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교


普天敎

1 개요

차경석이 창립한 증산계통의 신흥종교. 향후 증산계열 종교의 대세에 무시못할 영향을 주었다.

2 보천교의 창립

1880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난 차경석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 접주接主 중의 한 명으로 관군에 의해 처형당한 차지구車致久의 장남으로, 일찍부터 동학운동에 가담하여 전라북도 순회관巡廻官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증산계통 종교의 비조鼻祖 증산 강일순을 만난 뒤로는 자신의 이종사촌 누이인 고판례를 강일순의 부인으로 추천할 정도로 착실한 제자가 되었다.[1] 강일순의 사망에 따라 흩어졌던 그의 제자들이 1911년 고판례의 종교 체험을 계기로 재집결하여 선도교라는 신종교를 세울 때, 차경석은 중심적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신도들이 크게 늘어나게 되자, 차경석은 교권을 장악하고 신도들과 고판례와의 접촉을 차단하였다. 이에 고판례는 그를 떠나 별개의 종단을 설립하였다. 이렇게 차경석은 교권을 장악하고 보천교를 창시하였으며 본격적으로 교세를 확장한다.

1921년 차경석은 일본 경찰의 체포령과 비상망 속에서도 경상남도 덕유산 기슭의 황석산(黃石山)에서 대규모의 천제(天祭)를 올리고 국호를 <시국 時國>, 교명을 <보화 普化:뒤에 보천교라 함.>로 선포하였다. 이 때부터 교단 안팎에서는 차경석이 천자로 등극할 것이라는 소문이 크게 떠돌아 갑자등극설(甲子登極說)·기사등극설(己巳登極說)로 구체화되고, 민간에서는 차경석을 차천자(車天子)라 부르게 되었다. 1922년에는 ≪보광 普光≫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1924년에는 ≪시대일보 時代日報≫를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는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에 대규모 교당을 신축하였는데, 건축자재를 백두산의 원시림에서 가져다 쓰면서 6백만 신도를 호령할 정도로 교세가 대단하였다.[2][3] 차경석은 천지개벽의 문로(門路)가 자기에 의하여 열린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은 동방연맹(東邦聯盟)의 맹주가 될 것이고 자신이 다스리는 조선은 세계통일의 종주국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1920년에는 전국의 신도를 60방주(方主)의 조직으로 묶고, 55만 7,700명에 달하는 간부를 임명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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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 진정원의 십일전, 나중에 조계사 대웅전이 된다.

교세가 매우 커지자, 천제를 올리면서 제문에 "나라 이름은 대시국(大時國)"[4]이라고 밝히는 등 나라를 세울 것처럼 말하였고, 실제로 차경석은 전라도 정읍에 보천교 총본산인 '십일전'을 세웠는데, 군산항을 통하여 만주에서 소나무를 들여오기까지 하여 조선시대 경복궁 근정전보다 더 크게 세웠다.[5]

3 보천교의 독립운동 지원

보천교는 상해임시정부 설립자금 5만원(현재 추산가 10억원)을 대기도 했고, 보천교가 일제에 주된 감시를 되게 된 것도 독립자금을 전달하려다 발각되어서 였다. 당시에 보천교의 재정간부 김홍규는 독립자금 당시 10만원 (현재 추산가 20억원)을 조성하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투옥되었고,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6] 민족사학자 신채호 선생의 부인(박자혜 여사)은 보천교 간부였고, 독립자금 지원을 위해 만주 정의부 독립군과 보천교 본부를 연결하였다. 이외에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김재봉, 김철수에게도 보천교로부터 많은 독립자금이 제공되었다.

따라서 일제는 증산 계열 교단을 독립운동의 소굴로 보고, 이를 대외적으로는 유사종교[7]라 하여 탄압을 하였고, 내부적으로는 보천교 분열작전에 들어간다. 이에 보천교 고위 간부였던 이상호를 내세워 보천교 혁신운동을 일으키나 실패하고 파문당한다. [8]

그런데 그 독립운동 지원이 차경석의 야망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있다. 즉 자신이 동방연맹의 맹주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확실시 하기 위해 조선의 독립을 지원하고 독립된 후 보천교를 국교로 하는 새 조선의 지도자가 되기 위함이라는 의견이다.

4 몰락

그러나 차경석은 날이 갈수록 강일순에 대한 신앙심을 잃어갔고,[9] 차경석이 1928년에 이르러 아내 이씨로부터, ‘영안을 통하여 보니 상제님의 자리에 삼황오제신이 들어서고 상제님께서 풀대님에 삿갓을 쓰고 보좌를 떠나시더라.’는 말과 ‘삼황오제신은 곧 경석의 아버지 차치구’라는 말을 듣고 혹하여 차치구를 신앙 대상으로 받들고 교리도 유교식으로 바꾸려 했으나, 내부적인 큰 반발을 일으켰다. 이에 보천교 혁신운동에 의해 고위 간부들이 나와 별도로 교파를 차리게 되었다.

또한 1936년에 차경석이 사망하게 되었고, 일제총독부가 유사종교해선령 을 발표함에 따라 교단도 해체되었다. 뿐만아니라 증산계통의 많은 교단들이 해산되었다.[10]

5 후대의 영향

대순진리회의 전신인 태극도의 교주 조철제가 최초로 증산계통 종교에 발을 들일 때 입교한 첫 단체가 보천교였다.[11][12] 그래서인지 조철제는 스스로 천자를 칭하였고 세간에서 차경석이 차천자車天子라고 불러졌듯이 조천자趙天子라고 불러지게 되었다. 유유상종

증산도 1대 교주였던 안세찬의 부친과 조부가 보천교 신자였다고 한다. 보천교를 증산도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것을 보아서 그런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1. 정확하게 보면 착실한 제자는 아니였다. 강일순 본인은 차경석을 제자로 받으면서 "네가 나를 다시 깊은 물로 끌어들이는구나" 라고 한탄하거나, 제자들과 다같이 멱을 감다가 갑자기 차경석의 다리를 붙잡고 "이무기 잡았다!" 라고 외쳤다가 차경석이 "제 다리인데요?" 하자 모르는 척 "어, 그랬냐?"하며 놓아주거나 차경석에게 "천자를 도모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꿈만 꾸는 자도 죽으리라" 등의 미래를 내다본 발언을 많이 하였다.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보천교에 관하여 서울대 윤이흠 교수는 600만 간부만 55만으로 추산, 이화여대 최준식 교수는 303~600만, 1925 미 영사 밀러의 워싱턴 보고서에서는 600만으로 추정.
  4. 강증산이 후천개벽 직후에 세우겠다던 나라이름이다.
  5. 차경석이 죽은 이후 일제는 바로 십일전을 경매에 부쳤고, 조계종단이 십일전 건물을 구입하였다. 이를 분해하여 서울로 가져와 건물을 지은 것이 조계사 대웅전 건물이다. 십일전 시절과 비교하면 건물을 조금 손보고 장식이나 벽화를 불교풍으로 바꾼 점을 제외하면 거의 원형 그대로이다.
  6. 최근 김홍규씨는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7. 일본은 일본 신도, 불교, 천주교, 개신교 이외에 조선에서 발한 종교를 "유사종교"라 하여 인정치 않고 탄압하였다.
  8. 이상호는 이후 1928년, 전북 김제에서 동화교(東華敎)라는 종교단체를 세웠다. 1931년에는 김제에 있던 고판례를 끌어들여 증산계 종교 중에서는 나름 세력이 커졌다. 1936년 차경석이 죽은 후 일제의 유사종교해체령에 따라 보천교 및 기타 종교들이 해산당할 때 동화교 역시 해산당했다.
  9. 그 이유는 아무리 수련을 해도 제자는 커녕 자신도 도통을 할수 없었기 때문이였다. 후대의 교리 해석에 따르면 도통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고송암이라는 도인이 증산에게 초능력으로 반역을 벌이자 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공부를 해도 도통을 할수 없는 구조로 바꾸었다고 한다. 자세한 내막은 여기서 두번째 해석
  10. 다 망한 것은 아니였다. 유사종교해선령 발표 직후인 1937년경 강증산의 외동딸 화은당 강순임이 세운 증산법종교가 창교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11. 출처 홍성렬의 범증산교사
  12. 태극도에서는 이 부분을 오히려 조철제의 꿈에서 증산이 나타나 "나는 구천상제요 너는 옥황상제라" 하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이때는 아직 증산이 사망하기 약 2개월 전이고 조철제는 단 한번도 증산을 만나본적이 없었다. 또 진위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