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역대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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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Publius Licinius Valerianus : 200?~260?) 제위 기간 253년~260년
공화정 때부터 이어진 명문 집안인 리키니우스 일족 출신.[1] 트레보니우스와 아이밀리아누스 사이에서 내전이 일어났을 때 군사를 일으켜 내전의 승자인 아이밀리아누스를 쓰러뜨리고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후에는 방어선을 정비하고 장군감인 인재들을 발굴하고 양성하는데 힘썼으며ㅡ이 중에는 나중에 황제가 되는 아우렐리아누스와 프로부스가 있다ㅡ 아들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여 적들의 침략에 대비했다. 또한 기독교를 탄압하여 로마 주교 식스투스 2세와 카르타고 주교 키프리아누스가 순교했다.
하지만 그가 한 어떤 일보다도 유명한 사실은, 그가 포로가 된 황제라는 사실이다.[2] 260년 사산조 페르시아와 맞붙었는데 상대가 그 샤푸르 1세였다.. 샤푸르 1세의 계략에 당해 휘하 병사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고 이 사실이 로마 전역에 퍼지면서 그 영향으로 로마는 팔미라 제국, 갈리아 제국으로 세 조각 나 버린다. 그가 한 어떠한 업적보다도 포로가 된 황제라는 사실만이 역사에 남아버린, 참 뭐라 말 할 수 없는 황제다. 게다가 아들 갈리에누스는 아버지가 남긴 여파에 휘말려서 혼란을 수습하느라고 8년을 부지런히 뛰어다녔으나, 결국 부하 기병대장인 아우렐리아누스의 손에 죽었다.
이 사람이 포로로 잡혔다는 것은 로마의 위상과 국력이 저하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였다. 그후 역사서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포로가 되어 지방 곳곳에 끌려 다니며 샤푸르 1세의 승리를 입증하는 살아있는 증거로서 사람들의 구경 거리가 되었고 그후로도 샤푸르 1세가 말에 올라탈 때마다 인간 하마비[3]가 되며 결국 로마제국으로 끝끝내 되돌아가지 못하고 그 곳에서 옥사했다. 더 안습한 것은 일부 기록에 따르면 황제가 사망 후 가죽이 벗겨져 그 속은 지푸라기가 채워지고 박제 인형이 되어 샤푸르 1세의 대승을 기념하는 증거로서 신전에 전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야사에 불과할 뿐 과장되었다는 설도 있는는데 실제로는 황제가 포로가 된 지 1년여 만에 홧병으로 사망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실상 황제가 그 정도로 가혹하게 당했다면 로마 측에서도 나중에 국가를 재건한 뒤 정식으로 문제삼던지, 보복할 때 명분으로라도 썼을 텐데 그런 사례가 전혀 없으며 또한 사산 왕조 입장에서도 외교적 문제 때문에 실제로 가혹행위를 해서 좋을 것은 없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했을수도 있다는 측에서는 샤푸르 1세와 발레리아누스가 대군을 이끌고 대규모 전투를 치룰정도로 양국간의 사이가 벌어질때로 벌어졌으며 로마제국은 황제가 직접 참전했음에도 전투에서 크게 대패하고 사로잡힐 정도로 과거 주변국가들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패권을 누렸던 제국이 더이상 아님이 명백하게 입증되었는데 대규모 전쟁에서 로마제국군을 갈아버릴 국력을 과시하던 당시 사신조 페르시아 국가에서 자신들의 업적을 과시했으면 과시했지 필요이상으로 사이도 안좋은 적대국에 대해 그렇게 눈치를 봤겠냐는 의견도 존재한다.- ↑ 카이사르-폼페이우스 와 함께 1차삼두정치 에 참여한 크라수스 의 일족 이다.
- ↑ 최초로 로마 황제가 적군과 싸우다가 포로가 된 사례다. 그로부터 118년 후인 378년 로마 황제 발렌스가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서고트족과 싸우다가 전사하면서 최초로 적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사례도 생겼다. 로마 제국이 워낙 쿠데타, 내란, 암살 등이 자주 일어나 제국 내에서 로마 황제가 포로가 되거나 전사한 것은 간간히 있었지만 적군과 싸우다가 포로가 된 사례는 이것이 처음이다.
- ↑ 한마디로 황제에서 말에 올라타고 내릴때 살아있는 발판이 되어줬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