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전투

Dry Battle Battle of Marne

1 개요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마른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대전투.

2 제1차 마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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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로부터 빨강이 독일의 우익인 육군 1군(클루크), 2군(뷜로프), 그리고 파랑이 프랑스 육군 6군, 영국 원정군, 프랑스 육군 5군이다. 1, 2군간의 연결이 끊기고 1군의 우측 측면이 6군에게 위협받자 점선 지역으로 전선을 물렸다. >

제1차 세계대전 초반인 1914년 9월 6일~9월 10일에 난, 추후 대전의 판도를 결정한 대전투. 사실 전투 자체보다는 전투하기까지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

제1차 세계대전 초반은 독일프랑스 양대 국가의 초기 전쟁계획에 기반해 돌아갔다. 독일의 슐리펜 계획은 우익에 주력을 집중해 벨기에를 지나 프랑스 육군을 대포위해 섬멸시키겠다는 계획이었고, 프랑스의 '제17계획'은 보불전쟁 당시 잃은 알자스-로렌 지방 회복을 위해 마찬가지로 우익에 병력을 모아 알자스-로렌 지방을 되찾는다는 계획이었다.

막상 전쟁을 시작하니 프랑스의 제17계획은 루프레흐트 바이에른 왕세자의 독일 육군 제6군에 막혀서 진격이 지지부진했고, 독일 우익의 육군 제1, 2군은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를 지나면서 쾌진격을 거듭한다. 그러나 전쟁 초반, 독일 육군의 우익은 절대 주력이 아니라는 기대심리에 사로잡히던 프랑스 및 영국 원정군 지휘부가 현실을 직시해 우익에서 좌익으로 미친 듯이 병력을 전용하고 예비군을 편성했으며, 반면 독일은 계획상 7:1이었던 우익:좌익 병력비가 3:1까지 약화하면서 1, 2군의 공세탄력이 둔화했다. 때마침 독일군 좌익의 제6군이 초기 방어전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면서 독일 육군 총참모부는 단익포위에서 제6군의 돌파에 따른 양익포위를 동시에 노리고, 동시에 동프러시아의 위기 때문에 상당병력을 동부전선으로 차출하면서 우익의 공세탄력은 더욱 둔화했다.

이 때 독일 육군 제1군은 기동 중 접전 뒤 승리를 거뒀던 프랑스 육군 제5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예정됐던 파리 포위기동을 포기하고 파리 북동부로 기동코스를 변경한다. 이 때 독일 육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와 달리 군과 참모부 사이에 집단군급 지휘부가 없어서 제1야전군사령관인 클루크 장군이 독단적으로 이 결정을 내렸다.

이 때문에 패전했지만 붕괴되지 않은 프랑스 제5군과 신편 프랑스 제6군, 영국 원정군은 독일 제1군의 측면을 잡았고 이에 독일 제1군과 제2군은 상호간 간격이 50km까지 벌어지며 큰 위기에 빠진다. 독일군은 곧 혼란을 수습하고 격렬하게 전투를 벌였으나, 3면에서 공격받는 상황이라 어느 한 쪽에 반격을 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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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광장에 집결하는 택시와 병력을 수송하는 택시들 >

그나마 독일군이 연합군을 돌파할 여지가 가장 많았던 전면(프랑스 제6군)은 파리에서 택시 부대가 끌고 오는 신병까지 받으면서 온 힘을 다해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했다.[1]

한편 독일 육군 참모부는 참모장교 헨취 중령에게 참모총장 전권을 위임해 전선시찰에 나섰는데, 헨취 중령은 전선을 시찰한 뒤 육군 제1군~제2군 간의 간격을 우려, 전선을 뒤로 물러 엔 강 북안에서 전선을 정리시켰다.[2]

마른 강에서 마른 수건 쥐어짜듯이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노도와 같이 밀려오던 독일군을 방어하는데 성공한 프랑스는 이 전투를 마른의 기적이라고 칭송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 단기결전을 노린 슐리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각자 측면을 치기 위해 독일군과 연합군 판 바다로의 행진[3], 즉 참호전을 시작한다. 이 때 독일 육군은 프랑스의 점령지 일부를 뱉어냈지만 미처 못 점령하던 벨기에의 영토 대부분을 흡수하여 악명 높은 예페르(Ieper = 이프르)전선을 세웠고, 여전히 파리에서 100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누아용을 최전선으로 삼아 상대적으로 유리한 전선을 만들었다.[4] 그러나 이 전투로 서부전선에서 독일의 조기 승전 가능성은 완전히 끝장나고, 그렇게 두려워하던 양면전쟁 장기전에 끌려들어가게 된다.

3 제2차 마른 전투

2년 뒤의 베르됭 전투로 독일군이 패전을 피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끝내 1차 마른 전투에서 4년 뒤,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전투가 났다.

1918년 독일의 패배가 거의 기정사실화하자 에리히 루덴도르프 육군원수가 이끄는 독일군은 마지막 도박으로 동원할 만한 대부분의 병력으로 전선을 돌파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페르디낭 포슈 육군원수가 세운 랭스의 방어진이 너무 튼튼했고 독일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전쟁 도중 연합군으로 전향한 이탈리아군 육군 병력이 에피르네로 가는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또한 미군이 육군과 해병대를 파병해 반격에 나서면서 마른 강을 건너 고작 10km를 전진한 독일 육군은 다시 엔벨 요새로 물러난다.[5] 연합군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으나 엔벨 요새의 방어가 튼튼해서, 끝내 연합군도 돌파는 못하고 다시 돌아와야 했다.

이 전투의 패배로 독일군은 대부분의 물자와 병력을 잃어 서부전선의 공세는 불가능했고, 사실상 전쟁 자체도 패배한 것과 같았다. 끝내 독일군은 1918년 11월 혁명으로 연합군에 항복한다.
  1. 택시뿐만 아니라 우유배달차, 자전거, 트럭, 자가용 등등 하여튼 바퀴가 달려서 빠르게 갈 수단이라면 다 동원했다! 이렇게 빨리 채운 팔팔한 전력들은 잇달아 야간공격을 펼쳐, 프랑스 육군의 근성이 넘치는 저항에 지친 독일 육군이 그사이 먹었던 땅을 다 뱉어내게 만들었다. 이는 발리언트 하츠 : 더 그레이트 워에서 간접적으로 체험(?) 해볼 수 있다.
  2. 이토록 중요한 결정을 중~대장급 장군들에게 중령이 사실상 명령했다는 사실이 군필자들에겐 잘 이해가 안 갈 텐데, 독일 육군이 유달리 참모의 힘이 강했던데다 선술했듯 육군참모총장에게 전권을 위임받았기에 가능했다. 이는 다른 국가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데, 특정 단위 부대의 참모 장교는 대개 자신이 속한 부대의 예하부대장들보다 계급이 낮지만, 공문 발송시 등엔 자신의 지휘관의 이름을 빌려 "명령문" 형식으로 하여 사실상 자신의 상급자에게 지시를 내릴 수도 있다. 비슷한 시기 동부전선의 탄넨베르크 전투에서도 영관급 참모장교이던 호프만 육군 중령이 작전을 짜서 러시아 육군을 물리쳤다.
  3. 물론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을 재현하기에는 둘 다 성과가 그닥이었지만.
  4. 서울특별시-대전광역시 거리가 160km.. 100km면 수령님의 인민군이라면 3일 만에 주파할 거리이고, 신성모의 군대가 반나절만에 갈 거리
  5. 미 육군 제2보병사단歌에도 이를 말한 가사가 있고, 여기에 참가한 미 육군 제3보병사단은 "마른 디비전(Marne Division)"이라는 별명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