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자이 어택

(반자이 돌격에서 넘어옴)

영어 : Banzai attack, Banzai Char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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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빨간 타원 안에 해당하는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

1 개요

기관총 밥먹여주기작전 Dumb Ways to Die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남발했던 일종의 자살 놀이공격을 비꼬는 말이다. 일본군이 '텐노 헤이카 반자이!(天皇陛下万歳! - 천황 폐하 만세!)' 하며 총검 돌격한 데서 온 듯하다. 대한민국에서는 반자이 어택이라고도 하고, '반자이 돌격'으로도 부른다. 원래는 텐노(일왕) 헤이카(폐하) 반자이(만세)라는 뜻으로 서양권의 'Long Live The King/Queen(국왕/여왕 폐하 만세)'과 같은 말이다.

'텐노 헤이카 반자이!(天皇陛下万歳! - 천황 폐하 만세!)'라는 구호는 일본군 수뇌부가 부족한 화력과 보급을 총검 돌격으로 메꾸기 위해 강구(...) 해낸 방법으로 병사들에게 천황에 대한 광신적인 충성으로 두려움을 없애서 빠르게 적진으로 돌격하기 위해 만들었다.

같은 뜻이지만 다른 전선에서 쓴 요점은 비슷하지만 작전 수행 과정 및 결과는 전혀 다른 전술우라돌격이 있다. 참고로 둘 다 만세(반자이/우라)를 뜻한다.

허나 둘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우라돌격은 화력지원을 동반하며, 러시아의 제파식 전술의 일환으로 반자이 어택처럼 단발로 끝나는 게 아니라 병력을 안전하게 끌어올 경로를 확보하고 연속적으로 공격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2 대체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 정신나간 발상을 하셨어요?

총알이 없어도, 무기가 없어도 기합을 넣고 돌격하면 어떻게든 된다! 라는 게 사령부의 판단이었지만 그건 무리였지요.

- 임팔 작전에 참가한 한 일본군 참모.

일본군은 총검술에 있어서는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자신감에 차있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베르됭 전투에서 처럼요.

결과도 베르됭 전투와 같았습니다. 대학살이었죠. 일본 병사들은 테나루강 전투에서 몰살됐습니다.
- NGC 2차 세계대전 4부 전쟁의 절정 中

반자이 어택 자체에 대해 논하기 전에 전통적인 칼 들고 돌격에 대해 알아보자. 일단 돌격은 엄연히 전술 중의 하나이다. 투사무기에 더 큰 타격을 입기 전에 빠르게 적에게 접근한다는 발상은 충분히 유효하다.[1] 당시의 투사무기는 연사력이 좋지 않아 빠르게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받는 피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속도에서 나오는 충격력까지 더해지니 금상첨화.[2] 냉병기 시절에 빠르게 움직여 공격하는 전술은 그 효과가 컸고, 총이 개발되고 나서도 한동안은 유효했다. 총의 성능이 나빴기 때문. 전쟁사에서 기병이 얼마나 크게 활약한 병과인지 생각해보자.

총검이 처음 개발된 시기는 머스켓이 주무기였던 전열보병시대다. 머스켓은 연사력이 크게 떨어져서 현대의 전투와는 다르게 백병전이 수시로 발생했는데 이 때 백병전을 보강하기 위해 총검을 만들었다. 즉 여전히 백병전이 빈번했던 시기에는 돌격할 수 있는 기병이 매우 강한 전력으로 활약했다.

이후 총기는 전장식과 수동 장전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량이 거듭되었고, 결국 전투 내내 화력을 유지하는 무기가 되었다. 따라서 1명이 상대할 수 있는 적군의 수가 늘어났고 기관총이 나오기 이전에도 이미 후장식 소총으로 병력이 비슷하다면 돌격해오는 적을 모조리 쏴죽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때문에 돌격의 유효성은 크게 줄었다. 상대는 멀리서 여러명을 공격할 수 있는데 대놓고 모습을 보인 채로 달려간다니 얼마나 불리한 행동인가. 기관총이 나온 다음에는 단순한 돌격 전술은 거의 사장되다시피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인 솜 전투 당시 독일군은 기관총 소대 둘이 십자포화를 퍼부어서 영국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11km를 전진할 수 있었지만 60만 명 이상이 죽고 다쳤으며 막던 독일군도 40여 만 이상 죽고 다쳤다. 하지만 아군이 기관총 앞에 허무하게 쓰러지는 뼈아픈 교훈을 얻은 뒤로는 총검 돌격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대신 벌어진 게 참호전.

그렇다면 반자이 어택과 비슷하다고들 하는 우라돌격은 어떤가?

우라돌격은 엄연히 화력지원과 함께하는, 치밀하게 설계된 전술이며, 보병중대마다 우라돌격을 지원하기 위해 PPSh-41으로만 무장한 기관단총 소대가 따로 존재할 정도였다. 작전 수행 이전에 적에게 역정보를 잔뜩 흘린 후, 완벽한 무전침묵속에 달빛도 없는 깜깜한 밤날을 골라 숙련병들을 동원해 용히 철조망, 지뢰 등의 장애물들을 치운 후, 빠른 발사 속도와 71발에 달하는 탄창으로 적의 주요 화기진지들을 급습해 무력화 한 뒤[3] 아픈곳만 골라 무지막지하게 기계화 병력들로 파고드는 소련의 우라돌격은 독일군에게 극심한 피해를 입혔다. 당연히 반자이 어택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병과 간 연계와 화력지원도 충실해서 포병, 기병, 기갑, 공군 중에서 대전 초기 급박한 상황에서도 하나 이상의 병과가 반드시 우라돌격을 지원했다. 심지어 극한의 사정이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에도 화력지원은 확실해 독일군에게 일부 지역을 점령당하면 그냥 카츄샤로 로켓비를 내려주었다. 그래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다룬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 우라돌격을 반자이 어택처럼 묘사하자 러시아 참전용사들이 "야, 암만 그래도 그렇지 저게뭐냐? 죽으러 가는거냐? 우리도 사람인데 공군이고 포병이고 전차고 부를 수 있는건 모조리 불러다가 싸웠지 맨몸으로 어떻게 기관총앞에 뛰어드냐?" 라며 격분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군은 진짜로 그렇게 공격했다!

이러한 무기가 나오기 전인 전열보병 시대에도 기병전투나 함상전투 등에서는 권총이 있다면 그것부터 쏘고 냉병기를 쓰거나 쓴 권총을 휘두르거나 해서 적 섬멸을 위해 뭐든 하는 유연한 방식으로 백병전을 펼쳤다. 이 시절에도 근접 화력 확보를 위해 권총을 여러 자루 들고 다니거나 페퍼박스 리볼버덕 풋 피스톨 같은 다발 화기도 운용했다.

그런데 러일전쟁 때까지, 최소한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의 일본군오히려 원거리 화력에 의존하는 화력덕후 기질이 강했다. 개항 초기 일본독일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 과정에서 "보병은 화력으로 결전한다."라는 당시 독일군 교리를 적극적으로 채용했다.

보신전쟁 당시, 구 일본군의 전신이었던 신정부군이 수적으로 열세였던 상황에서 막부군발도 돌격후장식 소총암스트롱포의 화력으로 격퇴한 사례가 많았고 이는 이후 공식적으로 창설된 일본 육군의 성향에 큰 영향을 줬다. 문제가 시작된건 서남 전쟁 때였는데 원거리 화력에서는 정부군이 우세했으나 [4] 막상 사쓰마 군이 발도 돌격을 걸어오면 오히려 정부군이 패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원인은 주로 2가지였는데, 하나는 간략하게 프랑스식 검술을 배운 상비군이 일본식 검술의 달인들이었던 사쓰마 무사들에게 근접전 능력으로 밀릴 수밖에 없고,[5] 게다가 상비군이던 정부군이 사쓰마군보다 사기 및 전의가 모자랐던 것도 한몫했다. 이에 정부군은 서남 전쟁 중 검술이 뛰어난 자들을 모아 발도대를 창설하는 등 부족한 근접전 능력을 극복하려 들었고, 전후에도 상비군에게 일본식 검술을 가르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평생 걸려서 배우는 일본식 검술을 군 복무 기간안에는 못 익힐게 뻔하니 기각시켰고, 대신에 고질적인 사기 부족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훈련과정에서 정신교육을 중시하고 덴노를 일본제국 육군, 해군의 대원수로 앉혀 군의 사기 고양을 도모했다. 사실, 이런 경향은 군대 구조를 징병제 바탕의 상비군 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한 근대 서양 열강들도 비슷했다.[6] 그래도 이때까지는 독일식 화력주의를 채택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러나 보급선상에서 근본적인 국력문제로 패배직전에서 간신히 이긴(물론 아는 사람들만 아는)러일전쟁 이후, 일본군은 도저히 서구식 군사제도로는 미래전장에서 이기기가 힘든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 그 때 마침 열강인 프랑스에서 엘랑 비탈이나 청년학파 같은교리나 사상들이 있는 것을 본 일본은 거기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자신들의 교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청일전쟁러일전쟁의 승리 요인을 '정신력'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본격적으로 '무사도 정신'과 '군인정신'을 강조하며 이것이 하나의 종교교리가 된다. 이에 따라 탄생한 일본군 보병 교범인 <보병조전(步兵操典)>(1909)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최근의 전쟁(러일전쟁)에서 무형전력 즉 군인정신의 중요성이 입증되어 이로 적을 이기는 것을 증명되었다. 보병은 전투의 중심이며, 승리를 위해선 공격정신을 고취시켜야 한다. 이것의 결정체가 총검돌격이다. 사격만으로 적을 격퇴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며, 최후에는 역시 백병전이 벌어질 수 밖에 없다.[7] 사격은 백병전을 위해 적에게 접근하기 위한 수단이며, 특히 백병전은 일본 전통의 묘기(妙技)이다.

그리고 1차대전 이후 '과학의 진보와 변혁'이 전략전술에 일대변혁을 가져왔다고 보면서도, "제국의 장차작전을 예상해보면 최근의 유럽전역에서와 동일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유럽전역에서 실례에 나타난 무기의 위력을 과대평가하여 제국 고유의 공격정신에 결함을 발생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라는 평가[8] 를 내린다.또한 연합군의 프렌드 실드로 살아난 프랑스의 정신주의 군사교리들을 매우 높게 평가해서 그것들을 자국군에 집어 넣을려고 시도한다.

이와 함께 슐리펜 계획을 매우 높게 평가하면서, '섬멸전' 개념을 받아들인다.[9][10] 이것들이 기존 백병전 중시의 일본전 교리와 결합하면서 놀라운 '시너지(?)' 효과를 낸다.

이를 보자면...

  • '슐리펜식의 섬멸전', '포위섬멸', '기동전'[11]을 수용하고 이를 중요한 사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핵심을 '속전속결'에 둔다. 쉽게 말해서 '적보다 먼저, 적이 저항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강력한 한 방을 먹이면, 적이 항복하리라'는 것인데... 여기까진 정상적이지만, 이 '강력한 한 방'이 압도적인 화력이나 병력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 이와 함께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일본군의 강점인 '공격정신' 즉, "확고한 황군사상과 필승불패의 신념"이다. 그리고 군비경쟁에서 질 수 있지만, 정신력만큼은 결코 질 수 없다면서, 주변의 잠재적 적들(중국, 소련, 미국)은 일본보다 정신력이 '열등한 군대'라고 분석했다(...). 그래서 그 강력한 한 방은, 아군의 장점인 '정신력'을 극대화시키면서, 적의 약점인 '정신력'을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게 20~30년대를 지나면서 교리화되면서, 경직화된다.[12] 그렇게 1차대전에서도 먹히지 않을 전술을 태평양 전쟁까지 활용하게 되었다.

물론 일본군도 참호전의 참상을 보긴 했다. 당장 제1차 세계대전프랑스군엘랑 비탈로 대표되는 닥돌을 고수한 결과 엄청난 인명손실에 경악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프랑스 군인들은 140만명에 이른다. 게다가 이들은 당시 프랑스의 청년층(18~24세의 남성들)[13] 의 27%였다.[14]그래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그냥 갖다버렸다. 당연히 그 후폭풍도 만만치 않아서 전쟁 뒤에 프랑스가 다시 강대국 지위를 유지하는 데 엄청난 제약을 가져왔고, 이것은 2차대전 초기 독일의 위협적인 행보에 소극적으로 대처한 이유 중 하나가 됐다.[15] 그래서 일본군이 내린 결론은 '먼저 기습을 가해서, 참호전이 벌어지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단기결전사상이다. 사실 러일전쟁때부터 일본군은 기본적으로 '장기전'에 가면 국력이나 자원이 부족한 자국이 불리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전쟁을 끝내자고 생각했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실제로 그렇게 승리했다. 문제는 이 두 전쟁과는 규모가 완전히 다른 중일전쟁태평양 전쟁역시 그렇게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끝으로, 많은 일본인들이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다. 미국은 개인주의와 향락에 찌들은 나약한 자들이라고 말이다. 어처구니없는 착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인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자부심이 높다. 이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사실이다.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면, 미국은 지금껏 일본이 만난 적 중에서 가장 막강한 적이 될 것이다.

- 도라 도라 도라, 야마모토 이소로쿠.

무엇보다도 일본이 이런 전술을 다른 나라와의 싸움에서까지 써먹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정신력에서 일본인을 능가하는 민족은 없음!"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옥시덴탈리즘이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사실 적군을 깔보고 비웃는 것은 일종의 기싸움으로, 사기진작 차원에서 많은 군대가 애용하는 정신교육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기싸움에서 이기는 게 아니라, 아예 '정신력이야말로 승리를 얻기 위한 최고의 요소이며 야마토 민족의 정신력은 세계 최고이다! 따라서 겁쟁이 영미 귀축 따위는 문제 없다!'라는 생각을 교리로 박아버렸다.

그리하여 장교든 부사관이든 병사든 이런 교리가 철저하게 주입되었고, 그대로 경직화되면서 어떠한 비판도 수정도 가할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이는 정치적인 선전문구로도 표방되면서 민간인들 역시 이런 생각이 주입되었다.

천황 페하의 정강인 공모에 미 해군 따위가 감히 폭탄을 떨어트릴 수 있단 말인가? -우가키 마토메

미군이 우리 생각대로만 움직여줄 거라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거요! -나카무라 료조

이렇다 보니 일본군이 세운 '작전'이라는 게 '아군이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16] 게다가 그걸 사용해 본 결과 당연히 매번 환상이 와장창 깨졌지만, 이미 경직화되었기에 작전은 변화하지 않았다. 태평양전쟁 당시, 패전이 벌어지면 이에 대해 상급 지휘관들은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고 '필승불패의 정신력'이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하급 지휘관들에게 최소한의 명예라도 지키라며 배를 가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반복. 태평양 전쟁이 진행되면서 화력, 경제력 등에 있어서 압도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 확인되자, 오히려 이 사상이 더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즉, 화력과 경제력으로 이길 수 없으니, 정신력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당시 일본군의 정신상태는 정신력>무기라고 하여 정신력을 무기보다 위에 올려놓는 무기는 거들 뿐! 같은 어처구니 없는 자세가 된다.

주적인 미군도 유럽 전선에 배치되는 병력에는 정규 교범으로 독일군의 MG42와 미군의 브라우닝 기관총을 비교하며 "연사속도가 빨라서 무시무시한 총성이 들릴지 몰라도 브라우닝보단 집탄률이 낮습니다.", MP40톰슨 기관단총, M3 그리스 건에 비교하며 "비슷하지만, 우리 것이 더 정확합니다."라고 약간씩 조작된 평가를 보여주며[17] 결론으로 "그러니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분대장의 지시에 따르며 대응하십시오."라고 선전한다. 즉, 이런 교육의 목적은 신병들이 적군의 무기에 괜히 겁을 먹고 모랄빵이 나지 않도록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이었다. 대조적으로 일본군은 적들의 무기가 아무리 좋아봤자 정신이 썩어빠졌으니 야마토 민족에겐 절대로 이길 수 없다!라고 하며 얼토당토 않은 정신력 강조만 반복한다.

분명 초기에는 나름 성공적인 결과물을 도출해냈다. 가령, 만주 침략이나, 중일전쟁 초까지 기습공격과 정신력을 강조하는 돌격정신으로 연일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일본은 '병력'면에서 열세인 경우는 있었지만, '화력'이나 '경제력'[18] 면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에서도 진주만 공습, 남방작전 등에서 승기를 잡는 것처럼 보였고...초전의 승전으로 자신감을 얻은 일본군 군부는 이 교리에 대한 의심이나 이의를 허가하지 않게 된다.

결국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의 압도적인 쇼미더머니를 이겨내지 못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력을 강조하며, 정신으로 극복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대다가[19] 최후에는 '1억 총옥쇄'를 운운하며 식민지인과 민간인들에게까지 싸울 것을 강요하다가, 역사상 최초로 핵폭탄을 맞은 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여담으로 이 광경에 깊은 감명(?)을 받은 힘깨나 쓴다는 나라들핵만능주의에 빠졌다 카더라.

3 실전

따라서 일본군은 상대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청나라 군대건, 나라 분위기가 개판이던 러시아군이던, 나라 분위기가 영 뒤숭숭하던 소련군이던, 한눈팔고 있던 연합군이건, 정신차리고 이를 가는 연합군이건, 제대로 각잡힌 소련군이던, 허수아비 상태를 벗어난 중국군이던 간에 언제나 선빵을 갈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과도 이긴 것 치고는 어째 뒷맛이 찝찝한 경우도 있었다. 결국 태평양 전쟁이 중반에 접어들 때쯤이면 야음을 틈타서 공격을 했지만, 그건 낮에 막 돌격하다가 우월한 미국의 화력에 밀려 도무지 가망이 없어보이니까 야간작전에 매달린 것 뿐이다. 그러나 한밤중에 "와~ 천황폐하 만세~!" 하며 큰소리를 내며 접근했기에 오십보백보 수준. 게다가 이 때는 미군도 일본군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탓에 조명탄+기관총의 십자포화 등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스킬하나 없는 겐지가 류승룡기모찌를 시전하며 섬광있는 맥크리에게 덤벼든 셈이다.

3.1 성공한 경우

총검만 들고 돌격하면 중국군은 도망갑니다. 아니, 도망쳐준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도망가버리는 겁니다.

- NHK다큐멘터리 '적을 모르고 나를 모르고' ~과달카날 편 -

청일전쟁~중일전쟁 초기까지의 청나라 군대와 중국군에게는 이게 아주 잘 통했다. 아무나 용병으로 모아서 쓰던 청군도 일본군의 공격에 무참히 패배했는데 청조 붕괴 이후 상황이 더욱 막장으로 치달은 1930년대의 중국군은 일본군에게 더욱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당시의 중국군이란 것이 정규 군사교육을 통해 양성된 전문적 군인이 아니라 구식 총만 든 오합지졸이었고 장교들도 전체 중국군의 75%가 군사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니 나름대로 정규 군사교육을 받고 엄격한 규율을 유지한 일본군이 칼 들고 우와아아! 돌진하면 겁먹고 알아서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장작림(장쭤린)-장학량(장쉐량) 부자가 지배하던 만주의 경우에는 중국에서 가장 공업화가 잘 된 곳이었고 상태가 좀 멀쩡한 곳이었지만 일본군에게 전면전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장학량(장쉐량)의 소극적 대응 때문에 앉아서 망했고 이후 북평(베이핑) 지배자인 송철원(쑹저위안, 宋哲園)[20]을 비롯한 많은 군벌들이 이런 이기적이고 소극적 태도로 자멸했다. 그도 아니면 산동 군벌 한복구(한푸쥐, 韓復榘)나 광동 군벌 여한모(위한머우, 余漢謀)처럼 싸우지도 않고 달아나거나 염석산(옌시산, 閻錫山) 처럼 자기 영지에 틀어박혀서 단독 협상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허수아비같은 적을 상대로 계속 이겨대던 일본군은 당연히 반자이 어택에 재미가 들려 청일전쟁 이후로 30년간 이 교리를 주구장창 써먹었다.

여하튼 덕분에 태평양 전쟁의 초기에는 본진에 신경쓰느라 '조그만 섬나라 황인종 따위'라는 마인드로 최소한의 장비만 갖췄을 만큼 준비가 부실했던 동남아시아의 미군 및 영연방 식민지군들을 쉽게 이기며 정신력으로 귀축영미를 처단하는 무적황군의 기분을 잠시나마 만끽했다. 그러니까 후방부대 상대로 정예부대를 투입해서 이겨놓고는 '오오 우리 진짜 좀 쩌는듯 ㅋ' 하며 정신승리를 한 셈.

아무튼 여기까지는 사기가 낮은 적군을 상대로 번득이는 총검은 그대로 적군에게 멘탈붕괴를 준다는 연구결과를 증명하는 사례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사기도 충천하고 보급도 잘 되고 훈련도 잘 받고 머릿수까지 많은 군대를 상대한 결과이다.

3.2 실패한 경우

앞서 말했듯이 중국군 상대로 반자이 어택이 잘 통하던 것도 중일전쟁 극초반까지고 당장 전선이 상하이로 확대되면서 얘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병신으로 매도되는 군벌군이지만 리쭝런, 바이충시 등 능력 괜찮은 군벌들이 지휘하던 군벌군은 우수한 전과를 자랑했고 일본의 오랜 침략과 만행으로 중국 전체도 반일감정으로 투철한 정신무장을 한 상태였다. 더욱이 총통각하가 애지중지 키운 독일식 사단의 전투력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 독일식 훈련을 받고 독일식 무기로 무장한 장제스 직속 독일식 4개 사단과 중앙군 30만명은 개인무장으론 오히려 일본군보다 나았다. 게다가 장제스는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등의 독일 고문들을 초빙하여 군대를 강화하려고 오랫동안 노력해왔고 일본군이 공격 대상으로 삼은 상하이는 그런 장제스의 노력의 결정체였다. 2차 상하이 사변에서 지뢰밭, 철조망, 토치카, 참호, 체코 기관총으로 촘촘히 무장된 우쑹 해안에 자신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일본도를 들고 상륙했던 일본군들은 삽시간에 90%이상의 피해를 입고 전멸해버렸고 일본군은 상하이로 이어지는 뻘밭들을 자신들의 피로 메워가면서 처절하게 전진해야 했다. 상하이 전투 자체는 중국군 중에 어느 누구도 80만 대군을 한꺼번에 지휘해본 적 없다는 지휘 능력의 부재로 인해 결국 일본군이 이기긴 했으나 일본군은 사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3차례나 증원군을 파병해야 했다. 흔히 손쉽게 함락됐다는 난징도 중국군은 처절히 저항하면서 일본군을 상대로 많은 피해를 입혔고 그때마다 전황을 뒤집어준 것은 반자이 어택이 아닌 일본군의 항공기, 군함, 독가스였다. 그럼에도 창사 공략전을 세차례나 실패했고 타이얼좡, 짜오양, 쉬저우에서는 중국군에게 참패하기도 했다. 중국 전선에서 반자이 어택은 무모한 일본군 지휘관들이 중국군이 미리 짜놓은 포위망에 스스로를 던져놓아 패배의 단초를 제공했을 뿐 승리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리고 '전쟁 준비를 제대로 하고' 역습한 연합군, 특히 미군과의 대결에서는 대부분 접근은커녕 적 보병 얼굴도 보기 전에 우세한 화력에 태반이 쓸려나가고, 그 다음에는 오히려 일본군멘탈붕괴하여 도망가서 어떻게 손써보지도 못하며 대부분 전멸했다.

그래도 가끔은 제한적으로 성과를 거둘 때는 있었다. 개전 초기 미군의 상식으로는 멀쩡 총기 과연 멀쩡했을까? 내버려두고 난데없이 "BANZAI!!!" 라 외치며 닥돌해서 벌이는 백병전은 상상도 못할 짓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어, 어 저새끼들 뭐야? 왜 저래? 지금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지? 난 뭘 해야 하지?"등의 반응을 보이며 패닉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일본군이 야간에 갑자기 반자이 돌격을 해오면 미군은 자신들의 상식으로 이해가 안되는 상황에 얼이 빠진 데다 시야도 확보하기 힘들어서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고. 그래도 일본군도 근대화한 군대인데 누가 총을 내버려두고 닥돌하는가(...) 게다가 아리사카같은 총기도 일본군에게 얼마든지 있었다. 일본군도 돌격하는 보병을 지원하기 위한 화기들이 존재했는데, 경기관총이나 보병포, 척탄통 등은 그 때를 위한 무기들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착검돌격이 중국 전선에서 잘 먹힌 가장 큰 원인은 다름아닌 교착화된 전선을 돌파할 수단이 충분했다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현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국이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이 적던 시기였으니만큼,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에 비해서 무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중국군과의 교전에서 고전하게 되면 그 즉시 독가스를 활용한 화학 공격을 개시하거나 기갑장비를 동원했다. 1차대전 이후로 화학탄 사용이 금기시되었고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보복이 두려워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중국의 경우 일본이 아무리 화학 공격을 해대도 자체적으로 화학탄을 활용한 반격을 할 능력이 없었다. 방독면이 주어져서 그나마 독가스 공격에 버틸 수라도 있으면 모를까, 소총도 딸랑딸랑하는 상황에서 그건 불가능했다.

여기에 대전차전 능력도 매우 부실했으므로, 일본군이 2~30년대 기준으로 제작한 기갑장비로도 전선 돌파가 충분히 가능했다. 이 때문에 돌격시 보병을 지원해야 할 기갑부대 역시 이 시대 수준에서 끝나버렸다. 이것이 훗날 일본군이 진짜 강력한 상대와 교전시 교환비가 커지는 원인이 된다. 소련이나 독일 등 타 국가들은 돌격시 기관총이나 화포를 활용한 지원도 지원이지만 진짜 전선 돌파용 무기인 기갑장비가 충실했던 반면, 일본은 중국에서나 충실한 장비가 주어진 상태였다. 여기에 정신력 교리까지 합쳐져서 그야말로 자살이나 다름없는 짓이 되어 버린 것.

즉 일본군은 전선 돌파용으로 독가스와 기갑장비를 사용했지만 독가스의 경우 미국은 충분히 화학전을 벌일 능력이 되므로 서로에게 지옥이 되는 상황이 벌어질 게 뻔했기 때문에 대미전에서는 사용하지 못했고, 기갑장비의 경우 현실에 안주하느라 2~30년대 수준에서 멈춰버렸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게 그냥 알보병의 돌격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화포와 기관총을 이용해서 제압하자니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화포나 기관총은 어느 나라나 있었지만 결국 전선 돌파용으로 전차가 만들어졌듯이 총포만으로 진지를 구축한 적을 격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거기다가 백병전 상황을 굳이 강요하려면 소총보다는 기관단총이나 산탄총 등 근접전에서 유용한 무기를 잘 활용해서 피해나마 최대한 더 늘리려는 시도가 있어야 하는데, 일본군은 그런 노력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건 일본군이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이 핀란드군의 수오미에 당했던 것처럼 근접전에서 피본 상황을 겪은 적도 별로 없고, 1차대전 당시 참호전을 직접적으로 겪거나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칭다오 공략전의 경우 사실상 완전한 화력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톰슨 기관단총, M1911, 산탄총 등 근접전에서 아주 유용한 무기들을 훌륭하게 써먹은 미군과의 전투에서 환상적으로 박살나면서 일본군도 정신을 차리기 시작해서 대전 후반쯤 가면 100식 기관단총을 보급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것도 공정부대나 해군 육전대 등, 특정 부대 한정이라는 게 대다수였다는 것. 남방작전 당시의 일본군의 기관단총 부족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일본군은 인도네시아의 팔렘방 유전을 방어하는 네덜란드군을 공략하기 위해서 공수작전을 펼쳤는데, 100식 기관단총의 보급이 딸리는 관계로 팔렘방 전투 이전에 격파한 연합군에게서 노획한 톰슨 기관단총을 지급하거나, 심지어는 권총 한 자루(....) 주는 경우가 있을 정도다. 당시 네덜란드군의 무장 상태가 영 좋지 않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공수작전 자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중 공수부대가 들이닥쳤기 때문에 성과는 분명 거뒀지만, 일본군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어떻게든 그나마 미군에게 피해를 준 대전 말기 반자이 돌격을 굳이 찾아보자면, 사이판 전투의 1944년 7월 6일에 벌어졌던 습격(The Raid)를 찾을 수 있다. 당시 3000여명 가량의 대규모 일본군 부대가 최후의 옥쇄 돌격을 시행했고, 미군의 허술했던 방어와 경계를 뚫고 나름대로 미군에게 꽤 큰 피해를 입혔었다. 영상에서는 날이 밝았을 때 옥쇄 돌격을 한 걸로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새벽에 습격이 벌어졌다. 다만 이 그나마 성공한 습격에서도 일본군은 3000명 전원이 사망한 반면 미군의 사망자는 500명 가량으로 교환비는 6:1... 다만 3000여명의 일본군에 맞선 것이 미군 2~3개 대대 뿐이였던 데다가 영상에서도 체험할 수 있듯 해파리 떼마냥 몰려오는 일본군의 돌격에 당시 미군들의 심리적 충격이 엄청났다고. 당시 전투내용을 다룬 대사의 태평양전쟁사 포스팅

'성과가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이에 고무한 상부에서 더욱 권장했고, '성과가 없다' 면 '지난번엔 실패했으니 이번엔 애들이 바짝 정신차려서 제대로 하겠지'하는 마인드로 쓸데없이 이런 데에만 너그럽게 넘기며 또 돌격을 지시하는 패턴의 무한반복... 전쟁이 중후반으로 접어들면 일선 병사들은 보급이 모자랐고 영양상태도 아주 나빴는데, '이렇게 죽을 바에는 쟤랑 함께 죽자'(...)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일제히 '반자이!'를 외치며 기합을 넣고 총검, 군도를 앞세워 돌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이미 체력이 한계에 달하고 피로가 극에 달해 지친 상태였으니 백병전을 벌여도 체력, 체격, 완력면에서 훨씬 우월하고 충분한 수면과 휴식 및 영양분 섭취를 행해 스태미너를 적절한 상태로 유지한 미군을 쓰러뜨릴 수가 없었다. 여기에 일본군이 개머리판 치기도 없이 총검으로 찌르고 칼로 휘두르는 단순한 근대식 총검술으로 덤비면 미군은 권총, 산탄총, 기관단총, 화염방사기 등의 다양한 화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해가며 맞섰으며[21], 또한 남북전쟁을 통해 지독한 백병전을 하도 겪다 보니 잘 정립된 현대식 총검술과 나이프 파이팅은 물론이고 주먹질, 발길질, 레슬링에 '효율적인 싸움법'인 부랄 까기, 촛대 까기, 발등 내리찍기, 눈 후벼파기, 죽은 척 하다 뒷통수 치기 등등을 정식으로 교육했고, 또한 이에 대해 거부감을 느낄 병사들을 위해 가장 우수한 병사는 살아있는 병사임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 덤으로 깡다구 있는 대공황 세대라 기본적인 주먹질은 할 줄 알던 경우가 많아 가르친 걸 흡수도, 활용도 잘 했다. 이러니 일본군은 어떻게든 운 억세게 좋게 총알 한 발 안맞고 자기들이 상상했던 대로 맞붙어도 이지선다 뿐인 일본군은 다지선다로 솜씨좋게 덤벼오는 미군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당장 그 당시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보급 사정이 좋지 못했고 쪽수에서 압도하는 것도 아니었던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일본군의 방식과는 정 반대로 미군과의 정면승부를 극도로 피하고 게릴라전 위주로 전쟁을 주도해서 어떤 성과를 내었는지 생각해보자.[22]

따라서 일본군의 반자이 어택은 전술적으로는 거의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일선의 미군들이 비상식적인 돌격을 되풀이한 일본군에게 적개심과 공포심을 품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문제는 이 때문에 그 일본군을 두려워한 미군 병사들은 일본군의 바램대로 반자이! 한마디만 들어도 떨어서 사기를 잃는 것이 아니라 "또 저 쥐새끼들이 온다. 저놈들 놔두면 뭔 짓을 할지 모른다!"며 더욱 더 확실하게 일본군을 쓸어버렸다!!

쪽발이들(japs) 잡는 건 쥐잡기와 비슷하죠. 군대오기 전에 고향에서 그런 일 많이 해 봐서 알아요.

- 태평양 전선에서 한 미국 해병대원의 인터뷰 내용.

이런 일본군의 공격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미군이 똑같은 마인드로 '너 죽고 나 죽자'며 상당한 피해를 각오하고 과달카날 전투에서 반자이 어택을 본딴 육박전 공격을 펼친 적이 있었는데, 매번 착검 돌격을 구사해서 본인들도 돌격질에 철저하게 대비할 줄 알았던 일본군은 제대로 된 착검돌격을 받자 전멸했다. 사실 이는 때와 장소를 안 가리는 일본군과는 달리 새벽대를 노린 덕도 있고, 일본군이 설마 미 해병대가 이런 작전을 할 줄 몰랐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 전에 이미 일본군은 병사들이 피골이 상접해서 제대로 싸울 상황이 아니긴 했다.

그리고 1943년 11월의 타라와 전투에서 궁지에 몰린 일본군 병사들이 좌초한 수송선 잔해에 숨어서 공격을 퍼붓자 미 해병대 1개 소대가 폭탄을 몸에 묶고 뛰어들어 수송선을 부순 적도 있었다. 결국 이 병력은 거의 전원 전사했다. 사실 일본군은 전선에 투입되기 전에 '미군은 겁이 많아서 오직 원거리 사격만 한다'는 교육을 받았는데 정작 미군들이 닥돌하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카더라.

그리고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진 뒤에 등장한 붉은 군대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내전과 대숙청 때문에 상태가 개판이 되었던 30년대에도 일본군을 영혼까지 털어버렸고, 2차대전 말에는 독일군을 박살낸 다음 일본군에게도 비슷한 전술을 구사했고, 전쟁말에 엉망이 됐지만 그래도 100만에 육박하던 일본 관동군은 반격은 커녕 1주일 만에 개발살이 나버렸다.

사실 소련군도 독소전쟁 초기엔 대숙청으로 일본군처럼 전술의 격차를 무지막지한 인력으로 메웠고 큰 인명 피해를 봐야 했다. 다행히 미국이나, 영국 등 다른 연합국이 독일의 한쪽 팔을 잡아주던 형국이었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그나마 사람 보는 눈은 좀 있어서 게오르기 주코프 등 능력 있는 지휘관을 적절히 기용하며 지휘관들의 의견도 비교적 잘 들어줬다. 적어도 일본군보단 더 잘 들어줬다. 결국 2차대전 말에는 차량은 남는데 보병이 모자라서 연합군 중 미군 다음으로 기계화가 잘된 군대가 됐다는 웃픈(...) 군대가 되긴 했으나, 그렇게 만들어진 우수한 무기와 개선된 전략전술로 질이 뒷받침되는 숫적 우세를 앞세워서 독일군을 쓰나미 앞의 조각배 신세로 만들었으나, 일본군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소련군처럼 소모전을 반면교사로 삼지도 않았고, 우수한 무기도 없었으며, 전략전술을 개선할 생각조차 없었으니 그냥 답이 없다.

이건 영국군을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초기에는 독일하고 전쟁 때문에 영국 본토 신경쓰느라 식민지 군대를 지원하기 힘들어서 밀렸지(그나마도 대부분은 영국군의 자멸...), 전쟁 후반부에도 일본군 최정예를 2선급 부대로 맞서는데도 화력부터 열세인 데다가 마틸다 전차가 쓰러지지 않아서 밀리고, 간신히 육박전을 벌일 거리까지 다가와도 상대가 구르카 망했어요.

경우가 좀 다르지만 김영옥이 지휘했던 일본계 2세로 구성된 미군 부대 442연대 100대대(442nd Infantry Regiment, 100th Infantry Battalion)는 유럽 전선에서 문자 그대로의 반자이 어택을 건 경우가 있다. 프랑스 비퐁텐(Biffontaine)에서 당시 소대장이었던 김영옥이 수류탄을 들고 독일군 기관총좌에 돌격하다 부상을 입고 쓰러지자, 이에 분노한 소대원들이 진짜로 반자이를 외치며 돌격, 독일군 기관총좌를 박살냈다. 강려크한 화력과 초월적인 정신력을 겸비한 일본군 꿈의 부대가 요기잉네? 적보다 강한 적 ㅎㄷㄷ 다행히 김영옥은 가벼운 부상만 입은 덕분에 쓰러진 자리에서 수류탄을 까넣으며 부하들의 돌격을 지원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 사건 이후 한동안 100대대는 '야, 우리 쪽에 일본애들만 모인 부대 있지? 걔들이 나치한테 반자이 차지 해서 이겼대! 역시 잽스 클래스는 좀 다른 듯 ㅎㄷㄷ' 라며 유럽의 미군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해졌다. 이 돌격은 유럽 전선에서 실행된 유일한 반자이 어택으로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지만, 사실은 김영옥과 그의 상관이 100대대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두고 설전을 벌이던 중 독일군 기관총좌가 기습적인 사격을 가하자 상관이 무턱대고 착검돌격을 지시했고, 결국 대원들이 공격한 물체는 나무 울타리에 불과했다고. 분명 김영옥의 회고록에도 적혀 있다. 김영옥이 수류탄을 들고 돌격하던 걸 보고 울컥했다는 했다는말도 사실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돌격이 효과가 없을 거라 판단한 김영옥이 혼자 몰래 기어가 수류탄을 까넣은 것이다. 이게 일본계 미군의 유럽에서의 첫 반자이 돌격이니 뭐니 하면서 미국 언론에서 대서특필하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돌격 자체는 실패했다.

4 일본군의 문제점

4.1 병력과 지원이 없다

같아보이지만 전혀 다른 소련의 우라돌격은 1, 2 제대가 돌파구를 마련한 후에 약점에 집중적으로 완전히 기계화된 부대를 투입해 돌파구를 벌리고 종심까지 위협, 격파까지 한 체계적이고 현대적인 작전이었다. 즉 우라돌격은 각종 화력지원을 해주며 보병 위주의 돌격이 기계화 비율을 높여가다 후엔 전차사단의 돌격이 이어지는 형태다.

또한 대전 초기 개판인 상황에서도 항공기, 곡사포, 전차, 경야포 등 중에서 1개 이상의 지원을 받거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는 양쪽 모두 보병끼리만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나왔다. 아닌 상황에서는 전차나 지상공격기 등의 지원이 오길 기다렸지, 병사들한테 의미없이 나가 죽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이에 반해 일본군의 반자이 어택은 지속적인 병력 지원도 화력 지원도 없으면서 단숨에 전원이 몰려나가 공격하는 방식이다. 게다가 전장은 일본군은 병력지원이 적던 섬 전투라서 달리 병력 충원도 못했다.병력충원은 커녕 일반적인 보급로도 끊겨 보급도 제대로 안되는 상황이었으니.......

4.2 병과 간 화력지원이 없다

일본도 초기의 반자이 어택에는 그나마 개념이 있어서 돌격시 기관총 엄호가 반드시 따랐다. 전술훈련 간 분대 이동시 기관총 사수 등의 엄호 사격을 통해 분대의 생존력을 높이려고 하는 시도를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이것도 그나마 물자보급이 정상적이었던 처음이나 통하던 이야기였다.

태평양 전쟁 중반까지만 가도 넘사벽으로 나오는 미군의 물량에 일본군은 버거워했다. 그리고 질적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는데다, 화력지원만 빼놓고 봐도 일본군과 미군은 차이가 확연히 났다.

4.3 장교-장군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지휘체계

무능한 군인이 까라면 까로 밀어붙일때 발생하는 최악의 상황 애초에 유능한 군인은 저러지 않는다
반자의(反自意) 어택

같은 추축국이던 독일군도 말도 안되는 명령을 받으면 그 자리에서 대판 싸워서 작전을 수정하거나 취소시키는 경우가 있었으며, 설령 그 명령이 관철되더라도 현장에서 영 불가능하다 판단되면 요식행위로 좀 하다 말거나 자의적으로 명령을 거부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독일과 달리 당시 일본군은 명령불복종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23] 목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복종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윗대가리 덕분에 죽어나간 병사들이 불쌍할 정도. 과거부터 일본군 특성상 명령을 거부한다는건 있을 수 없었다. 그 명령이 무엇이든 말이다. 실제로 타지에서 소식이나 무전을 받지 못한 일본군은 항복 명령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끝까지 전투를 지속했다.

이 정신나간 지휘방식은 반자이 어택에도 적용되었다. 휘하 장병들의 생존률을 결정하는건 장교 또는 장군들이라는 건 잘 알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돌격 개념이 전쟁이 가면 갈수록 점점 비정상으로 바뀌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 중 하나는 장교나 장군들의 교육과정이 정신교육을 중시하고 전근대적인 공격 일변도 전투교리를 가르치는 등 제대로 된 게 아니었기 때문. 이러한 상황에 전쟁 초에 제대로 된 과정을 거친 장교들이 전사하거나 해임되고 전쟁 중~후반에 저따위 교리를 몸에 익힌 장교들이 그 빈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전체적인 장교의 질적 저하로 이어졌다. 이런 장교들 밑에 있던 병사들은 말도 안되는 명령을 받게 되었고, 이게 이어지다보니 결국엔 총소리만 나면 적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다같이 반쯤 멘탈붕괴한 상태에서 가하게 된다. 적군보다 아군의 인사고과를 더 무서워하다니...사실 전쟁나면 무능한 상관 때문에 죽는 애들도 많긴 하다. 노먼 다이크?

참고로 이오지마 전투에서는 지휘관이 반자이 어택을 금지시켰을 뿐인데 일본군의 전투력이 상승했으며(...), 결국 패배하기는 했으나 이전과 달리 미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이 전투와 이후 오키나와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미군은 일본 본토 상륙에 대해 부담감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게 되는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24]

4.4 특별한 전략도 없는 근접전

근대전에는 상대편의 화력이 이쪽보다 우월할 때 근접하여 돌격해 백병전에 돌입하여 병사들끼리 서로 뒤엉킨 혼란스러운 난전으로 몰고 가서 화력을 배제한 싸움을 유도하였다. 이를 전문적으로 담당한 척탄병이라는 병과가 생기기도 하였다.

현대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1차대전의 경우 탱크의 등장 전까진 적의 방어선을 무력화하는 방법은 돌격하여 접근한 뒤 일시에 다같이 참호에 뛰어들어가 적을 밀어내는 것 뿐이었는데 매우 좁아터진 참호속에선 백병전은 필수였고 야삽, 몽둥이, 총검, 손도끼와 같은 백병기는 유용한 무기였다. 하지만 이때에도 이미 기관단총을 든 병사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현대전에선 이러한 양상이 더더욱 심해진다. 보병화기만 보더라도 훨씬 발전된 경기관총과 기관단총과 같은 근접화기들이 잔뜩 보급되어 있었다. 때문에 이전같은 대규모 돌격을 하면 눈 깜짝할 사이 모조리 쓸려나갔다. 때문에 근접전에선 서로 근접화기로 싸웠으며 백병전에서도 총검은 보조 수단일 뿐이고 화기 위주로 싸웠다.[25] 물론 그렇다고 단검이나 총검을 아예 안쓴 건 아니지만, 이건 '최후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반자이 어택은 냅다 칼달린 총만 들고 "덴노 헤이카 반자이!"하면서 달려들 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렇게 미군이 화기를 못 쓸 만큼 달라붙으면 화력차가 좀 줄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위의 '화력의 차이를 줄인다'는 개념은 일본군과 미군의 비교를 보면 나오듯이 곡사화기의 장거리 지원화력의 차이가 너무나 커 일반적인 교전으로는 답이 안 나오니, 바짝 다가가서 소화기로 맞서겠다는 발상이다.

그런데 일본군은 처음부터 끝까지 댑따 긴 칼만 붙인 볼트액션 소총만 들고 다녔지만 이에 맞선 미군은 전쟁 중반이 되면 스프링필드 M1903 볼트액션 소총에서 8연발 반자동 소총로 바꿔들고 나왔다(...). 30-06탄이라 아마 한발에 한명으로 안끝나는 경우도 많았을 거다 여기에 소총이 필요없는 거리까지 접근해서 백병전을 벌인다면 기본적으로 연사력이 높은 기관단총이나 근접전에서 효율이 높은 산탄총, 아니면 권총이 필요한데, 미군은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췄던 반면[26] 일본군의 높으신 분들은 오로지 총검에만 목을 매었다. 만약 일본군에게 기관단총과 샷건이 제대로 있었다면 미군도 근거리 난전에서 엄청난 피해를 봤겠지만, 현실은 시궁창. 스텐 기관단총이라도 복사하지(...) 사실 카피도 못한다

4.5 대전차 삼지창, 대전차 발도술

그래서 일본군의 대전차 전투는 돌격하는 보병을 전차가 엄호한다는, 다른 나라와는 정반대였어...

(아연)
보병이 목숨걸고 돌격하는데 전차는 엄호밖에 못했단 말입뉘까?

- 모에! 전차학교 3권

반자이 돌격의 개량형(...)으로는 세계사에서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대전차 삼지창을 사용한 대전차 돌격술이 있었다. 이게 뭔가 하면 죽창 끝에다 지뢰를 묶어서 적 탱크에 돌격하는 일본군 '최고'의 대전차 전술이었다. 97식 전차를 위시한 일본의 전차들이 화력과 장갑이 매우 부실해서 대전차 전투가 거의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자 나온 방법. 관통력은 꽤 높았기에 셔먼 같은 중형전차들은 어느정도 관통이 가능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다가가기도 전에 미군 전차의 기관총 세례로 대부분이 전멸했고, 미군 전차의 공격을 피하는데 성공했다 한들 전차 근처의 보병들의 살인적인 화력 앞에 갈려나갔다. 즉, 성공만 한다면 적 전차를 제압할 수 있었지만 성공할 확률은 굉장히 낮았다.

자매품으로 복룡이 있는데[27] 이것은 대함 전술로 대전차 돌격술과 다른 것은 잠수부가 소형 어뢰를 죽창의 끝에 매달아 함선의 아래를 공격했으니 흠좀무. 미 해병대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탱크 앞에다 불도저 삽날을 달아놓았다. 심지어 말기에 가면 자돌폭뢰라고 해서 창 끝에 폭약을 달아 말 그대로 전차에 달려드는 롱기누스의 창 대전차 무기나 1식 투환관이라고 해서 청산가리 가스를 넣은 유리병을 전차의 관찰창을 향해 던지는 말도 안되는 무기를 제식 병기로 채용한다. 자매품으로 1식 화학 수류탄이 있으나, 이것 역시 말만 수류탄이지 그냥 청산가리 넣은 병이다.

무타구치 렌야의 삽질 임팔 작전에선 심지어 대전차 발도술도 나온다. 갑자기 일본군 장교가 칼을 들며 뛰어올라, 머리를 내밀던 전차장을 죽이고 전차 안에서도 칼을 휘두르려다 조종수가 권총으로 사살한 것이다. 말기에는 그냥 정면에서 칼을 들고 달려들기까지... 물론 미군 전차병들의 반응은 "아놔. 오늘은 궤도청소하느라 고생 좀 하겠는데?"

4.6 반자이 어택 전 일본군의 기도소리

황군기도중

반자이 어택을 펴기 전에 덴노에게 작전성공을 기원하는 기도도 했는데 저 소리가 미군이 들을 만큼 컸으니 문제였다. 당연히 미군더러 "나 잡아잡숴" 하는 꼴이었다. 그런데도 엄호 화력은 고작 기관총 8정과 야포 2문에 그나마도 사격 금지(...)

일본군도 어쨌든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라 반자이 어택 전에 공포심을 이겨내야 했는데 그 방법이 기도합창을 거친 자기최면 효과였다. 기도소리는 인솔자의 선창 아래 점점 크게 톤을 올렸다가 마지막 부분에서는 거의 고함을 지름과 동시에 돌격해 병사들이 무아지경 속에서 무모한 짓을 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심리적 효과는 전열보병 시대에는 사기 유지에 도움을 줬지만 1940년대쯤 되면 그딴 거 없다. 다만 반자이 어택이 무모한 돌격 행위라도 돌격할 때마다 기도한 것은 아니고, 전투 후반 패색이 짙어지면서 기도를 하는 일이 잦아졌다. 물론 그 때쯤 가면 일본군의 상태는 이미 더 안 좋아진 상태이기 때문에 더더욱 역효과만 낼 뿐이었다. 반자이 어택은 람리섬 전투 때 무장한 인간이 동물에게 당한 역사상 가장 큰 참사도 빚게 만들었다.

4.7 맛이 간 교리와 정신 상태

일본군의 작전 교리 교재인 '보병교전' 이라는 에서는 '기습적인 육박전만이 최고' 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건 상기했듯 대부분의 강대국들이 제1차 세계대전까지 절대적인 진리인 줄 알았다가 100만 명이 11km를 전진하기 위해서 죽고 다쳤던 참극을 겪은 후 즉각 내다버린 사상이었다.

그런데 일본군은 이걸 외로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밀고 나갔다. 또한 이 책을 거쳐서 '포로 따위가 되느니 차라리 죽어라'라는 의식을 널리, 강하게 퍼뜨렸다. "그딴 교리로 훈련을 받았으니 이런 짓을 할 수 있었지"가 주된 평가.

5 강한 미군

5.1 화력덕후

이런 미친 짓을 하고도 열악한 일본군과는 달리 미군의 무장 상태가 매우 뛰어나서 별 성과가 없었다는 분석이 있다. 미 해병대는 주무장으로 톰슨 기관단총반자동 소총 M1 개런드, 부무장으로는 근접전에서 유리한 콜트 M1911 권총이 있었고 사병들마다 수류탄 5~6개씩을 가지고 다녔으며, M2 중기관총브라우닝 자동소총 등의 지원화기도 제대로 두었다. 일부 미군들은 수냉식 기관총도 혼자서 들고 쐈다[28] 이쯤이면 접근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브라우닝 M1919는 잊혀졌다

더 비참한 것은, 저 압도적인 화력의 격차를 어찌어찌 극복하고 근접에 성공한다 해도 전혀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점이다. 근접전이 벌어지면, 일본군은 일본군도남부 권총으로 싸워야 했지만 미군은 M1911 자동권총수류탄으로 싸운 것이다. 미군이 사용하는 M1911A1은 총덕후밀덕후성향이 약간이라도 있는 위키러라면 다들 잘 알다시피 수많은 실전에서 그 신뢰성을 검증받았고 나온 지 105년이 넘은 2016년 기준으로도 실전에서 충분히 쓸 만한 무기로 평가받는 세기의 명총이다. 반면 남부 권총은? 잘 관리된 총을 모든 조건을 안전하게 통제하는 사격장에서 쏴도 위험한 물건이라는 평을 받는다. 군용 무기에서 신뢰성은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이고, 게다가 반자이 어택이 벌어지던 태평양 전쟁의 전장환경은 대서양 전선과 비교했을때 훨씬 가혹한 환경이다. 안 그래도 무기 고장나기 딱 좋은 여건인 남태평양의 열대우림 지대에서 이 정도의 신뢰성 차이면 그냥 망한거다. 게다가 신뢰성만 문제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M1911A1에 쓰는 .45 ACP(US Army Ball FMJ)의 운동 에너지는 477J인데 남부 권총이 사용하는 8mm탄의 운동 에너지는 274J이고, 탄자중량도 .45ACP탄은 15g이지만 8mm탄은 7g이다. 그러니까 M1911A1은 남부보다 더 무거운 총알을 더 세게 쏘는 권총이라는 얘기고, 당연히 위력 또한 월등히 앞선다.

이런 제식 무기에 더해서, 태평양의 미군들 중에는 개인 총기, 그러니까 총 좋아하는 미국인들답게 자기가 사거나, 가족이나 이웃, 친구들이 일본군 잘 죽이고 무사히 돌아오라며 선물로 준 총까지 가진 대원들[29]도 있었다. 이러한 개인 총기들은 주로 권총이었지만, 개중에는 간혹 산탄총(...)을 가져온 병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반자이 어택해서 겨우 참호에 들어가나 싶었더니 미군이 산탄총 겨누는 상황 망했어요 Say hello to my little friend!!

5.2 강력한 백병전 능력

호로새끼들에게 진짜 만세 돌격이 뭔지 한 번 보여주자! 이지 중대, 돌격!

- 마이크 스트랭크, 이오지마 전투 D+2

그럼 만약에 이 악조건을 뚫고 순수하게 백병전을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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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저 해맑은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실제 반자이 어택이 아니라 할 일 없는 미 해병대원들이 그냥 일본군들을 따라하며 노는 것이다. 전쟁 속의 전쟁놀이 일단 들고 있는 칼부터가 일본군의 카타나가 아니라 미군의 마체테다.

굽시니스트의 과달카날 전투 만화에서 섬에 도착한 35여단이 멘붕하는 자기네 편을 보고 "이 섬의 미군은 어떤 놈들이지??" 하면서 공격을 했는데 이 섬의 미군은 이런 놈들이었다라며 나온게 바로 위의 사진. 그 뒤 35여단은 단 한번의 공격을 끝으로 궤멸했다는 나레이션이 나온다. Drive me closer! I want to hit them with my sword!#

사진 속 상황은 장난스럽지만 실제로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미 해병대의 자동화기의 보급률이 낮았던 전쟁 초-중반에는 일본군이 반자이 돌격을 벌이기 전에 역으로 미군이 "씨바아아아아아"하면서 돌격할 때도 많았다. 고로 육박전이 벌어지면 일본군은 저 커다란 친구들과 주먹을 섞어야 했다! 체격과 체력에서 훨씬 우세한 미 해병들이 근접전이라고 비실비실거리는 일본군한테 밀렸을까? 실제로 육박전 돌입에 성공해도 그냥 미군이 휘두른 개머리판이나 야삽에 맞고 죽었다거나 자다가 놀라 뛰쳐나와서 빈 손인(...) 미군 병사들한테 두들겨 맞거나 멱살을 잡혀서 내던져졌다고 한다.

어느 일본군 장교가 군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자 그걸 두 손으로 잡은 뒤 빼앗아 도륙냈다는 미군의 이야기도 있다. 그 병사는 손을 크게 다치긴 했지만 빼앗은 군도를 전리품으로 챙겨갔다. 이렇게 노획한 일본군도가 제법 많다고. 심하면 다들 들고 있던 대량생산 군도가 아니라, 사무라이 명문가 출신의 장교나 병사가 일본 전국시대부터 쓰던 집안의 가보를 들고 와서 싸우다 전사가보를 헌납하고, 그걸 노획한 미군 병사가 나중에 횡재했다는 것을 알고 박물관에 기증하거나 비싼 값에 팔아치운 사례도 있다고.

사실 동아시아 국가의 군인들의 영양 상태가 많이 나아진 21세기에도 미군이 그 덩치에서 압도한다. 하물며 일본군의 영양 상태가 개판이던 태평양 전쟁 당시엔 미국인들과 일본인들의 평균 신장 차이는 지금보다 훨씬 컸을 것이고 실제로도 그랬다.

5.3 전투의지 및 사기 차이

여기에 더 특기할 만한 사실은 당시 미국 병사들의 정신 상태였다. 일본군은 "덩치만 컸지 정신력은 나약하기 그지없는 영미귀축 병사들이니 일단 달라붙기면 하면 필승"이라고 믿었으나, 그것은 말 그대로 착각일 뿐이었다

5.3.1 미군의 경우

당시 10대 후반 ~ 20대의 미군 병사들은 IMF 구제금융 따위는 경제난 대우도 못 받을 만큼 지옥같았던 대공황을 어린 나이에 맞닥뜨린 세대였다. 대공황 당시를 살아간 세대는 남녀노소, 심지어 10살 남짓한 어린아이까지 단순히 먹고살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살아남기 위해서 길거리나 농장, 어선 등 어디서나 무슨 짓이라도 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자유방임주의가 최전성기를 이루던 당대 미국 사회에서는 그저 굶어죽을 수 밖에 없었다.[30] 한 마디로 일본군 선전물에 흔히 나오는 "호의호식하고 살던 군기 풀린 미국놈" 이란 건 그냥 일본군의 망상 속에서만 나오는 상상의 동물이었다. 미국 사회 전체가 1차대전 뒤 대공황, 보너스 아미 사건 등의 정치적 불안정, 사회적 양극화 등의 뜨거운 역사적 시련 속에서 강철같이 제련받던 시절이었는데 사는 게 결코 녹록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비록 다른 세대에 비해 체격적 조건은 다소 부실했을지는 몰라도, 당시의 미국 청년들은 미국 역사상 최강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깡다구가 넘쳐 흘렀다. 위의 문단에서 나온 거짓말 같은 무쌍난무는 체력 조건 뿐 아니라 이런 정신적인 배경이 있어서였다. 심지어는 유럽 전선으로 간 일본계 미국인 부대도 차별받고 수용소에 갇힌 가족들을 생각하며 미국인으로 인정받겠다는 의지가 넘쳐흘렀다. 당시 남녀노소 미국인들의 이런 정신적 저력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을 치르고, 더 나아가 종전 뒤의 황금기를 일궈낸 인적 자원의 배경이기도 하다. 이 세대는 현재도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세대 (Greatest Generation) 란 칭송을 들으며 전반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침체기를 겪는 현대의 미국인들이 끝임없이 다시 돌아보고, 교훈을 얻으려는 세대이다.

그리고 당시 미군은 90% 이상이 자원입대자였다. 미국인들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나라 전체가 "12월 7일을 기억하라! 진주만을 기억하라!"복수에 눈이 뒤집혔고, 대학생[31], 영화배우[32], 야구선수[33], 상류층 자제 등 사회 각계각층의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입대했으며, 심지어는 신체조건 미달로 불합격 판정을 받은 사람도 어떻게든 참전하려고 노력했다.[34] 심한 경우 입대 불가 통지를 받은 청년이 낙담해 자살하는 사례까지 있었을 정도.[35] 캡틴 아메리카의 스티브 로저스나 더 퍼시픽유진 슬레지 등이 그 멸치같은 몸으로 어떻게든 군에 가려고 기를 쓰는 모습은 절대 과장이 아니며, 당시의 실제 시대상을 정확히 반영한 모습이다.[36]

5.3.2 일본군의 경우

일본은 어떠했냐고? 당장 중일전쟁 때만 해도 도시에 거주하던 젊은이들은 대학에 입학하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그 이유는 대학생은 징집 대상이 아니라서. 징집에서 제외된 이유도 참 가관인 것이, "중요 인재"라서가 아니라 "군기를 흐릴 수 있는 불순분자"라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전체주의와 광신으로 굴러가던 일본군은 서구식 고등 교육을 받은 엘리트는 체제에 위험이 되는 위험 요소라고 여겼다. 때문에 전쟁 초 징집 대상은 주로 농촌 출신의 저학력자였고,[37] 이후에 태평양 전쟁을 기점으로 점점 인력이 부족해지자 부랴부랴 대학생도 강제로 징집하기 시작했다. 사실 당시 대학생은 고등 교육을 받은 중요한 인재여서 타 국가에서는 징병을 연기해 주거나, 하다못해 일개 소총병 따위로 낭비하지 않고 제대로 된 군사 교육을 받도록 해 장교로 임관시키거나 후방 기행부대로 보내 행정병으로 배치시킨다던지 하는 경우가 많았다. 헌데 일본군에선 정작 대학생들을 징집하면서 카미카제나 이런 반자이 어택용 병사로 뽑아 총알받이 노릇을 시켰으니 말 다 한 셈.

뿐만 아니라 본격적으로 주체 못할 파시즘약을 벌컥벌컥 삼켜서 총에 새긴 국화 문양 똑바로 안 닦았다고 사람 죽도록 패던 일본군, 전쟁에는 전혀 의미 없는 유대인들을 세상에서 지워 버리겠다면서 최우선 순위의 물자들을 최전선이 아니라 학살 수용소로 돌린 독일, 아예 초반부터 전쟁에서 이길 의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궁금한(...) 이탈리아 등과 달리 미국은 인적 관리 또한 아주 효율적이었다. 당장 과달카날 같은 생지옥에서 구를 만큼 구른 병사들은 휴가 등의 보상과 휴식도 확실하게 해 주었다. 격전을 치룬 장병들을 미국 본토나 오스트레일리아로 보내 주거나, 하다 못해 전선 후방에 있는 군 휴양 시설로 보내서 피로를 풀고 체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당장 2차 세계대전을 다루는 미디어 매체만 봐도 미군들은 어떤 중요한 임무나 전투가 끝난 후에는 대위, 소령 같은 중대 및 대대장이 병사들에게 쉬라고 말한다. 반면 일본군은 휴가는 커녕 부대 밖으로의 외출 및 외박도 제대로 없었고, 기껏 병사들의 스트레스를 풀게 해주겠다고 허용한 게 음주, 마약, 위안부 같은 썩어빠진 짓거리였다. 그 와중에도 고급 간부들은 부대 밖에 있는 온천이나 요릿집 등에서 마음껏 놀 수 있었다.

현대 와서 소위 말하는 똥군기라 불리는 사람 말 하는 거 하나 하나, 전투력과 전혀 무관한 사소한 행동거지 하나 하나 가지고 권위로 병사들을 찍어 누르는 경우는 미군에서는 있더라도 예외적인 경우였지, 일본군처럼 군기라는 변명이라 하기도 부끄러운 명목으로 일상적으로 병사를 통제하는 수단이 아니었다. 그리고 직무 외에서는 언제까지나 수평적인 인간 관계를 기반으로 생지옥을 함께 해쳐나가며 서로 마음 깊이 신뢰하는 친구로서 다져진 미군들과 비교해 폭력과 억압, 계급에 따른 단순한 직무상이 아닌 인간적 차원의 차별 대우 등으로 억지로 단결력을 주입한 일본군 부대들의 실질적인 연대의식, 사기, 투지 등이 높았는지 의문이다.

이런 시대가 깡을 길러준 인재들이 자원입대하여 모이고 이들을 나름 합리적이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운영했던 미군과 비교해서, 강제 징집한 장정들을 각종 가혹행위를 가해 억지로 똥군기를 잡았을 뿐인 일본군의 정신 상태를 따져본다면 당연히 미군 병사들의 정신력이 우월함은 명약관화.

6 결과

포로를 심문해서 알아낸 사실이 있었습니다. 항복하지 말라는 교리를 주입시킨 이유는 바로 이런 식으로 무모한 돌격을 하게 만들려는 준비였다는 점입니다. 즉, 돌격할 때 도망칠 궁리를 못하게 막으려는 의도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싸워봐야 명예만 남는 이상, 분명히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NHK 다큐멘터리, 태평양 전쟁 <적을 모른 채, 나를 모른 채 ~과달카날> 편
주코프"일본군인이라면 반자이를 외치면서 용감하게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할힌골 전투 후 수풀 속에서 매복 중 방충망을 받지 못해 만주 전투모기를 버티지 못하고 항복한 일본 병사에게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

반자이 돌격의 가장 전형적인 예로는 자칭 작전의 신 츠지 마사노부가 지휘한 과달카날 전투가 있다. 하지만 역시 미군의 기관총 십자포화가 제1차 세계대전의 연합군 병사들처럼 말 그대로 학살했다. 1년여 뒤 동남아시아 임팔에서는 무타구치 렌야가 "일본인은 초식동물이다" 크리로 아군을 아사시켰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끝까지 "내 잘못이 아니야, 부하 잘못이지!"라고 박박 우겼다. 그러니 죽은 부하들의 유족한테 뭇매를 맞았지,.. 그러나, 그나마 살아남기라도 했고 적어도 이런 짓까지 명령하진 않았다.

태평양 전쟁이 중반으로 접어들면서는 오히려 미군 쪽에서 일본군이 반자이 돌격을 해 오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이 때 적을 크게 줄여놔야 나중에 동굴이나 참호 등에서 농성하는 일본군을 소탕할 때 훨씬 적은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남들이 돌격할 때 도망친 뒤 숲에 숨어서 지내면서 저격이나 기습으로 미군을 공격하던 일본군들의 손에 죽어나간 미군이 반자이 어택 과정에서 죽은 미군보다 훨씬 많았다. 모든 일본군이 이런 식으로 싸워왔으면 상황이 조금은 나았을지도 모른다.

전쟁 후반 들어 전세가 완전히 연합군측으로 넘어가고 일본의 최우선 목표가 본토방위로 바뀐 뒤로는 전력보존 차원에서 일본군의 반자이 어택 사용빈도가 극단적으로 줄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끝내 반자이 어택은 안 그래도 걸레짝이던 일본의 패망을 더 앞당긴 여러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19세기 이전에나 통했던 전법을 현대화기가 발전하는 가운데에 "안되는 억지"를 죽음으로 미화시켜 만든 일본군부의 가장 멍청하면서도 바보같은 전법 중의 하나로 남았다.

손자병법 모공편의 결구는 이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좋은 예시라 하겠다.

知彼知己(지피지기) : 저편의 사정을 알고 이편의 사정을 알면

百戰不殆(백전불태) :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不知彼而知己(부지피이지기) : 저편의 사정을 모르고, 이편의 사정만을 알면
一勝一負(일승일부) : 한 번은 승리하고 한 번은 패배한다.
不知彼不知己(부지피부지기) : 저편의 사정과 이편의 사정을 함께 모르면
每戰必殆(매전필태) :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태롭다.

7 서브컬처의 반자이 어택

  • 영화 마이웨이의 한 장면. 반자이 돌격과 함께 이루어지는 각종 대전차총검술은 덤이다. 영상을 끝까지 본 사람은 알텐데 '조센징' '살려줘' '민우야, 괜찮아?' 라는 대사가 나온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자살특공대원 중 다수가 조선인 청년들이다... 특히나 후반부로 가면 더 몰려오는 BT-7무리에 대부분이 겁을 집어먹는다... 물론 영화적 연출 상 병력 밀집도가 너무 높아서 소련군 피해도 꽤 크게 나온 것을 감안하더라도, 충격적이게도 저 영화에서는 일본군이 실제보다 훨씬 괜찮게 나왔다. 저게? 실제 일본군은 드럼통 실은 차량으로 자폭을 하는 전술 같은 건 제대로 쓰지도 않았고, 대전차지뢰 들고 눕는 것 역시 성공률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
  • 레드 오케스트라 2의 스탠드 얼론 버전인 라이징 스톰에서 일본군 특수 능력으로 등장한다. 일단 근접 공격 키를 누른 채로 달리면[38] 무조건 "덴노 헤이카 반자이!!" 나 "미나고로시다(몰살이다)!!" , "쇼리자(승리다)!!" , "토츠게키(돌격)!!" 등등 다양한 대사와 온갖 괴성, 고함을 질러대면서 자동으로 발동하는데, 여기에 버프가 걸려서 쓰는 일본군의 맷집이 올라가고 이걸 듣는 미군의 시점이 흔들리며 사기가 저하되는 효과가 있으며 여럿이 반자이를 발동하면 그만큼 버프가 크다. 현실의 일본군이 실제로 쓰면서 바랐을 효력 하지만 레드 오케스트라 게임 자체가 리얼리티에 충실해서 한두발에 픽픽 죽어나가는터라 별 의미가 없고, 그나마도 패치로 너프먹었다(...). 그래도 반자이 돌격 중엔 운이 좋으면 기관총 탄환 2~3발까지도 버텨낸다. 하지만 미군의 반자동/자동 화기 비율이 워낙 높아 일반 소총수들조차 반자동소총인 M1 개런드로 무장하니[39] 현재 너프 먹었어도 팀리더의 적절한 포격지원과 항공기 지원으로 충분히 활약을 하며 일본군의 빈약한 화력으로 인해 발생하는 저질 돌파력을 매꿔준다, 물론 미군또한 적절한 대응을 하면 못막을것도 없으니, 결국은 팀의 재량에 따라 결과가 갈린다고 볼 수 있다. 화염방사기 혼자서 반자이 돌격해오던 일본군 10명을 씹어먹는 위엄을 보여준다
  • 메달 오브 아너 : 퍼시픽 어설트는 태평양 전쟁을 다루는데 일본군의 주요 공격으로 묘사한다. 덕분에 게임 전반에 걸쳐서 좀비 같은 지긋지긋한 반자이 차지를 경험할 수 있다. 좀비는 몸빵이라도 되지만 일본군은 무슨 능력이 있냐 케첩이 되는 정도의 능력
  • 메탈슬러그 3의 스테이지 4 구 일본군루트에서 일본군이 줄에 메단 A6M과 인력 97식 전차와 함께 나오는데 보병들은 폭탄을 굴리며 반자이 어택을 편다. 맵의 특수성과 인공지능 탓에 등장 보병으로써는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며, 정예병사는 죽으면 어떻게 죽이든 자폭까지 해서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3에서는 욱일 제국 제국 전사의 특수능력으로 고속으로 상대 보병에 접근 뒤 단칼에 즉사시키는 능력이다. 초기엔 고증에 맞춰서 발동시 방어력이 내려가고 속도가 빨라지게 하여 개가 없는 욱일의 밸런스를 조정했다. 반자이 모드라면 개나 의 짖기에는 면역이다. 그러나 방어력 하락 때문에 타 진영의 화력에 접근도 못하고 케첩이 됐다. 훌륭한 고증
그러나 끝내 패치로 방어력 하락이 사라졌다. 게임은 게임인가 덕분에 욱일은 초반 유정싸움이 매우 유리해 보병 싸움에서도 안 밀린다. 처음엔 나름대로 충실했으나 현재는 밸런스 패치 때문에 개사기이다. 단 싱글 플레이에서는 패치의 밸런스 수정 사항을 적용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패치했으니 괜찮겠지~ 하며 욱일 제국 임무에서 반자이 돌격을 한다면 역시나 다른 진영 화력에 그대로 갈려나가는 꼴을 감상할 수 있다.
저놈들 우릴 진급시키려고 작정했군. (They're just dying for us.)[40]

-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에서 반자이 어택을 본 미 해병대원의 반응.

  •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에서도 반자이 어택을 겪을 수 있다. 일본군들이 "덴노 헤이카 반자이~!!!" 라고 외치면서 플레이어에게 돌격하는데 역시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튀어나와서 당하는 일이 잦다. 중간에 시체인 척 변장하고도 싸운다. 근데 이놈의 시체로 변장한 녀석들은 근접공격으로 찔러도 멀쩡히 살아있는 기적이... 일본군은 죽는 것만이 진리인가 변장이 풀리면 얄짤없이 1방이다.
이들이 쓰는 착검한 아리사카를 뺏어서 쓸 수도 있는데 베테랑 난이도가 아닌 이상 역(逆) 반자이 어택으로 일본군을 푹푹 찔러대면 의외로 손맛도 좋고(...) 전선 돌파에 효율적일 때가 있다. 당연히 제작자들이 의도한 플레이는 '타이밍을 맞춰서 이벤트 진행키를 눌러 역관광 보내기'다.
참고로 이렇게 '갑자기 돌진해와서 덮치며 타이밍 맞춰 키를 눌러서 대응하는 근접공격'은 시리즈 전통적으로 (군견)의 역할이다. 고수들은 일본군이 반자이 어택을 시전하는 이벤트를 이용해 체력을 회복하기도 한다. 이벤트 진행중에는 체력회복은 되는데 다른 AI들의 공격은 씹기 때문...
  • 중국 FPS 광영사명의 온라인 서비스 버전에서 등장하는 중국판 다크스트 오브 데이즈 중일전쟁 시기의 상하이 코옵 맵(抗战勇士)에서도 경험해 볼 수 있다. 맵 자체가 좁은 시가전형 맵인데다가 어느샌가 갑자기 스폰되어서 으아아아앙아~ 하고 달려오는 식이라 꽤 위협적이다. 차라리 이것만 있으면 괜찮은데 나중에는 96식들고 뛰어다니면서 쏘는 뚱보중보병까지 나오는 데다 라운드 6부터는 B사이트도 추가로 지켜야 하고 A,B 둘 중 한 곳이라도 점령되면 게임 오버다...... 여담으로 이 돌격병은 플레이어가 일정 거리만 다가오면 무조건 그 한명만 집어서 돌격으로 들어가는 트리거가 걸려 있는지 옆에 더 가까운 다른 플레이어가 있어도 무조건 선택한 놈만 보고 돌격하거나 더 나아가 소총으로 쏴도 맞는 거리인데 총알 냅두고 닥돌하거나 엄폐물에 숨어 있다가도 알아서 튀어나와 닥돌한다(...). 훌륭한 고증(2)
  • 미국 HBO 채널의 드라마 더 퍼시픽에서도 이러한 장면이 있다. 반자이 어택장면은 1화인 과달카날 전투의 테나루 강 전투와 9화의 오키나와 전투에서 등장한다. 역시나 여기서도 달려오면서 폭죽이 된다... 단 일본군과의 육박전을 직접 보여주는 장면은 찾기 힘들다.
  • 1999년도 작 씬 레드 라인(Thin Red Line)은 이러한 육박전을 자세히 재연한 영화로 과달카날 전투에서의 미군과 일본군의 육박전 전술을 굉장히 자세히 묘사한다. 고지에서 일본군은 착검한 소총으로 돌격하고 미 육군 중대 역시 착검한 소총을 기본으로 기관단총, 산탄총과 콜트 권총 등으로 육박전을 벌인다.
  • 만주작전을 다룬 중국영화 퍼플 선셋에선 초반부에 일본군이 붉은 군대의 땅크 앞에 반자이 어택을 펴다가 뼈와 살이 분리되며 녹아내리는 모습을 여과없이 다룬다.
  • 월드 오브 탱크 역사웹툰 할힌골 편에 등장한다. # 게임 내에서도 이 업적이 있는데, 조건은 자기가 탄 전차보다 고티어인 상대방 전차를 몸통박치기로 격파할 것이다.
  • 걸즈 & 판처에서 일본(정확히는 구일본군)을 모델로 한 치하땅 학원이 반자이 돌격 같은 대책없는 돌격을 애용한다. 과거 '닥돌하여 일점돌파 후 포위섬멸'이 한 번 먹힌 뒤 그대로 학교의 전통이 되어 매년 써왔다는 설정. 물론 TVA에서든 극장판에서든 별 성과는... 대사를 들어보면 그냥 돌격성애자들인 것 같다 취소선이 틀린 말은 아닌게.....돌격이 학교 전통(...)이라고 한다.

8 비슷한 것들

  1. 최소한 포병들을 상당히 난감하게 만들 수 있다. 아군의 머리 위로 포탄을 떨어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당 지역의 아군이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진내사격 같은 화력지원을 요청하지 않는 이상 포병의 포격은 사실상 봉쇄된다고 보면 된다.
  2. 하지만 공병들의 능력이 이전에 비해 독보적으로 발전하고, 밀집대형을 유지하지 않는 현대전에선 충격력은 의미가 극히 적다.
  3. 전갈대대의 그것을 생각하면 된다.
  4. 보신 전쟁때는 사쓰마 무사들도 후장식 소총을 썼지만 전후 신정부에서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총기를 죄다 수거하는 바람에 서남 전쟁때는 전장식 소총이나 검같은 근접무기를 주무장으로 쓸수밖에 없었다.
  5. 검술의 차이가 아니라 훈련의 차이의 문제였다. 말 그대로 평생 검술을 배운 사람을 군 복무기간인 고작 몇년 얼치기로 검술을 배운 사람이 근접전에서 이길 리가...
  6. 애국심과 정신력 강화(이것이 바로 정훈교육) 및 국가 최고 원수에게 군 통수권을 부여하는 등...
  7. 완벽하게 전열보병 시대의 근대적 전술사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시절 주무기인 머스켓은 명중률, 사거리, 연사율 모든 면에서 아직 충분한 성능을 내지 못했으며 대포마저도 그냥 쇠공을 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사격 좀 하다가 보병 간 백병전으로 끝내던가 사격전에서 한쪽이 밀려 도망가기 시작하면 기병이 따라가서 끝을 내던가 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최후에 백병전을 벌인다는 것은 근대에는 정석이었지만 이미 1차 대전기만 들어와도 기관총 때문에 자살 이상의 별다른 가치는 없는 전술이었다.
  8. 이는 1920년 당시 참모부 정보부장이었던 타나카 쿠니시케(田中国重)의 평가이다.
  9. 당시 일본군에게 있어서 슐리펜은 '군사적 천재'로 평가받았으며, 이 작전이 1차 대전에서 독일이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실패 원인은 전부 小몰트케 때문이라고 보았다.
  10. 일본이 이러한 슐리펜 계획을 높이 평가한 이유는, 당시 일본은 유사시, 독일과 같은 양면전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육군은 소련은 잠재적 적국으로, 일본해군은 미국을 잠재적 적국으로 보고 있었다.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을 비롯한 단기결전 전략은 1차대전에서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서술##이 있는데 보다 근본적인 것은 '슐리펜 계획' 그 자체였다. 물론 탄넨베르크 전투의 경우,결과적으로 1차대전에서도 예외에 가까운 전투였으며, 독일은 이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결과적으로는 전쟁에 패배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왜냐하면 너무 신나서 레이드 벌이느라 서부전선에 투입해야할 병력과 물자들을 투입해서 서부전선을 종식시키지 못했기 때문
  11. 여기서의 기동전은 '단기간의 결정적 전투로 전승을 달성하는 전쟁수행방식'을 가리킨다.
  12. 이상의 내용은 三野正洋의 <日本軍の小失敗の硏究>에서 인용
  13. 이들은 국가의 생산력을 책임질 세대이자 동시에 다음 세대가 클때까지 나라를 이끌어가는 역할로, 그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세대인데 저 정도로 갈려나가면 당장의 국력이 낮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손실은 장기적으로도 엄청난 악영향을 끼친다.
  14. 나머지 73%이 무사해보인다고? 전쟁이 일어나면 보통은 전사자보다 부상자가 2~3배정도 더 발생한다. 그리고 전쟁터의 특성상 사지절단 내지는 중추신경계 마비같은 중환자도 굉장히 많았다. 그러니까 열 명 중 전사자가 2~3명이 나오면 나머지 7명 중에서도 정상적인 생활을 못할 정도로 다친 사람이 또 4~5명이 나온다는 이야기. 고로 전쟁에 참전한 열 명 중 무사한 사람은 겨우 두세명이라는 셈이 되므로, 프랑스 청년층은 사실상 '전멸'한 것이나 다름없다.
  15. 즉, 괜히 공격해서 사람 죽이지 말고 독일놈들을 실컷 죽인 다음에 밀어붙이자는 심산으로 소극적, 방어적인 전략을 수립한 것이다.
  16. 패배할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황군으로서 자질'이 없다고 보았다;
  17. 실제로는 M1919는 "ㅅㅂ 나치새끼들은 버튼 하나로 총열 가는데 우리 건 일일이 풀고 조이고 영점까지 새로 잡아야 돼."라는 악평을 듣는 동안 MG42는 '히틀러의 전기톱'이라는 별칭까지 얻었으며, MP40은 위력은 낮지만 집탄률이 더 좋았다.
  18. 당시의 중국은 사실상 반식민지 상태라서 경제의 상당부분이 일본을 비롯한 해외 자본의 소유가 된지 오래였다.
  19. 외교 관계자들은 "대체 높으신 분들의 체면 때문에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희생당해야 하는가?"
  20. 루거우차오 사건 당시 29군 지휘관. 그리고 그 소극적 태도로 29군은 물론 베이핑을 말아먹는다(...).
  21. 근접전 교육 시 백병전에 돌입하더라도 가능하다면 반드시 화기를 장전해 두라고 했다.
  22. 그런데 일본 극우 일부는 이게 일본군에게 배워서 이긴 것이라고 정신나간 개소리를 하기도 한다. 물론 대다수는 '그런 일본은 비참하게 패했는데 뭔 헛소리'냐며 비웃는다. 김형배 만화 황색탄환에서 일본인 종군기자가 한국군 차량을 얻어 타고가는 주제에 이렇게 한국군들에게 잘난척하다가 한국군들에게 그런 네놈들은 전쟁에 패한 주제에 다른 나라가 이겨가니까 그것에 지네 자존심 들여 헛소리하냐며 내쫓기고 카메라통까지 발길질로 논두렁에 처박히는 장면이 나온다.
  23. 사실 기무라 마사토미 같은 일부 개념잡힌 일본군 지휘관들은 자기 부대는 기체 고장이라느니 하는 핑계로 명령불복종을 하긴 했다. 단, 이건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 그리고 가미카제의 경우도 예외적으로 특공 대신 통상공격을 한 부대도 있었다. 일례로 시가 요시오 휘하의 343 해군항공대라든가..
  24. 다른 시각도 있다. 저 유명한 커티스 르메이 장군처럼, 미군 수뇌부는 일본인을 더 이상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게 됐기에 핵을 쓰는데 거리낌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25. 미군의 2차대전 당시의 교육 영상중 하나엔 총검만으론 적을 찔러봤자 쓰러진 적이 쏜 총에 당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백병전에서도 총이 최우선이니 탄창부터 채워두라는걸 강조하는 장면이 있다.
  26. 특히 산탄총 분야는 사실상 미국의 종특이나 다름없었다. 2차대전 때까지 산탄총을 전군에 보급할 수 있는 경제력을 자랑한 군대는 오직 미군밖에 없었다.
  27. 사실 대함이 아닌 대전차 전술로도 같은 이름으로 불리던 게 있었다고 하긴 한다. 폭탄을 안고 땅 속에 숨어있다가 전차가 그 위를 지나가면 투쾅!!!해버리는 자폭전술. 이걸 대응하기 위해 미군이 만든 게 M4 셔먼의 현지 개수형 중 하나인 불도저 전차.
  28. 수냉식 기관총을 경기관총마냥 혼자서 들고 싸운 건 매우 특이한 경우로 미군 전체에 일반화시키기에는 곤란하다. 다만 수냉식 기관총 자체가 경량화를 포기한 대신 지속사격능력을 극대화시킨 무기로, 1차대전 당시 아군 참호로 돌격하는 적 보병을 그대로 갈아버린 물건이다. 그리고 일본군의 반자이 어택은 딱 1차대전식 보병돌격이다. 당연히 평범하게 운용되는 수냉식 기관총도 제 몫을 충분히 했다.
  29. 밴드 오브 브라더스 1화 후반부. 강하준비중인 미군 병사들 중에 고향 경찰서장에게 리볼버를 택배로 선물받은 사람이 있었다. 아니 유럽전선의 BOB까지 갈 것도 없이 바로 이 반자이 돌격이 나오는 더 퍼시픽 오키나와 전투편에서 맛이간 슬렛지가 사격 중지 명령을 생까고 개인 권총으로 부상을 입고 빌빌대는 일본군의 머리에 확인사살을 가한다.
  30. 지금도 영화나 소설 등에서 자주 나오는 구두닦이나 "호외요 호외!"를 외치며 신문을 파는 어린이들은 그 당시 사회상의 반영이다.
  31. 리처드 파인만도 입대하려고 신검을 봤다가 특유의 사고방식이 문제가 되서 떨어졌고, 대신 다른 방법으로 복무했다.
  32. 헐리우드 최고의 아이돌이었음에도 위험천만한 폭격기 조종사로 임관한 제임스 스튜어트클라크 게이블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히틀러는 "게이블이 탄 폭격기를 잡으면 훈장이던 상금이던 뭐든지 주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미군 폭격기 승무원들은 25회를 채우면 제대했지만, 그 절반도 못채우고 전사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33. 당대 최고의 투수였던 밥 펠러는 라디오에서 진주만 공습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입대 신청을 해서 해군 대공포병으로 무려 8개의 무공훈장을 받았다. 더욱이 펠러는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기에 징집 대상자도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당대 최고의 타자인 테드 윌리엄스도 자원입대했다.
  34. 뒷날 대통령에 오른 존 F. 케네디는 심각한 호르몬 질환 때문에 이미 한번 면제 판정을 받았는데도 아버지의 인맥으로(!) 최전방으로 자원 입대하여 PT-109의 정장으로 참여했고, .그의 형인 조셉 케네디는 아프로디테 계획에 자원했다가 순직했다.
  35.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공수부대에 입대하려다 실패한 청년들이 자살했다는 참전용사의 증언이 있다.
  36. 그렇다고 병역비리를 안 저지른 건 아니었다. 그러나 병역비리 저지른 사람들은 당연히 전후 엄청난 비난을 들어야 했다. 다른 사람은 가고 싶어서 난리인데 사고도 아니고 비리로 안 갈 정도면 왕따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37. 군부의 의도대로 이런 저학력자들은 지식인들과는 달리 군국주의적 사상 교육에 물들기 쉬었고, 이는 해외 점령지에서 벌어진 온갖 전쟁범죄의 원인이 되었다.
  38. 기관총이나 척탄통을 들면 근접 공격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발동할 수 없다. 하지만 96/99식 기관총의 경우엔, 총검을 언락했다면 반자이 공격을 시전 할 수 있다(...) 기관총을 들고 반자이를 하는데도 의외로 잘 달린다. 리치가 조금 애매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100식 기관단총에 총검단 것보다는 길어서 편하다
  39. 물론 M1903 스프링필드 소총도 있지만 굳이 개런드를 놔두고 볼트액션 소총을 쓸 필요는 없긴 하다. 공방에서 이 소총을 들고다니는 사람은 그냥 개런드의 가늠자가 시야를 가린다고 싫어하거나 개런드가 질려서 볼트액션 소총의 손맛을 느끼고 싶다던가 아니면 라이징스톰을 구매하지 않고 레드 오케스트라 2만 있어서 라이징스톰의 체험만 가능한 사람들.
  40. 직역하면 "우릴위해 죽어주는구만"
  41. 마지막 단말마가 "덴노 헤이카 반자이"로 들린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