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역사

브라질역사를 다루는 항목.

브라질의 역사
História do Brasil
원주민포르투갈 피식민지근현대





포르투갈 제국이베리아 연합포르투갈 제국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브
연합왕국

페르남부쿠 공화국
브라질 제국
히우그란지 공화국

1








2






3





브라질
총독령

(리우데자네이루 총독령,
바이아 총독령)
브라질국

마라냥국
네덜란드령 브라질
그랑파라
마라냥국
그랑파라
히우네그루국
마라냥
피아우이국

1 고대

역사 이래 구석기, 좀 나은 쪽은 신석기 수준의 삶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기에 이전에 뭘 하고 살았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아마존 강 하류에 투피족을 중심으로 상당한 수준의 마을이나 도시가 있었다는 기록이 조금 남아있고(물론 16세기 초에 탐험한 포르투갈인에 의해 기록된거이기는 하다.) 환경파괴로 인해서(...) 당대의 유적들도 종종 발굴되곤 한다. 그러나 잉카제국이나 아즈텍 제국처럼 강력한 국가는 등장하지 않았던걸로 보이며, 문자도 사용되지 않았다. 또한 아마존 하류의 문명은 포르투갈이 정복하기 훨씬 이전부터 쇠퇴되어왔던걸로 추측되고있으며, 포르투갈인이 브라질에 오면서 전파된 전염병으로 완전히 사멸하였다, 확실한건 원주민 대부분은 투피-과라니어족 계열의 언어를 쓰고있었었다는 거 정도다.. 대항해 시대들면서 브라질은 포르투갈식민지가 되었고. 1500년 포르투갈의 항해가 카브랄이 '우연히' 브라질을 발견하게 된 것이 계기.

2 포르투갈 통치

하지만 포르투갈이 "발견해낸" 브라질 땅도 결국엔 라틴아메리카 땅덩이에 붙어있는지라 에스파냐와 신경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교황 알렉산드로스 6세가 중재하여 서경 38도선[1]을 기준으로 그 왼쪽은 에스파냐가, 오른쪽은 포르투갈이 다 먹는(...) 세계구급 땅따먹기[2]를 하면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물러나는 듯 했으나,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악착같이 물고 늘어진 끝에 1년 뒤인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하여 기준선을 서경 46도 36분으로 밀어내는데 성공. 라틴아메리카에서 그 기준을 충족시키는 땅인 지금의 브라질 지역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바로 옆의 에스파냐 식민지가 금이며 은이며 온갖 보화가 쏟아져나오는데 반해 여긴 아무것도 없어 온갖 고생을 하며 얻은 거대한 땅덩이에서는 그런 거 따위 나지가 않았고[3] 이에 실망한 포르투갈에서는 브라질을 내팽겨쳐두고 그 당시 짭잘한 수익을 올리던 인도 교역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렇게 X빠지게 얻어낸 땅을 버려둘려니 아깝고 해서 뭔가 팔아먹을 게 없을까 하며 눈에 불이 켜지게 찾다가 찾아낸 게 "빠우브라질" 이라는 빨간색 염료의 원료가 되는 나무.[4] 그렇게 염료 팔아 겨우겨우 연명하다 사탕수수를 도입해 플랜테이션을 시작하는 순간… 계륵과도 같았던 브라질은 포르투갈에게 있어서 진정한 축복의 땅이 되었다. 지금은 거지동네인 브라질 북동부가 이 당시에 엄청난 번영을 구가하였다. 포르투갈이 "하얀 황금"으로 돈벼락을 맞는 걸 본 프랑스, 네덜란드 등은 눈이 뒤집혀져서 라틴아메리카로 친절히 와줘서 포르투갈에게 맞짱을 신청했으나, 둘 다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이 때 네덜란드가 브라질 점령지에서 빼간 사탕수수는 나중에 안틸레스 제도에 뿌리를 내렸으며, 결과적으로 브라질 사탕수수 산업을 KO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1580년 포르투갈은 60년 동안 일시적으로 스페인의 통치를 받았으며, 1640년 포르투갈이 분리 독립함에 따라 다시 포르투갈 영토가 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합병기간에 두 나라가 이전에 맺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사실상 무효가 되면서 브라질의 포르투갈인들이 내륙으로 대거 진출하게 되어 오히려 지금의 브라질의 영토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남부지방으로도 진출하여 북동부의 사우바도르 대신 남동부의 리우데자네이루가 브라질의 중심지가 된다.

3 독립

그러던 중, 1808년 나폴레옹이 포르투갈을 침공하면서 왕실이 모두 브라질로 망명을 떠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래서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가 잠시 포르투갈 제국의 수도가 되기도 했다.신성 브리타니아 제국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왕실은 다시 본국으로 복귀했으나 정치적 위상이 엄청나게 커진 브라질은 포르투갈 본국과 맞먹으려 했고 이에 포르투갈은 브라질의 위치를 격하하며 탄압하려 했다. 이에 1822년 왕세자 동 페드루가 브라질 제국의 독립을 선언하며 황제에 등극하여 애비의 뒤통수를 쳤다.[5]

1825년에 브라질 최남단에 있던 시스플라티나 주가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등에 업고 독립에 나서자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500일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완전히 말아먹어 산티아고 몬테 해전에서 브라질 해군이 궤멸되고, 그 여파로 인구부족현상까지 겪게 되었다. 동 페드루 즉, 페드루 1세에 대한 브라질 국민들의 증오는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결국 프랑스와 영국이 중재를 한 끝에 1830년 브라질은 끝내 시스플라티나 주를 잃었고, 다음해 페드루 1세는 다섯살짜리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포르투갈로 줄행랑쳤다. 이 시스플라티나 주가 지금의 우루과이이다.

한편 페드루 1세 축출 이후 브라질은 지방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나 반란군과 제국군간 유혈충돌로 사실상의 내전 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1841년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된 페드루 2세가 직접적 통치를 시작하면서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초기 페드루 2세 황제는 커피 재배의 장려 및 보급과 유럽 국가들의 이민을 받아들이는 등의 강력한 경제발전 정책을 취했으나, 기득권 세력의 대립이 잦아졌다. 미국이 노예제를 폐지한 후로도 브라질은 노예제가 계속 존속되다가 페드루 2세는 기득권 세력의 통제를 위해 1888년 노예제 폐지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페드루 2세의 노예제 폐지는 당시 농장주등 여러 기득권 세력들의 반발을 키웠고 1889년 폰세카 장군 주도의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페드루 2세가 폐위되면서 브라질은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다.

4 근대

공화국이 된 이후 브라질은 커피재배, 생산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국가의 부를 축척했다. 그러나 1930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브라질의 경제는 타격을 입었고 경제적, 정치적인 혼란속에 바르가스가 대통령이 되었고 바르가스는 1937년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국회를 해산하고 강압적인 독재 정치를 시도했다. 초기에 공산주의자를 강력하게 탄압하는 등 파시즘적인 색체가 강했지만 의외로 나치식의 인종차별과는 거리가 멀었고[6], 2차 세계대전중에 미국과 관계를 강화했다.

한편 집권기 동안 바르가스는 노동자 보호, 공업진흥, 복지확대 등의 강력한 정책들을 펼쳐 브라질의 경제를 활성화시켰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에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유럽 전선에 브라질군을 참전시키는 등 국위선양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종료되자 바르가스의 강압적인 독재 통치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바르가스는 1945년 10월 군부 반대파 세력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실각당했다.

5 현재

그리고 이듬해인 1946년 새로운 헌법이 채택되어 군정이 물러나고 새로운 민주 정부가 들어섰으나 브라질의 정치적 혼란은 여전했다. 이 와중에 1951년 대선에서 바르가스(참고로 그 바르가스 맞다!)는 대통령에 대통령 시절의 공업진흥과 복지 확충들의 공약을 내세워 다시 당선되었지만 소련과 우호관계를 맺어서 보수파의 반발을 샀고, 또한 인플레로 위기에 몰리자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이후로 보수파의 세가 약화되어서 1956년 취임한 쿠비체크 대통령은 신행정수도 브라질리아 천도를 단행하는 등 각종 개혁정책을 펼쳤으나, 1964년 카스텔루 브랑쿠 장군 등 일단의 군부 지도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군부가 다시 정치에 개입하면서 이후 브라질은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섰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브라질 군부 세력들은 군부 지도자들이 돌아가면서 대통령직을 역임하며 군사 독재 정치를 펼쳤다. 그리고 여러 반대파 세력들과 야당 세력들을 억압하면서 친미, 반공 노선의 외교 정책을 내걸어 외국 자본 도입에 의한 강력한 공업화 정책을 추진했다. 초기 집권 군사 정권은 경제 개발에 큰 성공을 거두어 브라질의 기적이라 불릴 정도로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어내어 호평을 받기도 했으나 차츰 독재 정치와 억압으로 국민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움베르투 지 알렝카르 카스텔루 브랑쿠 대통령, 3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통치했지만 독재와 부정부패, 인권유린을 일삼았다. 결국 항공기사고로 사망한다.

에르네스투 가이젤 대통령, 1974년~1979년까지 브라질을 통치했으며 집권기간동안 수많은 극좌세력들이 고문으로 사망했다.

1974년 취임한 에르네스투 가이젤 대통령은 일부 억압적인 정책을 완화하였으나 오일쇼크 등에 따른 불황과 초인플레이션, 외채 문제로 경제는 파탄 상태에 빠져 집권 군사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은 계속해서 이어져 군사 정권은 민정 이양을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앙 바프티스타 지 올리베이라 피게이레두 대통령,브라질 군사정권의 마지막 대통령으로 이전 대통령들과는 달리 군부 지도자였지만 브라질의 민주화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몇년전 밝혀진 바에 따르면 피게이레두 정권시절 브라질 군사독재정권의 비밀문서 1만 9400건이 파기되었다고 한다. 만약 비밀문서가 파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현재 브라질의 과거사를 청산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1985년 1월 네베스가 민간 출신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20년간의 군정은 끝나게 되었으나, 네베스 대통령이 취임도 하기 전에 갑자기 사망하고, 외채와 인플레이션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면서[7] 브라질의 정국은 계속 혼란에 빠졌다.

1989년 29년만에 국민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젊고 개혁적인 이미지의 페르난두 콜로르 지 멜루가 대통령이 되어 경제 문제 해결을 내세웠으나, 콜로르마저 부패 스캔들로 탄핵 위기에 빠져 다시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었다. 1995년 취임한 페르난두 엔히키 카르도주 대통령은 강력한 경제 개혁 정책을 폈고, 초기엔 초 인플레이션을 잡는 등 성과를 보이는 듯 했지만 이 저환율 정책이 무역적자를 유발시키고 경제자유화로 자본이 치고빠져나가기 좋게[8](...) 금융산업의 자유화를 대대적으로 시행하면서 결국 다시 경제위기에 빠졌고 IMF 구제금융을 받기에 이른다. 2002년 대선에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3년 브라질 최초의 좌파계 대통령[9]으로 취임한 후 계속 강력한 경제개혁 정책을 추구함과 동시에 성장하는 경제를 바탕으로 지역 강대국으로서의 입지를 구축하였으며, 2010년 대통령 선거에서 룰라의 후임으로 여성인 지우마 호세프가 당선되어, 룰라의 정책을 계승하고 있다.

현재는 브릭스(BRICs)라고 불리는 세계경제의 신 성장동력으로 주목받는 국가. 하지만 고질적인 빈부격차와 치안부재 문제가 심각하다. 빈부격차의 경우는 국기에서 녹색 부분이 월 10달러 이하 소득자, 노란색이 월 100달러 이하 소득자, 보라색이 월 1000달러 이하 소득자, 그리고 흰색이 월 100000달러 이상 소득자라는 모 단체의 그림이 있을 정도.(혹시 찾으면 추가바람) 그나마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 시절을 거쳐가면서 빈곤층이 크게 줄고 헤알화 가치가 올라 나아졌긴 했지만, 그래봤자 브라질의 피파 랭킹과 유사한 정도[10]. 식민지 시대부터 이어져 온 대지주와 자본가 집단 '콜로네레스'에 의해 1889년 공화정으로 전환하였고(1888년에는 노예제 폐지), 지금도 콜로네레스 계층은 엄청난 부를 구가하며 브라질 사회를 극악한 부익부 빈익빈 사회로 만들어가고 있다. 지금도 부패는 어느 정도 있지만 예전 브라질의 부패는 상상을 초월한다. 90년대에는 사회전반 시스템이 모두 부패해서 경찰들조차 죄다 막장이었다. 예를 들자면 공무원은 뇌물이 없으면 휴가조차 갈 수가 없었고, 뇌물의 유무에 따라 견인차 활동구역이 늘었다 줄었다 했다. 흠좀무.
  1. 라틴아메리카 최동단을 지나는 선이다.
  2. 정식 명칭(?)은 토르데시야스 조약 - 포르투갈어로는 토르데질랴스 조약. 또한 이 조약은 지들끼리 치고 박기 바쁘던 유럽 열강들에게 식민지 차지의 중요성을 자각시켜준 사건이라는 의미도 있다.
  3. 나중에 브라질 고원 쪽에서 금은이 나오기는 하나 그건 먼 훗날 얘기.
  4. 이 나무의 이름이 나중에 나라 이름이 된다.
  5. 브라질의 독립을 원하는 신하들이 부추겨서 황제가 된 것이다. 그는 부왕인 주앙 6세가 죽자 잠시 동군연합의 형태로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4세로 즉위했다가 2개월 뒤 포르투갈 왕위를 딸인 마리아 2세에게 물려주고, 브라질 제위는 5년 뒤 아들인 페드루 2세에게 물려주고 퇴위했다. 식민지에 제국 타이틀이 달린 인도 제국만주국의 대선배다.
  6. 사실 이건 후안 페론도 마찬가지로 후안 페론 본인이 메스티소라 인종차별을 여러번 겪어본적이 있기 때문. 물론 돈좀 벌겠다고 나치인사들을 숨겨줘서 미국으로부터도 소련으로부터도 욕을 거하게 먹었지만
  7. 이때 브라질이 수백억 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있었지만 외채가 하도 많은데다가 지금처럼 이자율이 1%대인것도 아니라서 기껏 흑자내도 그걸 빚 갚는데 다 썼던 상황이었다(...).
  8. 대대적으로 외자유치를 하여 경제를 살릴려는 의도에서 금융규제를 완화했지만 결과적으로 이게 독이 되었다.(동시기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볼리비아도 비슷한 꼴을 당했다.)
  9. 사실 카르도주 대통령은 사회학자로써 종속이론을 주장하는 등 대통령 취임 이전에는 좌파성향이 강했지만, 대통령 취임이후에 우파로 전향하다시피했다.
  10. 브라질의 피파 랭킹은 과거에는 1~3위를 찍었지만, 다소 부진한 최근에는 6위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