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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曹溪寺
1 대한민국의 조계종 본산인 조계사
1.1 개요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55(견지동 45)에 있는 사찰이자, 대한불교 조계종의 본사(本寺) 및 본산(本産).[1] 봉은사와 함께 서울 시내 시주 많이 들어오는 사찰로는 쌍두마차
사찰 자체는 아담하지만 국내 최대 종단의 본사답게 경복궁 근정전에 맞먹는다는 매우 크고 아름다운 대웅전이 있으며, 입구에 거대한 일주문이 정문 역할을 하고 있다. 경내에는 천연기념물 제9호인 흰 소나무(白松)가 자라고 있다. 소나무에 대해
아래 항목의 대화정 조계사와는 이름이 같지만, 전혀 다른 사찰이니 주의.
1.2 역사
삼각산 태고사를 이전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1395년 태조 이성계 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실질적인 창건은 1910년의 일이다. 한국 근대사가 그렇듯, 조계사도 짧지만 매우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한국 불교의 불행했던 친일과 민족 투쟁의 역사 중심에 있던 절이기도 하다.
대한제국 시절, 구심점이 될 종단이 없어 계속 들어오는 일본 불교 세력에 밀리기만 했던 한국 불교가 만해 한용운 등 민족적 불교 인사들에 의해 종단을 만들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이에 동대문 밖인 지금의 창신동 창신초등학교 자리에 1902년 원흥사를 창건하였고, 1908년에 각 도의 사찰 대표 65인이 원종(圓宗) 종무원을 설치한다.
원종의 주요한 목표 중 하나는 한양 사대문 안에 절을 세우는 것이었다. 조선왕조 내내 숭유억불로 인해 멀쩡한 절도 방화가 일어나 사라지는 상황에서 도성 사대문 안에 절이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할 일이었던 것. 게다가 1895년까지는 승려는 천민 급의 신분으로, 도성 출입마저 금지되었었다. 이 때문에 사대문 안에 절을 만든다는 것은 억압받았던 한국 불교계에 있어서는 대단한 의미가 있었다. 또한 사대문 안에 절을 세운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시대가 달라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에 3개월 동안 백미 1,000석과 6,000여환을 모아 1910년에 '각황사'를 중부 박동(薄洞)[2]에 있던 동녕위궁(東寧尉宮)을 3,000환에 사서 그 자리에 세웠다. 이 자리는 현 조계사의 바로 옆이며, 이 각황사가 조계사의 전신이다. 각황(覺皇)이라는 이름은 '깨달음의 황제'라는 부처의 별명이기도 하지만, 승려의 도성 입성 금지를 해제하고 도성 안에 절을 세우게 허가해 준 대한제국 황실에 감사한다는 뜻도 담겨 있었다. 그런데 원종의 허가를 맡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 각황사를 설립하고 원종종무원의 설립인가를 한성 부윤에 신청하였는데, 그것이 처리되는 과정에서 나라가 망했다(…).
그런데 원종 종무원의 대표격이었던 이회광(李晦光)은 잘못된 결단을 내리고 만다. 일본 불교의 힘을 빌어 원종을 인정받으려고 했던 것. 일본 불교 조동종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를 원종의 고문으로 추대하고, '연합맹약'이란 것을 맺어 연합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실상은 조동종 밑에 원종이 들어가게 된 형식이었다. 이회광은 인품이 훌륭하다는 글도 전해지는 승려였지만,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야욕을 보지 못하고 친일을 저지른 인물이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전라도 백양사의 박한영(朴漢永)과 화엄사의 진진응(陳震應) 등과 북쪽에서는 한용운(韓龍雲)이 중심이 되어 이회광의 경솔한 행위를 규탄하였다. 이들은 경상도와 전라도에 있는 각 사찰에 통문을 돌려 1911년에 송광사에서 승려대회를 열어 임제종(臨濟宗)을 탄생시킴으로써 북쪽의 원종과 남쪽의 임제종이 양립하는 형세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조선총독부는 원종의 신청을 기각도 승인도 하지 않고 이러한 싸움을 지켜봤는데, 1911년에 사찰령 등을 내려 한국 불교를 조선총독부가 직접 관할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더 이상 일본 불교를 이용해서 조선 침략을 꾀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며, 한국 불교마저도 총독부가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는 이듬해부터 해인사를 시작으로 30본사를 선정하여 사법을 인가함으로써 조선총독부의 직할체제인 30본말사제를 시행하였으며, 곧 임제종과 원종이란 명칭을 못 쓰게 한다. 임제종은 이에 저항하다 강제 해산된다. 이회광과 원종은 곧 '조선불교선교양종각본산주지회의원'으로 바꾸고 존속하려고 했으나, 조선총독부는 이 쓸모없어진 원종의 기관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원도, 승인도 해주지 않는다. 결국 1912년에 원종은 사라진다. 그러나 원종의 친일적 주지승들은 '삼십본산연합사무소'로 들어가 종명이 '조선불교선교양종'이 된 한국 불교 30본사 전체를 총괄하게 된다.
한편 강제 해산당한 한용운을 비롯한 임제종의 승려들은 '임제종중앙포교당'을 '조선선종중앙포교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사찰령에 의거한 30본산제도에 대응하는 한국 불교계의 새로운 대표기관을 세우고자 '조선불교회'와 '불교동맹회' 등을 조직하려고 했으나, 조선총독부 당국의 제지로 실패한다. 이 과정에서 조선총독부는 불교에 대한 적극적인 발전과 포교를 지원해주겠다고 교묘하게 회유하였으니, 과거 조선시대 600년동안 천민 취급을 받던 승려들은 이에 감격하여 많은 수가 친일로 빠져들어갔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 역시 30본산제 체제의 안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용운 등 지각있는 승려들은 서서히 민족적인 사상을 가다듬으면서 3.1 운동, 만당(조선불교청년총동맹) 등을 주도하며 일제에 대한 저항을 계속 이어나갔다.
1915년경의 각황사로 보이는 사진[3].각황사 건립 당시(1910)와는 모습이 달라졌다. 1913년 스리랑카에서 승려 '달마바라'가 부처의 진신사리를 들여왔고, 각황사에 봉안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각황사가 누추하다고 판단되었는지 잠시 동대문 밖 원흥사에 잠시 안치한 후 각황사 대웅전을 일본식 건물로 개축한 후 가져왔다. 사진 위 중앙의 큰 건물이 개축한 일본식 건물이며, 옆의 것들은 부속된 전통방식의 절 건물로 보인다. 사리는 현재 조계사 앞마당에 있는 7층 석탑에 봉안되어 있다. 앞의 보성중학교(보성고보)가 지금의 조계사 자리다. (보성고보는 고려대학교의 전신이기도 하다.)
이후 약 15년 후인 1930년경에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절인 박문사(博文寺)를 건축하고 모든 불교의 총본산으로 하려는 야욕을 드러낸다. 그러자 한국 불교 중 뜻있는 인사들은 이를 저지하려고 했고, 1935년에 한용운과 해인사 주지 회광, 마곡사 주지 만공 등이 주축이 되어 '31본산주지회의(30본산 + 화엄사)'를 열고 총본산 설립과 '조선불교선교양종종무원'이라는 대표기관의 구성, 각황사 교당 개축을 결의한다. 이에 1937년에 커다란 보천교 십일전 건물을 매입하여 각황사의 옆자리에 새로 절을 건축하기 시작했고, 1938년에 완성하자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太古寺)를 이전하는 형태로 태고사로 개칭하였다. 한국 조계종의 창시자였던 태고 보우국사를 모시던 태고사를 이어받겠다는 의지이자 한국 조계종의 본산에 어울리는 이름을 가지려고 했던 의도가 있었다. 각황사는 1938년 현재의 조계사가 완공된 후 건축비용 마련 차원에서 다른 사람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이후 일본식 본당 등이 철거되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1941년 조선의 사찰 및 승려를 통할하는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이 인가를 얻어 조선불교 조계종이 발족되었다.
해방 이후인 1954년에는 대처승[4]과 같은 왜색불교 정화운동의 과정 중 안국동의 선원에 있던 비구승[5]들이 태고사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후 이들은 서로 갈등을 빚어 원래의 태고사란 이름과 비구승들의 조계사라는 이름이 같이 붙게 되었는데, 결국 1954년 이러한 감정은 '비구승 vs 대처승 분규 사건'으로 폭발하였고, 이승만 대통령 등의 지원[6]에 힘입어 비구승들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비구승의 주도로 1962년 통합종단으로서 대한불교조계종이 세워지자 태고사 역시 조계사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쉽게 말하면 끝까지 동정을 지킨 승려들이 다른 절로 들어가 타락한(?) 승려들을 쫓아내고 절을 차지한 것[7] 비록 과정은 좀 문제가 있었지만,[8] 전통적인 비구승들이 일본의 영향을 받은 대처승들을 몰아냈다는 점은, 불교계가 전통적인 것으로 부분 회귀하는 것에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후 조계종은 내부 분규 사태나 지나치게 순수불교를 지양하면서, 정작 전통불교에서 멀어지거나 무리한 불사 등으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근본주의 항목 참조.
여기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친일과 민족이 뒤섞여 있는 것이 조계종과 조계사 그리고 한국 불교의 역사다. 전체를 친일이냐 민족이냐로 규정하기 전에 상당히 불행했던 역사임은 틀림없다. 이러한 역사가 흑역사로 느껴지는지 많은 글에서 조계사의 이러한 역사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간략하게 서술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조계종/태고종이나 조계종/태고종 주도로 펴낸 불교관련 서적과 일반 학자들이 쓴 불교사 책[9]를 비교해 보면 여러 부분에서 차이가 있지만, 특히 이 부분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온다. 일반 학자들이 쓴 책이 중도적인 입장에서 서술한다면, 각 종파 측에서는 유혈충돌 부분은 최소화하면서 자기 종파의 정통성 강조에 특히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1.3 시설
사실 대웅전이 9할을 먹고 들어간다
1.3.1 대웅전
대웅전에는 3명의 부처님을 봉안하여 이를 삼존불이라고 부른다. 좌로부터 각각 아미타여래(아미타불), 석가여래(석가모니불), 약사여래. 이 세 부처는 대웅전 크기 때문인지 법당 내에 모셔놓은 불상 중에선 국내에서 제일 크다. 실제로 가 보면 크기에 압도된다. 그리고 그 오른쪽 아래에는 미니사이즈 석가모니불이 있는데 이는 대웅전 중수 당시 영암 도갑사에서 모셔 온 불상이다
조계사 대웅전은 1.6m 높이의 돌 기단 위에 34개의 아름드리 나무 기둥을 세워 정면 7칸, 측면 4칸이며 정면 30m에 측면 17m이다. 원래 십일전보다는 대웅전이 약간 작고, 부분적으로 다르다고 하지만 정확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 사진상으로는 거의 비슷한 느낌이다. 아무튼 조계사 대웅전만으로도 정말 큰 건물로, 이는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근정전에 맞먹을 정도다.
다만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근정전보다는 좀 작다. 일단 근정전의 기단은 이성석축기단(二成石築基壇)이기에 조계사 대웅전의 석축은 가볍게 뛰어넘는다. 그리고 아마 이 점이 오해의 원인이겠지만, 근정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조계사 대웅전보다 칸 수는 적지만 오히려 면적은 정면 30m에 측면 21m로 더 넓다. 1칸의 길이가 근정전이 훨씬 커서 일어난 오해일 것이다. 높이 또한 단층인 조계사 대웅전보다 중층팔작(重層八作) 지붕인 근정전이 당연히 더 높다. 다만, 사실 근정전도 경회루에는 데꿀멍 한다.[10]
그러나 확실히 이 건물은 상당히 건방진데(…), 지붕 아래 삐죽 삐죽 가득 튀어나와 있는 공포의 형식에서 그러한 면을 느낄 수 있다. 조계사 대웅전의 공포는 외부 5출목, 내부 7출목으로 근정전보다 외부, 내부 모두 2출목씩 많다. 부분적인 형식면에서는 조선의 정궁보다 위에 있는 건물인 것이다. 그래서 이 건물을 보고 있으면 유난히 높고 화려해 보인다.
아래 문단에서 나오듯 원래 증산종교 계열의 보천교 본당으로 쓰던 건물이었기에, 기본적으로 문짝 등에 새겨져 있는 화려한 조각들이 불교와는 맞지 않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조계사에서는 구조 결함으로 대웅전을 해체 보수하면서 어느 정도 내부구조를 개수했는데, 이 때문에 문화재/역사 관련 학계에서 많은 비판을 들었다.
참고로 현재 대웅전 현판은 화엄사 대웅전 편판의 탁본을 바탕으로 복제한 것인데, 화엄사 대웅전 편액의 글씨는 선조와 인빈 김 씨(仁嬪金氏)의 8남인 의창군 이광(1589~1645)의 것이라고 한다.
1.3.1.1 조계사 대웅전과 보천교 십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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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 진정원의 십일전. 이름도 비범하다.[11]
본래 이 대웅전은 일제강점기 증산계통 종교[12]인 보천교의 본당인 십일전이었다. 보천교의 교주인 차경석(188?~1936)은 전라북도 정읍에 진정원이라는 궁궐같은 집을 지었고, 그 위세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차 천자"로 불렸다. 그런 진정원에 경복궁의 근정전만큼 큰 건물을 본당으로 지었던 것이 바로 이 십일전이다.[13] 1928년에 완공되었다.
그런데 일제가 보천교를 독립운동 지원 혐의[14]를 빌미로 교단을 해체하면서 보천교의 시설들을 압수해 헐값으로 매각하였고, 이때 진정원의 십일전 목자재들을 불교계에서 매입하여 1937년 11월 26일에 지금의 대웅전을 짓게 되었다. 조계사는 대웅전을 완성한 이듬해에 단청을 칠하고 화엄사 대웅전 편액의 탁본을 떠서 현판을 만들고, 전남 영암 도갑사에서 본존불상을 가져와서 대웅전에 안치시켰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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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중으로 보이는 모습
참고로 당시 매각된 십일전의 가격은 당시 돈으로 10,000원이 좀 넘는 어마어마하게 저렴한 가격이[16]었다. 보천교에서 쓰던 크고 아름다웠던 종은(한 번 치면 정읍의 보천교 본당에서 수 km 떨어진 익산까지도 잔잔하게 종소리가 울렸다고 전해진다. 그야말로 흠좀무) 일제가 무기 제조용으로 압수해 간다.
참고로 비슷한 과정을 통해 보천교가 만들었던 보화문 역시 내장사의 대웅전으로 바뀌었는데, 2012년 10월 말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블로그
1.3.2 극락전
1.3.3 관음전
2015년 현재 조계사 앞쪽에 새로이 '관음전'을 중수하였다. 그러나 건물은 그냥 서양식 네모 건물이다. 법당에는 관음좌상이 앉아 있다. 드나드는 사람도 많고 법회도 많이 열려 시끌벅적한 분위기의 대웅전과 달리 이 곳은 그야말로 고요한 좌선실 분위기 그 자체다.
1.3.4 불교중앙박물관
조계사 안에는 불교중앙박물관이 있는데, 여느 절의 박물관과는 수준이 달라서 나름대로 소장품의 질이나 전시의 질이 꽤 좋은 편이다. 한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눈여겨 볼 만한 곳이다.
1.3.5 불교대학
동국대와는 다르다! 동국대와는!
정식 4년제 단과대학이 아니라, 불교에 대해 심층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신도와 승려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체 교육기관이다.
1.3.6 구 조계사종
조계사에 걸려있던 범종. 광복 이후 국보에서 해제되면서 위작이냐 진품이냐를 놓고 논쟁이 뜨거웠지만 현대의 조사 결과 신라시대 범종이 맞다는 것이 대세. 그러나 국보 재지정 논란은 여전히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현재는 경기도 양주시 보광사에 소장 중.
자세한 것은 구 조계사종 항목 참고.
1.3.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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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문 앞에 새로 만들어 세운 사천왕상이 아주 간지와 위엄이 넘친다.(..) 철판을 잘라서 겹쳐 만들었단다. 왼쪽은 광목천, 오른쪽은 증장천.
사실 대웅전은 크지만 기타 건물이나 부지가 좁아서 기본적인 사찰 가람도 갖추지 못한 안습한 느낌도 없지 않다. 차차 정비를 해서 제대로 된 사찰의 모습을 갖춘다고 하는데… 2015년인 지금도 아직은 멀었다는 느낌. 저 웅장한 크기의 대웅전 정도를 제외하면 사찰 건물다운 건물은 대웅전 뒷쪽에 있는 범종루와 극락전밖에 없다. 조계종의 본산이라는 이름에 비해서는 초라한 게 사실. 사실 절의 위치가 서울 도심 한복판이라서 절을 확장하기가 굉장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기사
근처 호텔 부지를 매입해 확장하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여러 가지로 잡음이 많은 듯.
참고로 조계사 바로 옆에 조선 말의 우정총국 건물이 붙어있다.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곳. 한국 최초의 우체국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다. 조계사를 가면 잊지 말고 들르자. 지금은 우정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좀 작지만(…)
조계사 길 건너편에는 '템플스테이'라는 건물이 있다. 여기에는 불교 서적을 파는 서점, 불교 용품을 파는 가게, 템플 스테이 등 불교 관련 프로그램을 취급하는 곳 등이 있으며, 2층과 5층에는 사찰 음식을 파는 발우공양이라는 식당이 있다. 사찰 음식 전문가로 유명한 비구니 대안 스님이 총 책임자를 맡고 있는 식당이다. 2층은 뷔페 식 메뉴와 일품요리 및 도시락, 5층은 좀더 비싼 코스요리를 파는데, 사찰 음식이므로 당연히 모두 채식 요리이다. 불자가 아니더라도 채식이나 사찰 음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볼 만하다. 2층은 그렇지 않지만, 5층은 며칠 전까지 예약 필수. 2층 식당은 적자 누적으로 인해 2015년에 폐업했다.
1.4 사건사고
과거 조계종 내 분규가 일어났을 때마다 투기장으로 전락했던 흑역사가 존재한다. 승려들이 대웅전 기왓장을 뽑아다 던지고 유리조각을 수리검처럼 날리는 일대 활극이 경내에서 벌어졌는데, 이는 조계종의 본산이 조계사이며 교구들의 통합 회의가 이 곳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는 이유는 고질적인 파벌 문제인데, 그 원인은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한국 불교의 25교구본사제는 일제 사찰령에 의한 31본산제로부터 유래한다. 31본산제는 본래 일제의 행정부가 종교를 통제하기 위한 제도였다. 이 때문에 해방 후 일제의 잔채 청산과 자주적 교단을 설립하기 위해 한국불교는 31본산 제도를 폐지하고, 각 도에 교무원을 두는 교무제 실시를 결의했지만, 박정희에 의해 5.16이 발생하고 이후 1962년 통합종단이 발족하면서 다시 도별 교무제를 폐지하고 해방 전의 본산제를 부활된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25교구본사제도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각자 독립되어 운영되던 절들은 이제 본사와 말사로 묶여 파벌이 되었고, 파벌싸움과 비효율적인 교구운영과 의사결정제도가 겹쳐 한국 불교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일단은 1999년을 마지막으로 대대적이지는 않아도 간간히 물리적 충돌이 벌어진다. 게다가 불교계 신문 광고란마다 주지자리 임원자리 놓고 선전광고 띄우며 여론싸움을 한다.
2008년 촛불시위 때 시위 참가자 일부가 한때 은신하기도 했으며, 일부 개신교 교회 인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며 소란을 피우는 사건도 있었다. 자세한 것은 예수쟁이/사건사고 2.7번 항목 참조...
경내에서는 민족 및 불교문화 수호를 위한 집회가 열리기도 하며 2010년 하반기부터 한나라당이 예산안에서 템플 스테이 관련 예산을 삭감한 데 항의하여 일주문에 '한나라당 소속 의원의 조계사 출입을 금함' 이라는 현수막이 한동안 내걸려있기도 했다.
2012년 5월, 성호 스님[17]이 조계사의 전 주지를 비롯 고위 인사들이 호텔에서 수억대 도박판을 벌였다는 폭로를 시작으로 조계사 인사들의 성매수, 몰래 부인 두기, 해외 원정 도박[18] 등을 연쇄적으로 폭로하면서 조계사를 넘어 대한민국 불교 전체가 혼돈의 카오스로 빠져들었다. 저것들이 전부 사실로 밝혀질 경우 1990년대 조계사 투기장 사태에 버금가는, 어쩌면 그 이상의 흑역사로 기록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2013년 전국철도노동조합 파업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수배가 내려진 철도노조 지도부들이 조계사로 피신하여 다시금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15년 11월 민중총궐기를 주도한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이 조계사에 피신해 있다가 자수하였다.
사실 군사독재 시기에도 민주화 운동 투사들이 체포를 피해 명동성당으로 피난하고, 전두환(...)도 5공 당시 비리가 터져나오자 수사를 피해 백담사로 몸을 숨기는 등 대대로 종교시설은 좌우를 막론하고 체포를 피하기 위한 피난시설로 애용되었다. 종교시설은 종교단체와 그 신자들이라는 큰 빽을 업고 있는 만큼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수십만 표 이상이 날아갈 수 있기 때문에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유권자들의 표심 뿐만 아니라 국제 여론 역시도 악화될 우려가 있다. 특히 가톨릭 같은 경우, 비록 성당이 바티칸의 치외법권(...) 같은 건 아닐지라도 국제적으로 정부가 조리돌림 당할 각오를 해야한다. 이때문에 조계사가 현대판 소도라는 비판까지 받고 있으며 종교시설이 공권력까지 막는다는 점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다만 이렇게 종교 시설에 피신하는 수배자들은 상당수가 위에 나온 것처럼 일반 범죄자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가 얽히는 편이라서, 오히려 해당 종교 단체가 중재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애초에 종교 시설에서 잠시라도 해당 수배자들을 보호한다는 것 부터가 '정치적인' 행위.
1.5 기타
여담으로 무진장 큰스님이 거주했던 곳이다. 특이한 점으로 조계사 바로 길 건너에 교회가 존재한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서울중앙교회이다.
162번, 606번, 1020번이 정차하는 정류장은 우정국 앞에 있다. 안국역(162번 한정)이나 경복궁(경복궁역 말고)에서 환승한다면, 위 3개 노선 중 하나를 이용시 좀더 가깝다.
2 일제강점기의 일본사찰 조계사
2.1 개요
일제강점기의 경성부에 세워졌던 일본식 사찰. 위의 조계사와는 다른 절이다. 그 당시에는 위의 조계사는 이름이 태고사였고, 이 쪽이 조계사였다. 현재의 동국대학교 위치에 있던 절로 당시 그 지역를 대화정이라고 불렀다는 것 때문에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동국사처럼 한국에 들어왔던 수 많은 일본 사찰 중 하나였다.
이 당시 이 조계사 소유 부지는 현 동국대학교 뿐만 아니라 장충단공원, 앰배서더 호텔, 그리고 지금의 하숙촌과 대한극장 앞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부지였다고...
이 조계사는 1926년에 조선의 궁궐이었던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을 뜯어와 본당으로 삼았었다. 일제가 경희궁을 송두리채 해체하면서 나온 목재들을 사들여 조립했던 것. 해방 이후 대화정 조계사의 부속건물들은 철거되고, 조계사 부지에 동국대학교 건물들이 세워지면서 본당인 숭정전만 남아있다가 숭정전이 1976년 지금의 위치로 이동되어 정각원이 된 것이다. 숭정전은 건물의 변형이 너무 심해 경희궁으로 반납되지 못했고, 경희궁에는 숭정전을 복원한 새로운 건물이 생겼다. 현 정각원에 대한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고.
바로 옆인 현 신라호텔 자리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절인 박문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2.2 황건문
황건문(皇建門)은 원래 평양의 궁궐인 풍경궁 정문이었다. 크고 시원하게 뻗은 기둥들의 아름다움으로 이름이 높았다. 1925년에 일본사찰이었던 경성 대화정 조계사에서 이 문을 사들여 산문으로 쓰게 된다. 1926년 8월에는 폭우로 인해 황건문 지붕이 반이 붕괴되어 당시 돈으로 2천만원의 피해가 났다.
해방 이후 이 대화정 조계사 자리에 동국대학교가 건립되고 황건문은 동국대학교 정문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1971년 학생회관이 옆에 신축되면서 현대식 건물과의 부조화와 유지보수부실로 인해 학교당국에서 해체/철거하였다. 이후 주춧돌마저 도서관 근처로 치워지고, 현판은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렇게 유일한 풍경궁의 건축은 우리 손으로 폐기물이 되어 사라졌다. 동국대학교의 흑역사 중 하나.
참고로 옆의 박문사에는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을 가져와서 산문으로 삼았고, 이후 흥화문은 박문사 자리에 들어선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쓰이다가 복원된 경희궁으로 반납되었다. 한편 박문사가 뜯어온 경복궁의 선원전은 어디갔는지 알 수 없고, 박문사를 건설한 업체가 신라호텔을 건설했다는 주장이 있다. 포스팅
- ↑ 조계종이 국내 최대의 불교 종파이자 가장 대표적인 종파인 점을 감안하면, 한국 불교의 총본산이라 해도 그다지 지나친 말이 아니다.
- ↑ 현재의 종로구 수송동 조계사 근처.
- ↑ 대한매일신보 연구 (커뮤티케이션북스, 2004)
- ↑ 결혼을 하여 처자식을 가진 승려. 일본식 불교의 영향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주류가 되어 있었다.
- ↑ 결혼하지 않는 승려로, 전통적인 불교에 입각한 것. 비구니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 승려다.
- ↑ 일제 말기에 양산된 대처승들을 불교계에서 쫓아내려고 하였다.
- ↑ 이때 밀려난 대처승들이 만든 종파가 바로 태고종이다.
- ↑ 조계종과 태고종 모두 나중에는 정치깡패까지 동원하였다. 심지어 정치깡패를 머리 깎이고 명목상 승려로 두고 전투원으로 쓰기도 했다.
마치 일본 소헤이들을 보는 듯하다.때문에 당시 고승들은 조계종이고 태고종이고 할 것 없이 멸시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유명한 고승 성철의 경우 나중에 조계종 6대 종정으로 추대되었을 때, 기존 불교계에 항의하는 의미로 종정 취임식장은커녕 종정 재임기간 내내 머물던 절을 떠나지 일은 유명하다(하지만 정작 한국불교의 근본주의화에는 우호적이었다). - ↑ 대표적으로 이이화의 <역사 속의 한국 불교>가 있다.
- ↑ 정면 7칸(34.4m), 측면 5칸(28.5m).
- ↑ 십일(十一)이란 증산교에서 후천개벽(後天開闢) 이후 세계의 흙(土)을 상징한다 카더라.
- ↑ 전라도 사람인 증산 강일순(1871-1909)을 신앙대상으로 삼는 모든 종교를 가리키는 말. 흔히들 강증산이라고 부른다. 보천교주 차경석은 강증산의 마지막 제자였다.
- ↑ 근데 건물의 격은 근정전보다 높다. 흠좀무.
- ↑ 단순한 혐의는 아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천교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지원금을 좀 대고, 물산장려운동에도 일부 참여했으며, 일제가 보천교를 강제 해산시키던 당시에도 독립운동 지원금 조달이 발각된 상태였다. 그러나 1920년대부터 일제의 대동아공영론과 비슷한 주장을 교단에서 발표하며 친일 의혹이 있어 왔으며 이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더욱이 다른 증산 계열 종단들 중에는 친일화 의혹도 없으면서 항일운동을 지원하다 일제의 탄압에 걸린 교단들도 존재했다.(대표적으로 태을교나 미륵불교) 한줄로 요약하자면, 보천교가 항일 운동에 관련된 것은 사실이나 그에 반하는 행동도 있어 일제강점기 다른 종교들에 비해 크게 나을 건 없다. 아무튼 이로 인해 보천교는 다른 독립운동단체/증산 계열 교단들에게서 강한 비판을 받았다. 차경석은 스스로 증산이 말했던 대로 수도하면 도통하리라 생각했으나, 다른 사람은 물론 보천교주인 자신도 도통하지 못하자, 결국 자기가 스승으로 모셨던 강증산을 기만적인 도인으로 간주하고 보천교 교리체계에서 강증산을 없애기로 했다. 유학자들을 불러 유교적인 방향으로 교단의 성격도 바꾸었다. 하지만 강증산을 '천사'라고 부르며 신앙생활을 하던 기존의 보천교인들이 한순간에 이를 받아들일 리도 없어서 보천교가 구파와 신파로 나뉘어버렸다. 이 때문에 보천교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일제의 압박이 거세지고 도통은 못하고 교단은 분열되는 등 문제가 계속해서 생기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지병이 악화되어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차경석이 죽자마다 보천교는 빠르게 몰락했다.
- ↑ 현재는 법당에 모셔져 있는 삼존불 오른쪽 아래에 따로 모셔져 있다.
- ↑ 한용운은 '총본산 건설의 재인식’이라는 글에서 십일전 건물을 두고'이 건물을 새로 지으려면 100만원이 넘게 들어 간다고 하니 참으로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http://veritasest.egloos.com/1756439 참고.
- ↑ 조계사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현 총무원장인 자승 스님의 승적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다니다 멸빈, 그러니까 천주교의 파문에 버금가는 처분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법원에서 멸빈 처분이 무효로 판결이 나면서 현재는 조계사에서 그냥 제적된 상태.
- ↑ 무려 수백억대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