군의 동진을 막으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에 국장인 곤도 이사미는 오쿠보 쓰요시(大久保剛)를 자칭하고, 부장인 히지카타 토시조는 나이토 하야토(内藤隼人)로 이름을 바꾸고, 신센구미를 갑양진무대(甲陽鎮撫隊)[9]로 개칭하고 신병 200과 소총 500자루를 지원받아 코부성 입성을 위해 고슈 가도를 따라 3월 1일 출발한다.

그러나 험한 날씨를 비롯해 갑양진무대가 시간을 낭비하는 사이 신정부군이 한발 빠르게 코부성을 점령하자 부대 내에서 동요가 일어나 병력이 점차 도주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히지카타 토시조는 구원병 요청을 위해 에도로 돌아가고, 곤도 이사미는 계속 진군하여 가쓰누마(勝沼)방면에 대포 2문과 병력을 전개한다. 곤도 이사미는 신정부 측에 사절을 보내 자신들은 치안유지를 위한 진무대에 지나지 않으며, 교전의 의도는 없다고 전하지만 신정부 측은 곧 이들의 정체가 신센구미이며, 오쿠보 쓰요시라는 진무대장의 정체가 곤도 이사미라는 것을 간파하고 즉각 공격을 개시한다. 신정부군이 전면에 토사-쿠와나 번병을 위치시켜 포격을 개시하고, 스와 번병은 숲을 통과해 좌익 배후를 치고, 다니 신베에(谷新兵衛)가 이끄는 토사번병 일부가 가시오 산을 돌아서 갑양진무대의 우익 배후를 치는 바람에 3월 6일 정오부터 2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갑양진무대는 참패, 에도로 도주하게 된다.

신선조를 갑양진무대로 개칭하고 파견한 데에는 막부의 온건파인 카츠 카이슈의 공작이라는 설이 있다. 과격파인 신선조가 에도성 무혈개성을 하려고 할 경우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기 때문에 가능한 한 멀리 보내놓으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 에도성 무혈개성 당시 과격파들은 육군봉행 오토리 게이스케처럼 막부군 주력을 이끌고 북방으로 도주하여 항전하거나, 우에노에 모여 신정부군과 결전을 벌이기도 했으므로 타당한 조치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한편 이 전투에서 깨진 신센구미는 훗날 동북방으로 도주한 막부 잔당과 연합하여 최후까지 신정부에 항전하게 된다.

2.4 에도성 무혈개성

비록 교토 진입에는 실패했고 서국의 번들이 모조리 관군에 붙어버렸지만 에도성은 3중해자를 가진 난공불락의 거성이었고, 아직 전습대 병력들과 막부 해군, 쿠와나 번과 아이즈 번을 비롯한 친막부 번들이 건재했으며, 이들 병력의 숫자와 훈련도는 사쓰마, 조슈, 도사 3번이 연합해도 압도한다고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만일 막부가 휘하 번들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총반격에 나선다면 신정부 측으로는 패배는 몰라도 승리를 장담하기는 어려웠고, 내전이 크게 장기화될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적은 따로 있었다. 우선 장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 자체가 역적으로서 추토령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에 상당히 의기소침해 있었다. 특히 온건정책을 지속하려던 요시노부의 뜻과는 달리 교토 진격은 과격파 중신들의 압력에 의한 점이 컸으므로 처음부터 전의도 높지 않았다. 더군다나 방관자 입장을 견지하던 여러 번들이 막부가 역적으로 규정되자 관군 측에 붙거나 은밀히 협상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다양한 이유에 의거해 요시노부는 결국 에도성 무혈개성을 결심한다. 요시노부는 막말 3슈라 불리는 막부 해군총재였던 카츠 카이슈, 야마오카 텟슈, 다카하시 테이슈를 내세워 신정부군과의 협상을 통해 항복하고, 요시노부 자신은 도쿠가와가 당주자리를 도쿠가와 요시요리의 아들이자 아츠히메가 키우고 있던 도쿠가와 요시타츠에게 넘기고 슨푸성(시즈오카)로 낙향하여 근신한다.

요시노부가 아직 막대한 전력을 보유했음에도 위험을 감수하고 쉽게 항복해버린 데에 다양한 학설이 있는데, 외세가 내전을 빌미로 개입하여 일본을 식민지화하려는 우려를 했다는 설, 역적이 된 것에 충격을 심하게 받았다는 설, 일본 내 각 번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장기간의 내전이 될 경우 나라가 피폐해져 버릴 것을 우려했다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그 의중이 어찌했건 병력이 충분하면서도 쉽게 항복해버린 데에 막부의 가신들은 크게 분노했고, 항복을 인정할 수 없다는 데에 여론이 모아져 각 가신들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에도를 탈출, 북상하여 신정부군과의 항전을 결의한다.

2.5 우에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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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부는 항복했지만 휘하 병력들이 막부의 명령에 순순히 따른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는 우에노 관영사(上野 寛永寺)에 칩거하고 신정부에 대한 반항적 태도를 공공연히 내세우는 무장집단, 창의대가 있었다.

창의대는 무혈개성에 반대하는 구 막신들과 히토쓰바시 가문의 가신인 시부사와 세이이치로(渋沢 成一郎)가 결성한 단체로서 혼다 도시사부로(本多 敏三郎)가 발표한 격문에 의거해 모인 사람들 중에서 시부사와 세이이치로가 두령으로 선출되는 방식을 취했다. 원래는 슨푸로 내려가 칩거하기 전에 우에노 관영사에 머무르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호위하고 다시 복권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모여들었던 단체로써 본디 치안의 유지와 장군의 경호를 명분으로 하고 있었으며, 신선조 잔당들도 포함한 대규모 불만세력이었다. 이들이 에도 시내에서 신정부군을 습격하여 구타하고 죽이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사쓰마군 사령관인 사이고 다카모리카츠 카이슈를 만나 이 문제에 대한 조치를 요구했지만 배신자 취급받는 카츠의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10] 거기에 관군과 항전하려는 각지의 패잔병이 합류하여 총병력 3,000~4,000명에 이르는 대규모 세력이 되어있었다.

게다가 황족인 린노지노미야 쿠겐호신노(輪王寺宮公現法親王)가 관영사로 들어가 창의대의 추대를 받아 대의명분을 얻는 도구가 되기까지 하자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지경이 되었다.

결국 신정부는 이들 창의대를 진압하기로 결정한다. 진압작전의 지휘는 전술의 천재 조슈 번의 오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가 맡았다. 공격 예고일을 알리는 표찰을 세워 적의 탈주를 유도하고, 북쪽을 제외한 세 방향에서 포위해서 쳐들어가는 돌격전과 포격지원이었다. 작전회의에서 사츠마 번군의 배치를 본 사이고 타카모리는 "모두 다 죽일 작정이요?"라고 물었고, 마스지로는 퉁명스럽게 "그렇소."라고 대답했다.

우에노 전쟁은 특히 정치적인 목적이 강한 전쟁이었는데 신정부는 이 우에노 전쟁을 신정부의 힘을 만방에 공표하는 이벤트로 삼을 목적이었고 즉시 에도 곳곳에 표찰을 세워 공격이 5월 15일 시작됨을 공표했다.

표찰을 세운 효과가 있어 공격 일자가 임박할수록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창의대 대원들은 점점 몰래 탈주를 개시했고 내부에서 항전파와 탈출파의 대립이 발생했고[11], 탈출파의 필두인 시부사와 세이이치로가 지지자를 이끌고 도주[12]하면서 부장이었던 아마노 하치로(天野 八郎)가 이끄는 병력만이 남아 공격 당일에는 절반 이하로 줄어있었다. 이에 대항한 신정부군은 사가 번의 신무기 암스트롱포와 4근포의 포병화력을 이용하여 측면지원을 개시하고, 사이고 타카모리가 이끄는 사쓰마군은 쿠로몬구치(黑文口)를 통해 관영사로 진입을 개시했다. 큰 비가 내리는 가운데 쿠로몬구치에서는 무진전쟁 중에서도 손에 꼽을 대규모 칼싸움이 벌어졌으나 포병지원에서 밀린 창의대는 결국 관영사 건물이 전소하면서 와해되었고, 신정부군이 미리 열어놓은 포위망을 통해 뿔뿔히 흩어져 탈출한다. 신정부군 사상자 100명, 구막부군 전사자 260명.

창의대 일부는 북방으로 탈주하여 동북전쟁에서 저항하고,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따라 하코다테 전쟁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에노 전쟁의 결과 신정부군은 에도 서부를 장악하고, 대내외적으로 막부 잔당도 신정부군 앞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각인시킴으로써 당초 예정했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2.6 우쓰노미야성 공방전

에도성은 개성하였으나 구 막부군 잔당세력은 도쿠가와가의 성지인 닛코도쇼구에 모여 거기서 신정부군과 싸울 생각으로 대량으로 에도를 탈주, 시모노노쿠니 닛코야마를 향하고 있었다. 한편 시모노노쿠니에서 발생한 농민반란(요나오시 잇키)을 진압하기 위해 토잔도총감부가 시모노노쿠니 우쓰노미야성에 진무대를 파견하였다. 이들은 신선조 잔당이 있는 곳을 알아내고 곤도 이사미를 체포, 처형시켰으며 계속해서 북상하여 우쓰노미야성에 진주하였다. 마침 농민반란이 진압된 4월 12일에는 막부육군총재 오토리 게이스케가 신선조, 전습대, 막부육군 등의 잔당 2000여 명을 이끌고 출발, 2개파로 갈라져 진무군이 진주한 우쓰노미야성 공격을 개시했다. 진무군측은 막부잔당의 공격 소식을 듣고 코야마로 진출하였으나 병력에서 밀리는 진무군이 패배, 막부 잔당은 여세를 몰아 4월 19일 우쓰노미야성 공략전에 돌입하여 대규모의 백병전 끝에 우쓰노미야성 탈환에 성공한다. 그러나 일시 물러난 토잔도총감부 병력이 신정부군과 합류하여 오야마 이와오, 이치지 마사지가 통솔하는 신정부군과의 전투에서 막부 잔당이 밀리자 원래 목적지인 닛코도소구로 탈출하였다.

3 2기 동북전쟁 - 정토군 북상

도쿠가와 막부가 항복하고 소멸하면서, 동북의 제번들이 전쟁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게다가 지속적인 흉작 때문에 재정이 궁핍하고 백성들의 염전사상이 점차 강화되고 있어, 각 번들은 가능하면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따라서 동북의 여러 번들은 전쟁을 회피하고,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1868년 4월 11일에 리쿠젠(陸前) 시로이시(白石)에서 동북번들이 모인 회의가 개최된다. 일단 역적으로 규정된 친막부 측 번인 쇼나이 번과 아이즈 번의 구명을 해주자는 데에 의견이 모아지면서 조정에 탄원서를 보내지만, 탄원서를 접수한 오우진무총감부 참모인 세라 쇼조가 아이즈 침공작전을 철회할 수 없다고 강짜를 부려댔다. 이것은 평화적 해결을 거부하고 힘에 의거한 강압을 내세우는 것과 다름없었고, 불만을 가진 센다이번사를 비롯한 무사들이 세라 암살사건을 일으키면서 평화적 해결은 물건너가게 된다.

전쟁이 명확해지고 또 신정부 측의 강짜에 큰 불만을 가진 제번들이 연합하면서 평화회담을 위한 열번회의는 군사상호원조동맹으로 변경되며, 이렇게 출범한 군사 동맹을 오우에쓰열번동맹(奥羽越列藩同盟)으로 부르게 된다. 한편 에도를 탈출한 오토리 게이스케가 이끄는 막부군 잔당, 뿔뿔이 흩어져 북상한 창의대와 신선조를 비롯한 각 부대의 잔당들이 아이즈 번에 합류, 막부 측 군사고문이었던 프랑스 장교단이 열번동맹의 군사고문으로 취임하는 등, 오우에쓰열번동맹은 신정부와의 일전을 대비할 준비를 갖춰놓고 있었다.

3.1 아사히야마 공방전

3.2 나가오카성 공방전

3.3 아이즈번 방어전

3.4 제2차 시라카와구치 공방전

3.5 보나리 고개 전투

나가오카성 함락 이후 지체하던 신정부군은 지원병력이 합류하면서 오우에쓰 동맹군의 해체를 시도한다. 가장 강력한 아이즈번을 제외한 다른 군소 번들의 영지로 파죽지세로 진격하면서 처음부터 굳건하지 않았던 열번동맹은 차례차례 해체, 무익한 저항을 하다 파멸하는 곳도 있었지만 바로 항복하고 신정부에 붙어버리는 번이 훨씬 많았다. 오우에쓰 동맹이 사실상 해체되자 신정부군은 최대의 적인 아이즈번 공격을 결행한다.

이에 아이즈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는 아이즈로 통하는 험준한 통로인 보나리(母成) 고개에 대한 방어를 막부육군 전습대 대장인 오토리 게이스케에게 의뢰한다. 오오토리는 자신의 직속인 전습대 병력 400명과 그외 1,000여 명을 지원받고 보나리 고개에 3개의 방어진지를 설치한다. 평탄한 입구에 설치된 제1포대(第一臺場), 그리고 험준한 산에 길을 따라 설치된 제2, 제3포대를 통해 적의 진격을 차례로 방어하고, 첫째 진지가 함락되어도 다른 진지들이 방어를 수행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오토리의 방어계획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적 진출을 경보해야할 제1포대는 너무나도 짙은 안개 때문에 적의 접근을 아주 늦게 눈치채게 되고, 숫자에서 밀린 제1포대는 곧 함락된다. 제2포대도 이치지 마사지가 이끄는 우회병력이 산을 돌파하여 돌진해오는 것에 더해, 신정부군의 강력한 포병화력 앞에 결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배, 패잔병들이 도주하는 가운데 제3포대도 곧 함락되었다. 신정부군의 골칫거리였던 막부 전습대는 이 전투에서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보나리 고개 함락으로 인해 아이즈 방어선은 뻥 뚫리게 된다. 오토리는 결국 도주하여 에노모토 함대에 합류하게 되고, 전습대도 그와 함께 홋카이도로 떠나게 된다.

3.6 아이즈 공성전

4 3기 하코다테 전쟁(箱館戦争)[13] - 에조 공화국 항복

막부해군 총재인 카츠 카이슈는 무혈개성의 주역이었지만 부총재인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당시는 에노모토 가마지로)는 무혈개성에 항의하며 철저항전을 주장했다. 에노모토는 막부 해군함대를 선동하여 카츠의 통제에서 벗어난 다음 동북전쟁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합류하지 않고 도쿠가와 요시노부에 대한 신정부의 취급이 부당할 경우 즉시 무력을 투사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여 에도만에 정박하고 있었다.

마침내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스루가 번 다이묘로 임명되어 신변의 보장을 받자 에노모토는 주군에 대한 의리를 다했다고 여기고 잔당 함대를 이끌고 에조, 현재의 홋카이도로 북상한다. 신정부 치하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이 뻔한 구 막부 가신들을 데리고 에조 개척을 하며 독립정권을 세운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었다. 막부 해군은 삿초토비 유신 4번이 연합해도 당해낼 수 없는 명실공히 일본 최대의 서양식 전투함대였기 때문에 유신 측으로서도 에노모토의 행동을 막을 요량이 없었다.

에노모토는 북상 도중 센다이에 들러 오토리 게이스케와 히지카타 토시조를 비롯한 막부 측 간부들과 전습대, 창의대, 신센구미, 아이즈 번병, 나가오카 번병 등 잔당 3,000여 명을 태우고 홋카이도로 향한다. 에노모토는 에조 제압의 1차전으로 에조를 통제하는 마쓰마에 번을 공격하여 제압하는 작전에 돌입한다.

4.1 마쓰마에 공략전

4.2 미야코만 해전

4.3 에조 공화국 멸망

5 이야깃거리

무진전쟁에서 일본이 입은 피해는 단순히 내전 수준이라 할 수 없을 정도의 막심한 피해였고 특히 토호쿠 지방의 피해는 다이쇼 시대에 가서야 겨우 복구되는 수준이었다.

막부 측 인사 대부분은 신정부에 정면으로 반역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력이나 재량을 인정받아 신정부에서 일했고, 그중 일부는 높은 지위까지 오르게 된다. 막부해군 부총재이자 에조 공화국 총재였던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외교계의 원로로써 중용되고, 막부육군 총재이자 최후까지 반항한 오토리 게이스케청일전쟁당시 조선공사로 부임하기도 했다. 또 에조 공화국 인사들 중에는 일본 황족의 교육기관인 학습원 원장으로 부임한 사람도 있었고, 대부분은 에조 개척사, 즉 북해도의 불모지를 개척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이들을 특별히 옹호하고 일자리를 마련해 준 사람이 에조 공화국 토벌의 주역인 구로다 기요타카로, 그는 에조 개척사의 수장으로도 있었고 막부 측 인사들의 대부 역할을 했다. 그가 죽었을 때에 장례위원장으로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나섰을 정도.

막부 측 인사와는 달리 동북제번은 신정부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반항의 주역이었던 아이즈 번은 영지를 몰수당하고 동북 끝의 오지로 번사와 그 가족들이 대부분 추방당해 아사자가 속출하는 고난을 겪다 겨우 귀환하게 된다. 아이즈 번의 용사인 사가와 간베에나 사이토 하지메 등의 아이즈 번사들은 도쿄로 이주하여 경찰직을 얻어 겨우 생계를 트게 된다. 이들은 훗날 서남전쟁에 참여하여 무진전쟁의 원한을 갚게 된다.

신정부군의 주역인 사쓰마와 조슈는 영국식으로 근대화를 했지만, 당시 유럽에서 최고의 육군국이 프랑스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막부의 장비들을 이어받아 표준으로 삼게 된다. 그러나 각 번들마다 따로따로 근대화를 했고 장비들도 상당해서, 1880년 이전까지의 일본군은 장비의 난맥이 상당히 심했다.

일본 최대의 해군은 막부해군이었기 때문에 함선이나 제복 등은 막부해군의 그것을 이어받았다. 일본 해군의 전신이 막부해군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일본의 국기가 된 흰 바탕에 붉은 원이 칠해진 일장기는 원래 막부에서 쓰던 국기였다. 한편 사쓰마 번측은 덴노의 상징인, 국화 깃발을 들고 전쟁에 참가했다고 한다. 막부는 이를 보고 극심한 디버프를 받았다.

전쟁이 터지기 100년도 더 전에, 바다 건너 조선의 한 예언가유학자가 이 전쟁, 심지어는 신정부군의 승리까지도 예언해낸 바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익 참고.

6 매체물에서의 무진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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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패니즈고 뭐고 개틀링에 신명나게 털려나가는 사무라이들이 인상적인 트레일러 영상을 선보였다.

이 확장판은 일본 개화기 당시의 각종 유닛이 추가되었으며 캠페인은 1860년대 후반부터 1870년 초반부까지를 다루고있다. 역사적 전투로 무진 전쟁의 주요 전투가 등장하는데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인공 격으로 등장한다. 대체로 매우 열세인 신정부군으로 숫적으로 매우 우세한 막부파 군대를 격파해야하는 게 특징이다.
  • 일본영화 황혼의 사무라이에서 주인공이 결투에서 살아남아 두 딸들과 연인의 품으로 돌아오지만, 무진 전쟁에서 막부파에서 싸우다가 메이지 정부군의 총에 맞아 전사한다.
  • 바람의 검심의 주인공 히무라 켄신이 무진전쟁 초반의 도바-후시미 전투까지 유격검사로 참전하였다고 나온다. 라이벌 캐릭터인 사이토 하지메 역시 이름과 모티브를 따온 실존인물과 마찬가지로 신센구미의 일원으로서 이 전쟁에 참전했다.
  1. 일본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고 덴노를 수호하며 외적을 배척해야 한다는 경향을 가진 학문.
  2. 사실 8월 18일의 정변을 일으킨 진짜 흑막은 당시 덴노인 고메이 덴노였다. 양이론자였지만 덴노 자신은 좌막론자. 애당초 마츠다이라 가타모리나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었다. 하지만 쿠게들은 자신들과 같은 양이론자라는 것만 보고 좌막론자인 것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덴노가 직접 영국, 미국과 전쟁태평양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반발한 덴노는 같은 좌막론자인 나카노미냐 아사히코 친왕을 시켜 8월 18일 정변을 일으킨 것.
  3. 말타는 기(騎)병이 아니라, 당시 일본의 정서를 혁파하고 농민들까지 입대를 가능케 한 혁신적인 군대였다.
  4. 이와 동시에 막부는 자동적으로 소멸. 이후 막부 측을 호칭할 때에는 구 막부라고 부르게 된다.
  5. 네덜란드 군사교범에 의거하여 1862년 개혁된 군대였다. 보병,포병으로 구성되었고 미니에식 전장식소총을 장비하여 근대적 군대로 탈바꿈하였다. 막부육군 참고.
  6. 18~19세기 내내 영국은 제자리에서 초고속 장전사격을 반복하는 물량&화력 방어전법으로 유명했으며, 워털루 전투 당시 프랑스군이 영국의 화망에 걸려들어 궤멸하는 등 위력이 대단했다. 그에 비해 프랑스군은 종대로 사격을 가하고 돌격하는 전법을 주로 사용해서 양측의 특징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프랑스 장교들의 훈련을 받은 막부 측 프랑스식 전습대(佛式傳習隊)는 일사불란한 프랑스식 돌격전법을 아주 잘 사용해서 신정부 측도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7. 시내의 치안과 재판을 책임지는 관청
  8. 전투가 벌어진 가쓰누마 지역의 이름을 따서 고슈 가쓰누마 전투라고도 부른다
  9. 진무(鎮撫)란 시위진압을 의미하는 단어로, 당시 난무하던 에자나이카(좋지않은가)라는 대규모 군중 소요사태가 각지에서 빈발하고 있었으므로 이걸 진압한다는 구실로 편제해서 내보낸 것이었다.
  10. 카츠 카이슈는 창의대 지휘역이었던 야마오카 텟슈를 파견했지만 배신자라는 고성만 듣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1. 시부사와 세이이치로는 요시노부가 에도를 떠난 만큼 그 호위를 명분으로 하는 창의대도 에도를 떠나 닛코도쇼구 방면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부장인 아마노 하치로는 철저항전을 주장하면서 분열이 발생했다.
  12. 이 사람은 나중에 진무대(振武隊)를 결성하여 신정부군과 재차 대립하지만 패하고 결국 에노모토 함대에 합류하여 에조 공화국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소창의대를 만들어 두령에 취임했지만 하코다테 전쟁에 패하면서 항복한다.
  13. 하코다테 시의 옛 지명. '箱(상)'에서 '函(함)'이라는 한자로 바뀜! 참고로 はこ(하코)는 상자라는 일본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