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결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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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양산향교에 걸려있는 백결선생의 영정이다. 실제 초상화가 아니라 상상화. 박제상 영정과 나란히 걸려있다.

百結先生 (삼국사기)

411년? ~ ?

백결선생(百結先生)은 어찌한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낭산 기슭에 살았는데, 집안이 매우 가난했고, 옷을 백 번 씩 기워 입어 노닥노닥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동네의 백결 선생이라고 불렀다. 일찍이 영계기의 됨됨이를 존경해서 거문고를 추구하며 무릇 즐거움, 노여움, 슬픔, 기쁨, 불평을 모두 거문고로 표현했다. 어느 연말에 동네 이웃들이 곡식을 방아질하자 그 아내가 절구 소리를 듣고 말하길, “남들은 방아질할 곡식이 있는데, 홀로 우리만 없으니, 어찌 해를 넘길꼬?” 선생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하길,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달린 것이요 부유하고 가난한 것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오는 것을 막을 수 없고 가는 것을 쫓을 수 없는 법이라. 너는 어찌 슬퍼하는가. 내 너를 위하여 방아 소리를 만들어 위로하리다.” 이에 거문고를 뜯어 방아 소리를 내었다. 그것이 세상에 전해져서 〈대악〉이라고 한다.

삼국사기 제48권 백결열전

대악(碓樂)은 자비왕(慈悲王) 때 사람인 백결(百結) 선생이 만들었으며...

삼국사기 제32권 잡지 제1 - 악(樂) 中

참고로 '백결'이라는 이름은 본명이나 존칭이 아닌 일종의 별명이었다. 백결 선생은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옷을 백 군데나 기워 입었고 다녔는데, 그 모습이 대단히 추레하였다. 이를 본 사람들이 '일백 백 자(百)'에 '꿰멜 결 자(結)'를 써서 '백결 선생'이라는 별명을 붙여서 불렸다고 하니, 결코 '선생'자가 붙었다고 높여 부르는 말은 아니었다는 소리(...).[1]

비록 가난해서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으나 거문고를 타면서 세상의 근심을 잊곤 하였다. 섣달 그믐날에 아내가 이웃집에서 울려오는 떡방아 소리를 부러워하며 "남들은 다들 곡식이 있어 떡을 만들어 먹으며 새해를 맞는데, 우리는 이게 뭔가?" 하며 신세 한탄을 하였는데, 백결선생이 이를 듣고는 거문고를 연주해서 아내에게 떡방아 소리를 들려주어 위로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때 백결선생이 들려준 떡방아 소리는 후세에 전해져 <대악>(碓樂, 방아타령이라고도 불린다)이 되었다.[2]

삼국사기에 열전이 기록되어 있는데, 딱 방아타령을 만드는데서 끝이라 그 외의 행적을 알 수 없다. 대부분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해 다룬 삼국사기에서 소개된 몇 되지 않는 예술가였다는데에 큰 의의가 있다.[3]

박씨 종친회등에서는 백결선생이 박제상의 아들이며 이름은 박문량이고 자비왕 때 경주시 낭산 기슭에서 살았다고 하며 왕에게 충고하는 상소를 올려서 이름이 높았고 그 상소도 너무나 유명하다고 하지만 실제는 확인된바 없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위에서 보듯이 어찌한 사람인지 모른다. 즉 가문이 한미하다는 걸 나타낼뿐이다.

가끔 아동 대상의 동화책이나 역사책 등에서는 여기서 끝나면 너무 불쌍해서인지 방아타령에 감동한 동네 사람들이 밥을 준다거나, 혹은 관청에서 쌀을 내려 준다거나, 하늘에서 쌀가루가 내려와 그걸로 떡을 해먹었다거나 하는 식의 뒷이야기를 붙이는 등 상당히 다양한 결말이 존재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런거 없고 그냥 그대로 끝(...).꿈도 희망도 없어

참고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1. 어쩌면 대단한 재주를 지니고도 청렴한 삶을 살았던 것에 대한 존칭일수도 있다.
  2. 이 외에도 잠을 자는 중에도 거문고를 연주해 아내가 툭 건드리니 화들짝 깨면서 거문고를 껴안은 그런 일화도 있다. 어떤 책에서는 아예 힘겹게 구한 곡식을 가져다가 거문고로 떡방아를 찧어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3. 이 외에도 황룡사 벽화를 그려 유명해진 신라시대의 화가인 솔거 등이 소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