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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4년 봄, 대전에서 안세찬[1] [2]이 창교한 증산도도전, 환단고기를 경전으로 삼는 민족주의 성향의 사이비 종교이다. 도 계통의 종교인 증산(甑山) 계열 종교들 중 하나인데 증산 계열의 종교의 교조인 증산 강일순(姜一淳)을 세상의 주재자인 상제라고 믿는다.[3] 증산도 교단에서는 강일순을 무극제(無極帝)[4]라, 창교주 안세찬을 태극제(太極帝)라, 2대 교주 안경전을 황극제(皇極帝)라 칭한다.
교단 내에서는 강일순의 둘째 부인인 고판례가 1911년에 개창한 선도(교)가 기원이라고 하며, 종통이 고판례를 거쳐 증산도로 전달되었다고 주장한다.[5] 강일순과 고판례의 언행을 담은 도전(道典)이라는 책을 경전으로 삼았고, 수행법으로서 태을주를 중심으로 하는 주문수행을 하며 정기행사로 치성(천주교의 미사, 개신교의 예배처럼)을 지낸다.
1.1 강일순과 고판례
교조 증산 강일순은 1871년 태어나 각지를 방랑하며 수행하던 중 1901년 전주 모악산 대원사 칠성각에서 대도통을 하고 이후 1909년까지 천지공사라 하여 우주와 천지의 질서를 바꾸는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이 때 많은 기행(奇行)과 이적을 행하였다고 하며, 혹자는 미치광이로 취급하기도 하고 혹자는 하느님으로 떠받들었다. 강일순은 이후 "판을 짠다"는 표현으로 천지공사를 진행하는데, 그를 따른 제자 가운데 일부는 강일순이 진행한 천지공사의 변화의 상징인 "도수"를 부여받기도 했다.
강증산은 부인이 3명이었다. 먼저 1891년에 혼인한 정치순(鄭治順)은 강일순이 수행할 때 시종을 들었으나, 이후 이른바 대도통 이후에 시부모와의 불화로 부친이 내치라고 하면서 사실상 이혼하게 되었다.[6] 다음으로 1904년(당시 34세)에 수석제자였던 김형렬에게 처음으로 수부를 세우기로 종용하자 셋째 딸이던 김말순을 추천하였고, 김형렬은 이후 장인 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말순의 나이가 15세 정도로 차이가 컸고, 형렬의 아내가 크게 반대하면서 예식을 미루기만 하였다. 결국 1907년 강일순이 제자인 차경석에게 다시 수부를 세우기를 명하였으므로, 이종누이인 고판례가 사별 이후 5개월째이므로 예식을 올린 뒤 이른바 고 수부가 되었다. 수부란 '으뜸가는 부인네'라는 뜻이다. 증산도에서는 고판례가 수부가 됨이 매우 중요한 종교적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1.2 강일순 사망 및 분열
1909년, 경술국치 1년 전에[7] 강일순은 천지공사의 종료를 선언하고 39세 나이로[8] 사망한다.[9] 이로 인해 당시 강일순이 이야기한 개벽이 도래하리라 믿었던 제자들은 충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고판례는 강일순이 죽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나, 강일순이 영적으로 나타나 자신의 죽음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이후 영적인 혼례식을 거행했다. 1911년에 차경석에게 강일순 탄신 기념 치성을 올리도록 하였다가 깨어난 뒤 강일순의 음성으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고판례가 강일순으로부터 도통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다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고판례는 자신이 강일순의 계승자임을 선언하고, 전라남도 정읍군(지금의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에서 종교성이 매우 강한 집단을 이루었다. 교단명은 공식적으로 정한 바 없으나 내부에서는 선도교(仙道敎)라는 말을 사용한 듯하다.
그러나 고판례의 이종사촌인 차경석과 고판례는 함께 할 수 없었다. 차경석은 이미 동학운동에 깊게 참여했던 명망 있는 사람이었고, 그 자신의 개인적인 카리스마 또한 막강했다. 차경석은 교단 운영에 있어 고판례를 철저히 배제하였고, 고판례는 차경석을 떠나 조종리에서 두 번째 교단을 꾸렸다. 이후 이상호가 보천교에서 분열해 나와 동화교를 차릴 때 고판례를 받들었으나 이상호 또한 교단 운영에서 고수부를 배제하였다. 이에 고수부는 다시 동화교를 나와 오성산에서 은거하다 1935년 사망한다.
1.3 일제 강점기의 상황
이후 차경석의 보천교는 교세가 한때 600만 신도라고 자체적으로 주장할 정도로 흥성했으나 일제의 집요한 탄압으로 차경석 사망 이후 붕괴된다. 증산도 관련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일제는 증산 계열 교단을 독립운동의 소굴로 보고 집요하게 탄압[10]하여 일제시대의 증산 신앙인들은 모두 지하활동으로 연명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독립운동'이라는 게, '보천교를 믿다 보면 일제가 몰락하고 교주 차경석이 조선의 임금이 된다'는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차경석 본인이 직접 천자를 칭한 적은 없으나 제를 올리면서 제문에 "나라 이름은 대시국(大時國)"이라고 밝히는 등 나라를 세울 것처럼 말하였다. 아마 직접 말은 안 했어도 자기가 도통한 뒤 군주가 되리라 믿었던 듯하다. 이 때문에 다른 제자들에게서도 말이 나왔는데, 사실 차경석은 강일순의 제자들 중에서도 굉장히 늦게 들어온 사람이었다.
더하여 독립운동자금으로 쓴다며 모은 거액의 돈 중 '실제 독립운동' 계열로 흘러들어간 것 중 상당수의 자금은 앞의 '독립운동', 즉 차경석이 천자가 된다는 허상을 부풀리는데 쓰였다. 보천교 내부에서는 일제를 상대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 상당한 진통이 있었다. '차천자의 꿈'에 보면 당시의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차경석은 처음에는 강일순을 신앙함으로써 정말로 도통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날이 실제로 보천교까지 세우고 자신이 신앙생활을 실천해도 강일순이 말했던 것과 같은 도통을 얻을 수 없었다. 차경석은 날이 갈수록 강일순에 대한 신앙심을 잃다가, 결국 강일순을 기만적인 도인 정도로 간주하게 된다. 이에 차경석은 보천교의 신앙체계를 강일순을 중심으로 한 신앙체계에서 유교에 가까운 신앙체계로 바꾸려고 했고, 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을 모아 성리학+종교 정도로 만들려고 했다. 이에 보천교 신자 전체는 차경석이 바꾼 신앙을 따르는 신파와 예전대로 강일순을 신앙하는 구파로 나뉘어 큰 분쟁거리가 된다.
차경석은 전라도 정읍에 보천교 총본산인 '십일전'을 세웠는데, 군산항을 통하여 만주에서 소나무를 들여오기까지 하여 조선시대 경복궁 근정전보다 더 크게 세웠다.[11] 십일전을 세우는데 차경석은 큰 교세를 기울였다. 원래 그 안에는 강일순을 봉안했지만, 차경석이 강일순을 따르지 않기로 한 다음에는 차경석의 부인이 환상을 봤다면서, 강일순은 사슬에 묶여 있고 차경석의 영위가 상제로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민중들의 충성심도 강했지만, 일제의 탄압도 집요했고, 민중과 별개로 다른 종교와도 사이가 나빴으며[12] 조선인 지식인 사이에서도 구시대적인 가치를 들먹이며 재산을 헌납하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비판이 많았다.
1.4 해방 후의 상황과 증산도의 성립
보천교 고위 간부였던 이상호는 자금 및 일제와의 관계 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1924년 차경석에게 파문당했다. 이후 1928년, 전북 김제에서 동화교(東華敎)라는 종교단체를 세웠다. 1931년에는 김제에 있던 고판례를 끌어들여 증산계 종교 중에서는 나름 세력이 커졌다. 1936년 차경석이 죽은 후 일제의 유사종교해체령에 따라 보천교 및 기타 종교들이 해산당할 때 동화교 역시 해산당했다.[13]
광복을 맞은 1945년, 이상호는 최위석, 자기 동생인 이정립 등과 함께 서울에서 대법사(大法社)라는 이름으로 서울에서 다시 종교조직을 세웠다. 증산도 측에서는 이때 (증산도의 창교주) 안세찬이 중요인물로서, 아니 오히려 실질적인 대표처럼 활동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증산종교계에서 이미 이름이 높았던 이상호와 비교하여 안세찬은 나이도, 경력도 보잘것 없었다. 1947년에는 중요인물이었던 최위석과 갈라져 교단명을 '증산교'라 하였다가,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교단명을 바꾸더가 1967년에 증산교 본부라고 현재의 교명을 확정했다.
안세찬은 증산교 본부에서 '교정'이라는 중간간부 정도의 직책을 맡았으며 아산 지방에서 상당한 포교 실적을 올렸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증산교 본부[14]에 있던 안세찬은 "의통인패를 만들자. 청음(이상호의 호)이 만드는데 우리도 못 만들 이유가 없다" 하며 독자적으로 의통인패를 제작했다. 그런데 증산교 본부에서는 의통인패를 병겁에 대비한 신물이라 하여 교주인 이상호만 만들던 상황이었다. 안세찬이 독자적으로 이를 만들자 교단 본부측에서는 크게 놀라 안세찬을 경계하였다.
그 뒤 안세찬은 의통구호단의 조직국장을 맡으면서 호신호부(護身護符)와 인물 배치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구성하여 다시 한번 다른 간부들과 크게 다투었다. 하여 1951년, 증산교 본부로부터 출교처분을 받았다. 이후 안세찬은 옷감을 만들거나 대전에서 한의원을 하면서 1975년까지 종교와 크게 관계 없이 살았다. 현재 증산도에서는 이 또한 강일순이 안배한 바라고 주장하며 '20년 대휴게기'라고 부른다.
1975년, 증산교 본부의 창교주인 이상호, 동생이자 2대 교주인 이정립이 모두 사망하자 안세찬은 다시 증산교 본부에 나타났다. 안세찬은 증산교 본부에서 나를 따르라고 주장했지만, 증산교 본부 사람들은 모두 안세찬을 비난하며 따르지 않았다. 이때 안세찬은 크게 세 가지를 주장했다.
1. 1951년 출교처분을 받았을 때 자기(안세찬)는 다른 간부들에게 "내가 또 오리다. 교단 잘 지키소"라고 했으며,
2. 증산교 본부의 간부들은 모두 사표를 내고, 예전 안세찬과 가까웠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단을 새로 조직해야 하고,
3. 자기(안세찬)는 강일순의 직제자 중 한 명인 이치복의 연원을 이었으며, 이상호(증산교 본부 창교주)와는 동지적인 입장에서 일했다는 것이다.
증산교 본부 교단은 아무도 이 주장을 따르지 않았으며 이를 반박했다.
1. 출교처분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다른 간부들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며,
2. 출교처분을 받고 20년간 교단을 떠난 사람이 이제 와서 이런 주장을 함은 교단 내 규정이 인정치 않고,
3. 이상호도 아니고 이치복의 연원을 주장하면서 20년간 떠나놓은 사람이 교단 일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증산교 본부에서는 안세찬이 이상호와 동지적 입장에서 일했다는 것도 부정한다.
75년에 안세찬은 아들 안중건[15]과 함께 몇 차례 증산교 본부를 찾아와 자기 주장을 펄쳤는데, 이때 안중건이 정역에 입각한 새로운 주장을 하자 증산교 본부측 사람들이 이를 제지했다. 그래서 증산교 본부측 사람을 두고 무례하다고 하여 폭언이 오가다가 싸움이 붙기도 하였다.
아무 소득이 없자 1978년, 셋째 아들 안중건과 함께 대전을 중심으로 하여 '대법사 증산교'라는 이름으로 창교하였다. 그런데 대법사든 증산교든 모두 증산교 본부가 사용했었던(대법사) 이름이거나 사용하는 중인(증산교) 이름이라 비난받았다. 이름이 비슷해서 다른 사람들은 이상호 증산교와 안세찬 증산교를 혼동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대전 증산교. 증산교 등으로 교명을 바꾸다가 1984년에 비로소 현재 교명인 증산도로 교명을 확정하였다.
창교주 안세찬은 2012년 2월 24일에 만 89세[16] 일기로 사망하였으며[17] 현재는 안중건이 2대 교주[18]이다. 안중건은 아버지를 '태상종도사'라고 추존(?)하였다.
2 주요 교리
- 우주관
- 증산도의 우주관은 시간적으로 우주에도 1년이 존재하며, 그 주기는 129,600년이고,
우주가 공전한다고? 만약 공전한다고 해도 그 주기가 저것처럼 형편없이 짧지는 않을것이다4계절로 나누어진다고 본다. 그리하여 봄, 여름의 선천(先天)과 가을, 겨울의 후천(後天)으로 나눠지며, 겨울에 약 3만 년의 빙하기가 온다고 본다. 현재 시점은 여름과 가을이 바뀌는 하추교역기(夏秋交易期)에 있다고 본다. [19]
- 개벽관
- 우주관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겨울에서 봄이 되면서 선천이 열리는 사건을 선천개벽, 여름에서 가을이 되면서 후천이 열리는 사건을 후천개벽이라 한다. 선천개벽은 낳아 기르는(生長)의 원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른바 인류의 황금시대이다. 그러나 후천개벽은 거두고 휴식하는(斂藏) 원리로 이루어 져서 지축변동과 함께 열매와 같은 인간들만 남고 나머지는 전멸할 정도의 대사건이 일어난다고 한다.
- 상제관
- 후천개벽의 대겁액을 맞이하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우주의 주재자인 옥황상제가 지상에 직접 내려왔으며, 그 인물이 강일순이라는 것이다. 옥황상제가 곧 기독교의 하느님, 불교의 미륵불이라는 것이며 상제야말로 이러한 하느님의 참된 호칭이라 한다.
- 신관
- 일원적다신론관(一元的多神論觀)으로서 우주의 주재자, 통치자인 옥황상제 밑에 모든 신적 존재가 있다고 본다. 기본적으로 만유가 신이라는 입장이다. 고조선의 삼신관에 기초하여 조화, 치화, 교화의 삼신이 만물을 낳고 기른다고 본다. 산, 돌, 강 등 자연물에 깃든 신은 인격이 없는 원신(元神)이라 하고 각각의 생물도 모두 신을 가지고 있고, 특별히 인간은 삼신의 기운을 온전히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인간은 신명이 육신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고 죽으면 다시 신이 된다고 한다. '사람은 육신을 가진 신명이고 신명은 육신이 없는 사람이다.' 라는 것이 증산도의 신관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조상과 부모가 곧 그 사람의 하느님이라는 교리를 가진다. 천지가 인간을 낳고 부모가 자식을 낳기 때문에 부모는 곧 자녀의 천지라고 한다. 조상 제사는 이러한 은덕에 보은하는 것이며 이로써 후손에게 살 길이 열린다고 본다.
- 척신(隻神)
- 척신은 원한을 맺고 죽은 신명이다. 조선시대 재판의 원고가 되는 것을 척(隻)이라 한 데서 척진다는 표현이 나왔고 척신이라는 말이 나왔다. 조상 중에 남에게 원한을 품게 한 사람이 있으면 당한 사람이 죽어 척신이 되어 그 자손을 해친다고 한다. 증산도에서는 이러한 척신의 원한을 풀어 주거나(解寃) 척신으로 부터 몸을 지켜야 한다고 본다. 척신은 무조건적인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대상이다.
- 복마(伏魔)
- 척신은 이유가 있는데 비해 이유 없이 사람에게 해꼬지 하는 신명이며 선천 상극의 발전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마(魔)라 한다. 진리로써 무찔러야 하는 대상이라고 한다.
- 인간관
- 인간은 천지의 대행자로서 하느님과 동격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본다. 그러나 선천의 상극 기운에 의해 이러한 가능성이 꺾이고 무너져 모든 고통을 당한다고 하며, 후천 개벽에는 이러한 상극의 질서가 상생의 질서로 바뀌기 때문에 참된 인간으로 도통할 수 있다고 한다.
- 천지공사
- 후천개벽을 맞이하여 기존의 상극질서를 상생의 질서로 바꾸고 하늘도 땅도 뜯어고쳐 새 세상을 연 작업이 천지공사이다. 천지공사를 통해 20세기 이후 모든 역사의 행로가 정해졌다고 한다. 천지공사는 강일순이 1901년부터 1909년까지 행했으며 그 때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이 천지공사의 내용이라고 한다.
- 구원관
- 후천개벽을 맞이하면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죽게 되는데 이를 태을주 수행으로 이겨 내고 새 세상을 연다는 것이 증산도 구원관의 핵심이다.
- 종통관
- 고판례를 증산상제의 도를 이어 받은 태모(太母), 수부(首婦)로 받든다. 수부는 남성인 증산상제와 동격으로 천지(天地)와 같이 음양 짝으로서 똑같이 천지공사를 수행하고 인류구원의 도통맥을 이어 주었다고 한다. 이의 근거로서 도전에 나오는 '수부의 치마폭을 벗어나면 죽으리라'는 강증산의 말이라든가 고판례가 '일등방문공사'등의 주요 공사에 참여한 사실 등을 든다.
- 종지(宗指)
- 위와 같은 교리가 집약된 것이 증산도의 종지로서 원시반본(原始返本), 보은(報恩), 해원(解寃), 상생(相生)이다. 특히 상생은 강증산이 생전에 강조했던 것으로서 요즘 쓰는 의미와는 달리 새로 구축되는 우주의 질서라고 강조한다.
2.1 경전
도전(道典)을 경전으로 한다. 대순전경 등의 기존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증산도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조사를 통해 1992년 초판을 편찬했다. 2003년에는 개정판을 출판했다. 교단 차원에서 영어를 비롯, 여러 나라 언어로 도전을 번역하는 중이다.
2.2 개벽의 시기?
개벽은 강일순이 구체적인 시기를 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교단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가령 태극도에서는 지금이 개벽되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증산도는 지금은 '개벽이 임박한 때'이지 '개벽 중'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마치 기독교 종말론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극적인 천재지변/기타 재앙 등과 함께 영화처럼 개벽이 닥친다고 주장한다. 마치 금방이라도 개벽이 올듯, 내년 내후년에 개벽이 올 듯이 분위기를 유도하지만 몇 년 몇월 며칠이라고 날짜를 확장하여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며, 단지 '몇 년 이내로' 혹은 'XXXX년쯤에'라는 정도로 적당히 얼버무리는 식으로 말했을 뿐이다. 1988년 올림픽, 1999년 세기말, 2002년 월드컵 등이 증산도가 개벽의 때라고 말했던 연도다. 2002년은 60갑자로 임오년(壬午年)이었는데, 사오미(巳午未) 개명 도수라는 이론으로 왜 2002년이 개벽의 해인지 설명하였으며, 월드컵 분위기와 맞추어 개벽을 기다리는 열기를 고조시켰다. 하지만 2001~03년(신사-계미년)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자 언제 이야기했나는듯 잠잠해졌다가, 2013년 계사년이 되자 2대 교주 안중건 종도사는 다시 한 번 사오미 개벽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으로 유행병이 돌 때면 이를 개벽의 증거라며 말하고 다니며, 증산도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유행병에서 살아남아 상제님과 함께 후천세계를 건설한다고 한다. 자신이 포교한 신자 6명 한 조로 '육임'이란 팀이 되어 후천세계 건설과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 천재지변으로 인해 해를 입은 사람들을 구호한다고 한다.
2003년 교단 내부에서 (사오미 개벽론에 따른) 종말론이 크게 일었을 때는 천연두를 지목했었다. 사실 강일순 본인이 개벽 전에 천연두[20]가 대발한다고 얘기했었다. 사스도 그랬고, 이정도로는 끝나지 않고 몇해 뒤에 더 큰 병이 올 것이다는 말을 했다. 물론 6년정도 지난 후에 신종플루가 돌기는 했지만, 아마 지금도 이 후에 더 큰게 온다고 하고 있지 않을까?
도전 간행 후에는 많은 증산도인들이 개벽의 시기를 계산하고 있기도 하다. 2002년 도전 개정판에는 기존 문헌에는 나오지 않았던 구체적인 개벽양상(병, 지각변동 등)이 많이 나오고 있다. 도전에 따르면 강일순 자신이 개벽 시기를 계산하는 사람들에 대한 협박에 가까운 경고[21]를 하기도 했고, 교단 내부에서도 엄하게 단속하기 때문에 자기들끼리만 쉬쉬하고 있는 중. 하지만 2003년 여름, 개벽이 온다는 주장이 교단 안에서부터 떠돌아서 꽤 후폭풍이 크게 있었다. 실망하고 떠난 사람들도 꽤 된다고 한다.
3 주요 교단 목록 및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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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 계열 교단은 약 70여개에 이르는데 그 중 강일순을 직접 따랐던 문도들(김형렬, 박공우, 문공신, 차경석 등등)이 세웠던 교단과는 비교적 친밀한 관계에 있다. 경전인 도전 편찬과정에서 대부분 문도들의 자손인 이러한 교단 신도들의 증언이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2009년 현재 대부분의 증산계열 교단은 몰락한 상태이다. 상당수의 교단이 포교에 적극적이지 않은데다 신앙인들의 거의 다 고령이고 가족끼리 믿고 있는 형태가 대부분이다. 활발하게 활동하는 교단은 대략 다음과 같다.
- 증산도
- 증산법종교 : 증산과 첫째 부인인 정씨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친혈육 강순임 여사[22]가 중심이 된 교파. 그러나 강일순은 생전에 첫째 부인과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았고(정씨부인이 문제였다. 걸핏하면 증산에게 투정을 부리고 증산의 어머니에게 막대하고...한마디로 갖은 사고를 다 쳤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강일순이 수제자 김형렬에게 박처함을 알리고 오라 하나, 김형렬은 일부러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강일순은 정씨부인에게 생전 내내 냉정하게 대한다. 아무튼 강일순의 유일한 친혈육이 강순임 여사기에 여사 생전에 증산법종교의 신앙대상이자 자기 아버지기도 한 강일순의 유해를 증산법종교 내부로 옮겨왔다. 강일순을 신앙대상으로 삼는 종교가 한둘이 아니지만, 딸이 아버지 묘소를 이장하겠다는데 누가 말릴 수 있겠나.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증산법종교는 교세는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증산종교 중에서는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종파기도 하다.
- 대순진리회 계통: 대순진리회와는 완전히 원수지간. 다른 많은 교단들은 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보는 수준이지만 대순진리회는 기본교리 자체를 왜곡하고 반사회적인 활동을 하는데다 일반인들이 증산도와 대순진리회를 혼동한다는 이유다. 강일순을 신앙하는 교단들은 대순진리회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 증산도 교인들도 이들을 극도로 싫어한다. 개신교인들이 몰몬교, 통일교 보는 수준으로 보는 셈이다.
4 비판
4.1 자민족 중심주의
교리적 특징으로는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세계사적 흐름에서 한국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환단고기를 진실된 사서라고 주장하는 등. 딴에는 환단고기에 대한 비판을 완전히 무시할 수가 없어서 환단고기에 일부 가필이 되어 문제가 생겼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일부 가필론'의 맹점은 위서 문서 참조.
환빠들은 물론 아무 역사적 고증 없이 유사역사학이나 유사과학을 교리에 도움이 된다면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다 보니, 어디서 들어본 듯한 내용이 대단히 많아졌다. 가령 물이 좋은 말을 들으면 좋은 결정을 이룬다는 유사과학을 받아들여, 자기들이 사용하는 태을주를 들려주었을 때의 결정을 보여준다거나 하는 식. 그 때문에 환빠들도 증산도를 싫어한다. 그런데 사실 증산도가 환단고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긴 하다. 도전에 보면 2편 31장에 '황제(黃帝)가 난(亂)을 지으므로 치우(蚩尤)가 큰 안개를 지어 이를 평정하였나니'라는 구절이 나온다. 흠좀무. 더욱이 10편 91장 측주에 보면 일경들이 증산의 제자들의 상투를 자르려 하자 단군의 거시기를 받은 머리라며 거부하는 구절이 나온다. 흠많무.뭐? 거시기?
극도의 민족주의 때문에 당연한 귀결로 극도의 선민사상에 빠져 다른 민족과 문화를 사실상 열등하다는 결론으로 유도한다. 또한 다른 종교의 예언 등이 '모두 증산도를 가리킨다는 가정'하에 억지해석을 일삼는다. 물론 자기네 해석이 틀렸음이 확실해지면 아예 그 부분은 말하지 않는다. 첫 책인 '증산교의 진리'[23]로부터 '개벽실제상황'과 같은 최근 책을 시대별로 분류해보면, 창교주 안세찬이 아직 살아있던 때에 나온 책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99년 이전까지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신나게 인용하며 동양식 풀이법으로 풀어야 그 참 본의를 알 수 있다고 하고 있지만, 현재는 아예 노스트라다무스를 인용하지 않는다. 다만 1999년 이전까지는 노스트라다무스를 인용하며 '곧 개벽이 올 것 같다는' 분위기만 잡았을 뿐, 정확히 모년 모월 모일에 일어날 거라고 확정하여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주의 질서를 4계절에 비유하여 현재는 여름의 말기에 해당하고, 곧 가을로 변하는 대변혁이 일어나는데 이를 개벽이라 하며 개벽의 때에 죽는 사람들을 살리자는 주장을 핵심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한국이 개벽 이후 세계에서 정신문명의 최선진국이 된다고 주장하며, 개벽 이후 오는 우주의 가을, 즉 후천세계에서는 5만 년간 풍요를 누린다고 말한다.
도전 5편 11장에 "우리나라 문명을 세계에서 배워 가리라"라는 구절이 있지만, 같은 도전 5편 332장 내용인
"앞세상에는 족속에 따라 나라를 세우리라." 하시고 다시 여쭈기를 "저희들이 성도(成道)하는 날에는 만국언어에 능통하게 됩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어찌 능통하지 못하겠느냐." 하시니라.
...를 들어 꼭 민족주의를 표방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증산도인도 있다.
하지만 저 구절은 탈민족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도통의 효력'을 말한 것이다.
4.2 타종교 및 문화와의 관계
이들의 교리 의의는 쉽게말해 불교, 기독교 등 기존 종교에 대해서는 그들은 그 시대적 역할을 다 하였고, 이젠 증산도가 그들 교리의 정수를 거둬서 새시대의 참 진리를 내놓았다는 입장이다. 더하자면 당신들 종교가 미개한건 아니지만 우리 종교야말로 인류를 진보시킬 단하나의 진리이고 정의이며 이건 하늘의 민족인 한국인이 중심이 되어야된다는 의미라는 말도안되는 가치관으로 은근슬쩍 깎아내리며 공개적으로 기존 종교 를 비판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인터넷상에서 증산도 인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기존 종교인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특히, 선천의 성자들도 상제인 증산강일순이 내려보냈고, 그들이 편 가르침이 기존 종교들이기에 기존 종교들과 그 종교들의 성자들의 기적이나 구원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고는 하지만, 결국 자신들의 종교의 근거가 되는 성자를 증산도에서 내려보냈다는 이야기가 되므로 유일신교인 기독교는 당연하며, 불교 등도 기분이 나쁜 것은 당연하다. 애초에 증산도의 교리에 따르면 기존 종교는 역할을 다했다고 하는데 증산도가 말하는 "기존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다. 심기를 건드리냐 마냐를 떠나 대놓고 싸움을 거는거나 마찬가지.
그들은 '증산도가 킹왕짱이란 것이지 다른 민족과 문화가 열등하다고 보는 것은 아니고, 다만 한민족이 세계 문화의 시원민족이고 전세계에서 각기 발전한 모든 문화를 증산도가 모조리 흡수통일한다는 것'이라고 항변하지만, 애초에 그러한 생각 자체가 다른 민족과 문화가 한민족보다 열등하다는 말과 같은 소리며, 환빠들의 사상이기도 하다.'
민족주의가 발현할 시기인 일제강점기를 거친 탓에 이렇게 되었다는 변명도 있지만 바로 아래 문단에 나오듯 증산도는 일제 강점기가 증산 강일순의 명에 의한 것이라고 아예 도전에 명시돼 있다.
근본적으로 혈통에 따른 민족주의를 주장한다. 즉 후손으로서 자기 조상의 영혼과 자기 민족신을 제사를 지내어 받들고 위하지 않으면 환부역조(換父逆祖: 아비를 바꾸고 조상을 거스름)이며, 조상신과 민족신이 이러한 패륜 때문에 노하여 자손을 돕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이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왜 다른나라의 종교를 믿으며 다른 민족의 신을 섬기냐는 말인데 되려 이런 작자들의 포부는 전세계인들을 우리 문화에 동화하게만들며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한국인들이 세계를 리더하고 이끌어야 하며 이건 하늘의 선택을 받은 우리의 임무라는 주장한다...
4.3 일제강점기에 대한 해석
증산도 도전에 "조선 국운을 일본에게 맡기려면 명치(明治)를 불러와야 하리니 이제 명치의 혼을 부르리라."라는 구절이 있는걸 보면 흠좀무. 신이 계시는데 나라는 개털리는 상황을 설명하려 한 거겠지만 현실은? 증산의 명령이었다. 그 이유는?
"일본 사람이 천지의 일꾼이 되어 조선에 와서 남의 집을 사는데 부지런히 일을 하고는 필경 품삯도 받지 못하고 빈주먹으로 돌아가리라." "조선은 원래 일본을 지도하던 선생국이었나니 배은망덕은 신도에서 허락하지 않으므로 저희들에게 일시의 영유는 될지언정 영원히 영유하지는 못하리라."
라고 증산이 말했다는 자기네 경전 도전을 인용해 해명한다. 증산 신앙인들 대부분은 독립운동과 연관이 있었거나 일제가 반드시 몰락한다고 자손들에게 가르쳤다는 것이 증산도의 입장. 일본 통치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최악보다는 차악이라는 것.
하지만 이런 해명을 받아들인다면, 상제라는 강증산이 직접 내려와서 천지공사를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꾸지 못하여 일제의 지배를 허용했다는 말이 된다. 혹은 더 일찍 내려오거나, 혹은 다른 사명자들을 내려보내서 그렇게 되지 않게 안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강증산은 그리 하지 않고 뒷북을 쳤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제가 조선을 병합한 후 식민통치 기간에 했던 인권을 무시한 각종 범죄 행위는 제국주의 시대에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비인륜적이었다. 과연 서양 식민지가 되는 것보다 일본 식민지가 되는 것이 차악이었을까?
4.4 주술성
민족주의 감정과 함께 주술력을 대단히 강조한다. 태을주와 운장주는 증산종교에서 두루 쓰는 주문이지만, 증산도인들이 이 두 주문을 대대적으로 알려서 한국 오컬트 관련 홈페이지에 자료로 올랐을 정도이다. 두 주문의 주술력을 강조하지만, 그에 반대하여 오컬트에 관심 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두 주문의 힘이 정말 신통한지 회의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증산도인들은 저 두 주문의 힘이 전세계 모든 종교에서 사용하는 어떤 주문이나 만트라, 기 수련이나 요가 등보다도 바르고 순정하며 강력하고 안전하다고 주장한다
4.5 증산종교 내부에서의 정통성
강일순은 자기 후계자를 지명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정통성을 주장하는 종교가 백가쟁명이다. 구태여 법적인 의미에서 정통성을 따진다면, 강일순의 무남독녀 딸자식인 강순임 여사가 세운 '증산법종교'를 가장 정통으로 봐야 한다. 강일순의 직계제자가 세운 종교들 또한 정통성 순위가 높다. 이렇게 따지면 증산도는 정통성 문제에 있어 서열이 한참 뒤로 밀린다.
'대순전경' 6판 4장 66절에[24], 그리고 대순전경보다 후에 나온 도전에 둘째 부인 고판례가 '나를 일등(一等)으로 정(定)하여 모든 일을 맡겨 주시렵니까?'하고 고판례를 후계자로 정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고판례를 강일순의 후계로 인정하는 종파는 이상호의 증산교가 시조이며, 대순전경은 이상호 형제가 발행했다. 이렇게 중대한 내용이 왜 6판부터 실렸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이상호 계열이 아닌 증산종교들은 모두들 고판례를 정통성의 보증으로 보지 않는다. 특히 증산의 최고참 제자였던 김형렬은 고 부인(고판례)이 증산 사후에 그 혼령을 보았다면서 사람들을 끌어모으자, 증산의 첫째 부인이며 강순임의 생모인 정씨 부인을 주문을 외우며 수도케 하면서 역시 증산의 혼령을 만나게 하려고 시도했다. 비록 김형렬 뜻대로 되진 않았지만, 증산의 최고참 제자가 '고 부인이 생전에 증산에게 후계자로 임명된 것이 아니라' 사후에 증산의 혼령과 만났기 때문에 사람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4.6 포교 및 활동
길가에서 '도를 아십니까?' 라고 묻는 사람들은 대순진리회거나, 대순진리회에서 갈라진 파일 가능성이 높다. 증산도의 포교방법 자체는 기존에 알려진, 무난한(?) 방법을 사용한다. 하지만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하고 주술력을 자극적으로 강조하는 점에서 금방 눈에 띈다. 큼지막한 표지판, 만화 등을 사용하기 때문에 단연 눈에 띈다. 인터넷으로 전도하는 경우도 많다.
활동중인 대학교 동아리들로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25], 고려대학교, 성균관대학교[26], 국민대학교, 인하대학교, 홍익대학교,중앙대학교, 부산대학교, 경북대학교, 건국대학교, 경상대학교,경남대학교, 강릉원주대학교, 제주대학교, 대전대학교, 강원대학교, 충북대학교, 대구대학교, 대구가톨릭대학교, 계명대학교 등 전국의 대부분의 대학내에 등록되어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파일:Attachment/증산도/jsdfacebook.png
페이스북에서도 간혹 광고로 만나볼 수 있다.
2007년 STB상생방송이 개국되고 매체에서도 포교활동을 하고있다.
노노데모 같은 곳을 보면 실제 증산도가 공작활동을 한다는 글이 있다. 흠좀무. 그저 지역감정(전라도 경상도) 운운하는 글이니 제대로 된 위키니트라면 무시하기 바란다.
5 참고사항
-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
훗날 증산교 본부를 창교하는 이상호가 아직 보천교 고위간부이던 시절에 강증산에 대해서 쓴 편년체 자료. 내용은 짧으나 강증산의 행적을 기록한 첫 번째 기록이라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자료다. 보천교의 공식문서기도 했으나, 차경석이 이상호 형제를 파문한 후로는 보천교에서는 증산천사공사기를 자기네 문서로 인정하지 않았다.
- 대순전경(大順典經)
- 대순전경은 이상호가 강일순을 직접 겪었던 증산계 8개 종단 원로들의 증언을 수집하여 만든, 강일순에 대한 사실상의 1차 사료이다. 도전이든 전경이든 모두 대순전경을 기본사료로 삼았다. 그러나 증언을 하지 않은 원로들이 많았고(박공우, 문공신, 안내성 등), 유교적 관점에서 강일순을 바라보고 표현을 윤색하거나 누락시킨 증언이 많아 강일순을 전적으로 파악하기엔 매우 부족한 자료이다.
- 화은당실기(華恩堂實記)
강순임이 세운 증산법종교에서 1960년에 발행한 기록. 화은당(華恩堂)은 강순임의 별호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강순임의 행적을 중심으로 엮은 기록이라, 여기에도 상당부분 강증산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 전경(典經) - 대순진리회 참조
- STB 상생방송
- STB 상생방송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방송내용은 역사특강과 교양 다큐멘터리, 증산도 소개강좌, 신앙체험수기 및 수행프로그램 등으로 구성돼 있다. 본부는 대전에 있다.
- 한 때 이들은 '신천지'라는 이름의 무료 PC통신 서비스를 운영한 적이 있었다.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과는 무관.
- 사실 증산도는 원래 유교와 도교를 적당히 짬뽕해서 변종시킨 종교였고, 이들 계통은 환단고기와는 별다른 연결이 없었고, 환단고기를 경전으로 삼지도 않았고 교리에도 이런 내용이 없었다.
- 그런데 원래 교리에도 없던 것이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2012년부터 자기 교리로 편입되었다.(...)
2012년 세계멸망설은 이걸 말하는 것이었나해당 문서 참조.
- 최근 '증산참신앙'이라는, 증산도 교단이 사회적/종교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탈퇴한 사람들이 주축이 된 단체에서 증산도 초대교주와 2대교주를 상대로 성금 반환 청구소송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6 관련용어
- ↑ 安世燦. 1922.08.08 ~ 2012.02.24. (날짜 표기는 양력). 호는 운산(雲山). 증산도에서는 양력 대신 음력 날짜에 맞추어 기념한다.
- ↑ 1974년 무렵부터 독자적인 종교적 주장을 해왔기 때문에 74년에 창교했다 밝힌 자료도 있으나, 공식적인 창교는 1978년에 했다. 안세찬 집이 대전에 있었기 때문에 창교도 대전에서 했다.
- ↑ 강일순은 살아생전 자기를 신적인 존재라고 해석할 만한 말을 많이 했으나, 정확히 자기가 무엇이라고 또렷이 밝힌 적은 없으며 차라리 미륵불에 가깝게 이야기했다. 이 때문에 강일순의 외동딸이 세운 종파인 증산법종교, 강일순의 최고참 제자가 세운 종교에서는 신앙대상인 강일순을 미륵불로서 받든다. 증산도의 말년 제자인 차경석은 보천교를 세우면서 천사라고도 했으며, 그외에도 상제라고 부르는 종파도 있는 등 호칭이 각양각색이다.
- ↑ 증산도 교단 내부에서 자기네 교단을 미칭하여 무극대도(無極大道)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 호칭 때문이다.
- ↑ 물론 다른 증산계 종교에서는 이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정통성이 고판례를 통해 이어진다고 주장하는 곳은 이상호가 세운 종교인 '증산교 본부'나 거기에서 갈라진 증산도 정도에 불과하다.
- ↑ 다만 이후에도 교류나 교단 내에서 함께 있었던 바도 있었다. 슬하에 딸 이순(二順)이 있었는데, 나중에 남편과 함께 증산법종교를 개창하면서 이름을 순임(舜任)으로 바꾸었다.
- ↑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해이며, 순종황제 융희 3년이기도 하다. 사망년도가 1909년이므로 강일순은 일제시대를 겪은 적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치 강일순이 일제시대까지 살았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
- ↑ 만으로는 37세
- ↑ 증산계 종교에서는 어천하였다, 즉 천지공사를 마치고 천상 보좌로 돌아갔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 ↑ 실제로 보천교는 상해 임시정부 설립자금을 대기도 했고, 보천교가 일제에 노출되게 된 것도 독립자금을 수금하다 발각되어서 였다.
- ↑ 차경석이 죽은 이후 일제는 바로 십일전을 경매에 부쳤고, 조계종단이 십일전 건물을 샀다. 십일전을 조각조각 나누어 기차에 실어 서울까지 싣고 올라와 다시 조립했다. 이 건물이 오늘날 서울에 있는 조계사 대웅전 건물이다. 십일전 시절과 비교하면 건물을 조금 손보고 장식이나 벽화를 불교풍으로 바꾼 점을 제외하면 거의 원형 그대로이다.
- ↑ 특히 천도교쪽에서 보천교를 많이 적대시했다. 무명의 천도교 인사가 차경석을 만나 대담한 뒤 천도교 잡지에 실은 기록도 있다.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은 천도교 인사가 평한 바로는 "옛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영웅호걸이 되었을 법한 사람" 보통 사람이 아니긴 한데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경의와 비아냥을 동시에 담은 평.
- ↑ 이때 대순진리회의 전신인 무극도 또한 함께 해산됐다.
- ↑ 한국전쟁 당시 교명은 증산대도회(甑山大道會)였다.
- ↑ 安重建. 호는 경전(耕田). 1954년생. 증산도 2대 교주. 호를 이름처럼 써서 본명이 경전인 줄 아는 사례도 적지 않다. 2015년부터 환산(桓山)이란 호를 사용한다는데, 여기서 '환'은 환단고기에서 따왔다고 한다.
- ↑ 한국식 나이로 91세. 그런데 이상하게 언론에서는 만 나이도, 한국식 나이도 아닌 90세 일기로 별세했다고 보도했다. 기자들 중 누구도 정확한 나이 확인을 하지 않고, 단순히 2012-1922=90이라는 수식만 보고 90세라고 보도한 듯하다.
- ↑ 동년 3월 1일에 영결식을 치렀는데, 입관하러 가면서 내건 만장 맨 앞줄에는 붉은색 천으로 太極帝安雲山宗道師(태극제 안운산 종도사)라고, 한자로 적었다. '태극제'라는 호칭이 증산도 교단 차원의 공식적인 것이며, 또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 증산도에서는 종도사라고 칭한다.
- ↑ 대순진리회에서는 가을에서 겨울로 바뀌는 시기라고 본다.
- ↑ 도전에서는 시두라고 말한다.
- ↑ 도전에 따르면, '손가락 꼽작거리고 있는 놈들은 다 죽으리라.'
- ↑ 본명은 강이순이지만 혼례 후 남편이 새로 강순임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 ↑ 교명을 증산교로 표기함을 주목. 아직 교명을 증산도로 바꾸기 이전에 나온 책이다.
- ↑ 대순전경은 여러 번 증보하여 발간했다. 그래서 판수를 구분하여 말해야 한다.
- ↑ 대강당에 동아리방도 존재한다! 경험담에 따르면 가끔 태을주를 외우는 소리가 바깥까지 들린다고 한다.
- ↑ 학생회관에 동아리방이 있었지만 경고누적으로 2016년 1학기에 퇴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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