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상

朴提上
363년 ~ 419년

싸이... 는 박상이다.

1 소개

신라의 관료이자 충신(忠臣).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기록되었으며 파진찬 물품(勿品)의 아들로, 이름을 모말(毛末)이라도 한다고 알려졌다.[1]

2 생애

삽량주(경상남도 양산시)의 간(干) 벼슬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간은 거서간, 마립간 할 때의 그 간과 같은 글자다. 선대의 거주지는 경주였으나 양산 일대를 중심으로 나름의 세력을 구축한 세력가였던 것으로 본다.

실성 마립간 때 각각 고구려눌지 마립간의 동생들이 볼모로 갔다. 박제상은 눌지 마립간 2년(AD 418년)에 고구려로 가서 장수왕을 설득하여 눌지 마립간의 아우인 복호신라로 데려오는데 성공하였고 그 해에 로 건너가 왕조와 접촉하여 자신은 신라를 배신하고 왜인(倭人)으로 귀화하러 왔다고 왜왕(倭王)을 속이면서 눌지 마립간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을 신라로 도망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 이 사실이 왜왕에게 알려지면서 결국 왜왕을 속이고 죄인을 방도하게 한 장본인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이 때 삼국유사의 내용에 따르면 왜왕은 '왜국의 신하가 된다면 상을 내리고 계림의 신하로 남는다면 온갖 형벌을 가할 것'이라고 회유협박했지만, 제상은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에 목도(木島)로 유배를 보냈다가 그를 끔찍한 고문 끝에 불태워 죽이게 되면서 419년 에서 사망하였다. 신라의 눌지 마립간은 박제상의 이 같은 충정에 보답하고자 그의 차녀를 미사흔의 아내로 맞아들였으며 대아찬 관품을 추증하고 포상을 내렸다.

다만 삼국유사에서는 성씨가 김씨(金氏)로 적혀있으며[2] 눌지 마립간 10년(AD 425년)에 제상이 고구려로 몰래 입경하여 왕의 아우 보해와 함께 도망치게 되었고 로 건너가서는 자신은 신라 따위를 버리고 왜인이 되기 위해서 에 오게 되었다고 왜왕을 거짓으로 속이고나서 왕의 아우 미해를 신라로 도망치게 했으나 이 사실이 왜왕에 의해 알려지게 되고 제상 자신은 체포되어 왜왕이 고문을 하면서 진심으로 왜의 신하가 된다면 후한 포상과 벼슬을 내리겠다고 제안하자 제상은 나는 이미 계림(신라)의 개돼지로 있는 몸이니 너희 왜놈들 개노릇은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계림의 벌이라면 달게 받겠지만 왜놈들의 벌을 받느니 차라리 죽겠으며 왜놈이 주는 상과 벼슬은 절대 받지 않겠다고 말하다가 고문으로 처참하게 죽었다고 나와있다.

박제상의 처도 매우 유명하다. 그녀가 딸들을 데리고 가 보이는 바닷가로 가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돌이 되어 죽었다는 망부석(望夫石) 일화의 주인공이 바로 박제상의 부인이다. 박제상이 출발할 때 그녀는 이를 듣고 쫓아갔으나 남편을 만나지 못했고 망덕사 정문의 남쪽 모래벌에서 아무렇게나 누워서 오래 울었다. 그래서 그곳의 모랫벌을 '장사(長沙)'라고 이름지었다고 하며, 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부축하고 돌아오려고 했지만 어지간히 상심했는지 부인의 다리가 풀려서 앉은 채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 땅을 '벌지지(伐知旨)'라고 이름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박제상의 처가 남편을 기다렸다는 곳은 경상북도 경주시울산광역시의 경계에 있는 고개인 '치술령'(14번 국도)이라는 고개라고 전해진다. 오늘날에도 이곳에는 박제상 사당이 있으며, 박제상의 처는 죽어서 '치술신모'라는 이름의 치술령 산신으로 모셔졌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치술령 정상에는 이곳에 치술신모를 모신 '신모사'라는 사당이 있었다는 표시가 있으며 치술령 아래에 살던 사람들은 비가 오지 않으면 치술신모에게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치산서원으로 확대됐고, 없어졌다가 1993년 서원은 다시 복원됐다.

일본서기에는 박제상의 이름을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삼국사기에 나온 이름 모말+존칭어미 또는 관직명 질지 인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서는 모마리질지가 일본에 볼모로 온 신라 왕자 미질기지 파진간기(미사흔 파진찬)을 신라로 빼돌리고 붙잡혀 화형을 당했으며, 일본군이 보복으로 모마리질지가 다스리던 초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약탈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박제상의 가문 행록에는 그의 아들이 백결선생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는 나와있지 않다.

3 기타

  • 신라의 박제상이 썼다고 환빠들이 주장하는 서적으로 부도지가 있다. 해당 문서 참조.
  1. 이로 보아 '提上'의 훈독이 '모말'인 것으로 보인다.
  2.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성씨 기록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로 들면 이사부가 있다. 이러한 경우 대개 데릴사위 등으로 다른 성씨의 세력권에 편입된 것으로 추정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