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Unternehmen Walküre.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국방군과 나치스가 비상시를 대비해서 세운 계획.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수백만에 달하는 유대인, 집시, 폴란드·러시아·프랑스·체코 등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포로를 독일로 끌고 와 강제노동을 시켰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해놓고 보니 이 외국인 노동자들과 포로들이 독일 내에서 반란을 일으킬 것이 걱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국방군 정보국(Abwehr)장 빌헬름 카나리스(Wilhelm Canaris) 해군 대장이 독일 내에서 반란이 일어날 때를 대비한 비상계획을 수립할 것을 아돌프 히틀러에게 건의하였고, 히틀러는 이를 받아들여 독일 보충군[1] 총사령관인 프리드리히 프롬(Friedrich Fromm) 육군 상급대장에게 비상계획을 수립할 것을 지시한다. 프롬 장군은 국내 보충군 참모부장인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Friedrich Olbricht) 육군 보병대장에게 이를 일임하였고, 올브리히트 장군은 1942년 10월 13일에 이 작전을 입안하게 된다.
2 세부계획
이 작전은 독일 안에서 외국인 노동자들과 포로들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보충군을 소집하여, 독일 국내의 국방군 및 무장 친위대가 모두 보충군의 지휘 아래 놓이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독일의 모든 시설들을 장악하고 군법회의까지 설치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비상시에 작전의 발동 권한은 보충군 총사령관 프롬 장군이 갖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작전을 입안한 올브리히트 장군은 독일 국방군 내 반히틀러 비밀조직 '검은 오케스트라(Schwarze Kapelle)' 소속이었고, 계획 수립을 건의했던 카나리스 제독은 애당초 반나치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던 데다가 한술 더 떠 검은 오케스트라의 창설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래서 검은 오케스트라는 이 계획을 1944년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 시도[2] 때 히틀러를 암살한 이후 독일 국내를 장악하는 용도로 쓰려고 계획했으나, 막상 거사 당일 발키리 작전이 발동된 이후에 계획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던 히틀러 암살이 실패한 것으로 드러나는 바람에 쿠데타 역시 실패하였다.
사실 실패할 만한 것이, 수도 베를린의 주요 권력기관을 점령해야 하는 실전부대를 장악하느냐가 쿠데타의 성공여부를 좌우하고 있었는데, 이 부대를 음모자들이 확실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발키리 작전 계획에 따르면 수도 내 권력기관들을 장악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지정된 부대는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 소속 수도경비대대(베를린 주둔)였는데, 이 부대의 총원은 고작 4개 중대였는데다가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 자체가 육군 내의 친위대라고 불릴 정도로 나치 이념에 충실한 병사들만이 입대할 수 있었다. 이런 부대를 단순한 지휘명령권 하나만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쿠데타에 투입(?)한 음모자들이 실수를 한 것이다. 실제로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 수도경비대대의 지휘관인 오토 에른스트 레머 소령(사건이 마무리된 이후 대령으로 특진, 다시 소장 진급)은 검은 오케스트라 소속 지휘관들의 명령을 받고 파울 요제프 괴벨스를 잡으러 갔다가, 괴벨스가 히틀러의 생존을 주장하며 직접 히틀러와의 전화통화를 연결하였기 때문에 쿠데타를 꾸민 지휘관들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리어 진압 작전에 나섰다.
그 드라마틱한 전개 때문에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으며, 가장 최근에는 브라이언 싱어 감독에 의해 2008년에도 영화화. 한국판 제목은 작전명 발키리다. 톰 크루즈 주연.
하인츠 구데리안은 자기의 회고록("기계화 부대장")에서 음모자들이 자기를 방문하여 가담을 요청했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이유는 히틀러 암살에 성공할 경우 국방군 총사령관에 등극할 베크가 우유부단한 인물이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 구데리안은 베크와 사이가 아주 안 좋았는데다가 철저한 히틀러 지지자였으니 믿기는 힘들다.
- ↑ 보충군이란 예비군과 비슷한 개념인데, 독일 국내의 13개 군관구 전체를 통제하는 행정사령부로서, 각 군관구는 각 사단과 직결되어 신병 모집 및 동원병력 보충, 국내에서의 군사훈련 등 군정 업무를 맡았다.
- ↑ 히틀러를 직접 암살하는 임무는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가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