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주

후한 자사부(13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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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주
益州

고대 중국의 옛 지명으로, 파촉지방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쓰촨성(사천성), 충칭(중경) 시, 윈난성(운남성), 그리고 구이저우 성을 관할하는 익주자사부에서 유래한 명칭이며, 특히 쓰촨성(촉)과 충칭 시(파) 일대를 가리킨다.[1] 내륙으로서 산지에 둘러싸여 있어서 방어가 쉬운 지형이다. 게다가 토질도 좋아서 생산력도 좋은 지방.

상대(은나라)에는 삼성퇴 유적으로 대표하는 고도로 발전했으면서도, 중원지역과는 확연히 다른 청동기 문명이었던 듯하나 점차 중원사람들이 영역을 확장하였다가 이후에 독립국가가 나왔다. 주나라은나라를 멸망시키거나, 상이 하나라를 멸망시킬 적에도 동맹군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 중국인 입장에서) 너무 서쪽에 치우쳐서 주변이 온통 이민족의 영역이었다. 남쪽으로는 윈난성, 서쪽으로는 티베트, 북쪽으로는 서량을 접하는, 고대 중국인 관점에서의 변방지역.[2] 한편으로는 태국의 타이족과 라오스의 라오족, 미얀마의 버마족이 이 지역에 주거한 거주민들의 후손이라는 얘기도 있다.

원래 주나라 시절까지 이곳은 중국이 아니라서 천하 9주에 안 들어가지만, 진나라 말기에 이곳은 중국의 영역에 들어오고, 후한시절엔 자사를 보낸 13주의 하나였다.

이 지역은 일찍(전국시대 진나라)부터 풍부한 수자원을 바탕으로 한 관개사업을 잘한 곳이었다.[3] 물산이 풍부하고 지형이 험해서 외부의 침공을 막기 쉬워 난세마다 독립 세력이 하나씩 났다. '변방'이지만 고립한 지형과 비옥한 토지로 견제받지 않고 힘을 키우기 좋은 곳이라서 한고조는 이곳에서 기반을 닦아 천하를 통일했고, 후한시절 유언은 황제를 참칭하려고 했다. 헌제조비에게 선양하고 후한이 멸망하자 유비는 한실을 잇겠다며 이곳에서 촉한을 세우고 황제에 올랐다.

구리와 같은 다른 물산도 풍부했는데, 제갈량이 출사표에서 말했던 소금이 풍부하다는 내용은 암염인 듯하다. 제갈량의 시대 개간사업이나 수레 사용 등으로 개발을 진두지휘하여 영토에 비해 더 생산력이 는 듯하다. 삼협의 댐이 대표적.

사실 사천 분지의 생산력이 비옥해도 이것만으로는 중원 전체의 생산력을 당해낼 수 없고, 지형상 방어에는 유리하지만 공격에는 불리해 여기서 난 독립세력이 중국을 통일한 때는 드물었다. 사실 유방이 유일한 예였다. 제갈량도 아마 유방의 예를 쫓아서 이곳을 기반으로 천하를 통일하려던 듯한데, 위나라는 항우와는 달리 통치체계를 통일한 데다가 정비했고, 남쪽의 오나라의 군사적 역량도 제갈량의 기대만큼 세지 않아서 위나라의 주력을 크게 분산시키지는 못했으니 문제였다. 게다가 관우의 실책으로 형주를 뺏긴 게 너무나 컸다. 그렇게 제갈량의 북벌은 실패했다. 다만 익주의 지리적 위치가 방어에는 유리했는지 낙곡대전을 비롯해 거의 5배의 국력이던 위나라를 제갈량 사후에도 30여년간 막았고, 위촉의 경계이던 한중에서는 거의 대등하게 일진일퇴를 벌였다.

일각에선 위와 같은 이유를 들어 익주를 차지한 촉나라가 오나라보다 경제면에서는 더 나았다는 의견이 대세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당시 장강 이남지역의 개발이 다소 낙후되어있긴 했어도 근본적으로 협소한 촉나라가 오나라를 경제면에서 능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특히 고대의 경제력은 인구수고 (현재의 GDP개념은 상업과 공업이 발달한 근대 이후에나 의미를 갖는다) 식량생산이 곧 경제였기 때문에, 인구수가 오나라의 반밖에 안되었던 촉나라가 경제면에서 오나라를 능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촉한이 위나라에게 망하고 곧 이어 서진이 들어선 265년, 북동부 '파' 지역에 량주(梁州), 건녕 등 남부에 영주(寧州)를 신설했다.(뒤이어 269년에는 무도·음평·농서 지역은 옹주에서 나눠 진주(秦州)를 세웠다.) 따라서 서진 19주 가운데 4주가 옛 촉의 땅이었다. 이후 오호십육국시대 때는 저족의 이민족 왕조 성한이 들어섰고 이후 남조의 동진이 점령했다가 화북정권인 서위(북주)가 빼앗아 이후로 수나라~당나라 시절에 이른다. 당나라 시절엔 안사의 난으로 당나라 현종이 청두로 피난했을 당시 반란진압기간 동안 장안에서 임시로 천도했었기도 했다.

이곳의 주요도시는 성도(청두)로, 2008년에 크게 지진도 났다. 삼국지에 자주 나오는 상용(과 방릉)은 원래 익주 소속이었으나, 위나라의 익주에는 이곳만 남자 형주에 포함시켰고 그 뒤로 계속 형주에 속했다.[4] 현재 옛 신성군 일대는 후베이성 죽산현에 있다.
  1. 모순이지만 익주자사부 소속의 익주은 현 윈난성의 중심부를 관할하는 군이었다.
  2. 일정 지역을 '변방'이라고 칭할 때는 '누구의 눈'에 변방인지 주의해서 적어야 한다.
  3. 도강언 항목 참고
  4. 이 때문에 이전 버전처럼 원래 형주 소속으로 오인받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