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코건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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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Patrick "Billy" Corgan Jr.
1967년 4월 17일 일리노이 주 출생. 키 191Cm의 위너. 스매싱 펌킨스의 리더. 작곡, 작사, 기타, 이미지 메이킹 등등 음악 관련해서 못하는게 없는 음악계의 팀 버튼. 앨범 만들때는 보통 드럼 빼고는 '내가 다 연주할거니까 니들은 손대지마' 이런 분위기로 거의 모든 부분을 직접 한다고 한다. 인터뷰에서는 작업하는 도중에 멤버들과 이견이 생기면 주먹다짐으로 해결하는데 본인이 다 이긴다고.

사실상 빌리 코건의 1인 독재 밴드였던 스매싱 펌킨스는 전성기에도 멤버들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밴드는 <Mellon Collie and Infinite Sadness>에서 정점을 찍은 후 점차 하강세를 타면서 쌓여있던 불화가 폭발, 결국 해체에 이르렀다. 이하와 다아시는 코건한테 악감정이 어찌나 쌓였는지 이후 상종도 안하고 있으며, 재결성 때는 코웃음도 안치고 뻐큐를 날리며 거부했다
.
어릴때부터 눈칫밥으로 단련된 영악한 성격이라 언플에도 소질이 있다. 그의 밴드가 항상 멤버가 미친년 널뛰듯 갈리게 되는 것도 이러한 그의 성격 문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라디오헤드보다 10년 앞서서 오리지널 펌킨스 시절 마지막 앨범을 인터넷으로 공개한 적이 있다. 몇년 전에는 비밀로 하기로 한 다아시의 탈퇴 이유를 은근슬쩍 팬싸이트의 노트에 밴드 활동에 소흘히 하는 것과[1] 코카인 중독 문제로 조용히 내보냈다는 걸 암시하는 글을 흘리듯이 올려서 밴드 붕괴의 책임을 전가한 적이 있다.

이런 사건들로 보아 섹고같은언론플레이에 능하면서 여자를 밝히는 천하의 개쌍놈마왕 이미지가 공존함을 알 수 있다.

감성적이고 시적인 가사를 잘 쓰는데, 2004년에는 아예 'Blinking with Fists'라는 시집을 낸 적이 있다.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에도 올랐었다고...

2 상세

8살 때 듣게 된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 앨범이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다. 블랙 사바스의 헤비함, 더 큐어(The Cure)와 바우하우스(Bauhaus)의 분위기 메이킹,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의 기타 표현 능력이 그의 음악의 기반이 되었다고. 스매싱 펌킨스 시절부터 들을 수 있는 두껍고 기름진 퍼즈 사운드는 블랙 사바스의 헤비한 기타톤을 지향한 것이라고 한다. 보컬 스타일은 치프 트릭(Cheap Trick)에 영향받았다고 한다.[2]

간결하고 인상적인 리프와 특유의 싸이키델릭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내는 각종 효과음 메이킹으로 유명한 수준급 기타리스트이다. 하지만 기타 솔로는 그다지 비중을 두는 편이 아니며, 본인 말로는 '나는 손이 빠르지 않아서 잉베이처럼 칠 수는 없거든' 이라고. 그럼 저건 누가 친건가 뿐만 아니라 밴드의 출세작 중 하나인 <Siamese Dream> 앨범의 경우 얼핏 들으면 그냥 기타가 별로 부각되지 않는 사이키델릭 성향의 얼터 음반 같지만 잘 들어보면 많은 곡에서 그의 속주 기타가 난무한다. 이 앨범이 멤버와의 불화로 혼자 다 해먹은 걸로 특히 기타 유명한 앨범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손 느리다는 건 그냥 제임스 이하 까는 얘기인 듯(...) 'Zero' 같은 곡에서처럼 가끔 기타 솔로를 아예 싸이키델릭 효과음으로만 채워넣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를 애용하며, 다양한 동화스러운 무늬로 기타 꾸미는 걸 좋아한다. 깁슨 ES-335도 가끔 사용. 기타리스트 중 에디 반 헤일런(Eddie Van Halen)과 리치 블랙모어(Richie Blackmore)를 좋아한다는데 기타 플레이는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 게 영...

좋아하는 밴드는 판테라(Pantera), 라디오헤드(Radiohead)[3],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 다이노서 주니어(Dinosaur Jr.), 러쉬(Rush), 메탈리카(Metallica) 등이라고.


빌리 코건의 어린 시절을 모티브로 한 자전적인 곡 <Disarm>의 비디오 클립. 곡 자체도 스메킹 펌킨스 고전 중의 고전이며 팽팽했던 오리지널 멤버들의 모습과 함께 올드팬들에게 좋았던 시절에 대한 무한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3 일대기

3.1 유년 시절

그의 독선적이면서 괴팍한 성격과 음악적 재능은 개인적인 인생의 굴곡과 연관성이 깊다. 그의 아버지 빌리 코건 시니어는 블루스 기타 연주자였고 1970년 부인 마사와 이혼 후 비행기 승무원과 재혼한다. 계모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빌리를 괴롭혔고 그의 배다른 동생은 뇌성마비, 투렛 증후군 환자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집에서 티비만 보면서 백수건달로 놀았고 코건은 7살부터 장애가 있는 동생을 돌보면서 계모의 학대를 견뎌야 했다. 왠지 콩가루 집안에서 탈선의 길에 빠진 소년 가장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가. <Siamese Dream>에 수록된 'Disarm'은 그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에 관한 자전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동 앨범의 'Spaceboy'는 그의 동생 Jessy에 대한 곡이다. 동생 Jesse Corgan과 드럼 잼을 함께 하는 영상 안하무인이였던 아버지와 자신을 눈꼴시립게 여기는 계모와는 달리 배다른 중증 환자의 동생, 친어머니는 애정을 가지고 사랑했다. 코건의 친어머니 마사는 1996년 사망했다. <Adore>에 수록된 'For Martha'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추모곡이며, 이후 그는 자신의 레이블 이름을 'Martha's Music'으로 개명한다.

중학교때에 농구선수였고 고등학교때는 육상을 했다고 한다. 참고로 얼굴만 봤을 땐 모르지만 키가 191 꺽다리이다. 신체적으로 운동에 능하지만 왼쪽 손에 홍반이 있어 컴플렉스이기도 하다. 사진을 찍을때는 가리는 편.

공부를 잘해서 고등학교 졸업 후 미시건 주립대 등의 대학에서 장학생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프로 뮤지션이 되고 싶었던 그는 진학을 포기한다. 시카고 인디씬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플로리다로 가서 'The Marked'라는 밴드를 조직하지만, 밴드는 지지부진하게 해산되고 다시 시카고로 돌아온다. 고향 시키고로 돌아와서 '난 음악가가 되기 굴렀나봐' 하고 망연자실 하며 집에 짱 박혀 있을 때 용기를 준 사람이 코건의 오랜 소꿉친구였던 크리스 퍼비언 이었다. 그들은 사귀기 시작하나 얼마 후 결성된 스매싱 펌킨스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고 퍼비언 역시 자신의 직업 (그녀는 시카고의 미술관에서 일하고 있었다.)에 집중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갈라진다.

3.2 스매싱 펌킨스

이후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면서 새 밴드 조직을 모색하던 차 제임스 이하를 만나게 되어 같이 데모 테이프를 만든다. 이 데모에서 코건이 2곡, 이하가 1곡을 썼는데 이 때 이하가 쓴 곡을 엄청나게 까서 삐진 이하는 한동안 그와 말도 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4] 어느날 코건은 공연을 보러 갔다가 평소처럼 공연을 마친 밴드를 신나게 까고 있던 차, 옆에서 그 말을 듣고 빡친 여자와 키배를 뜨게 되는데(..) 그 여자가 다아시였다. 키배 뜨다 정이 들었는지 다아시를 베이스로 영입한 밴드는 시카고의 라이브 하우스에서 성공적인 데뷔를 마치고 그는 당시 밴드가 주로 연주하던 클럽 메트로 사장의 추천으로 드러머 지미 체임벌린을 영입하여 밴드 4인 체제를 갖추고 스매싱 펌킨스라는 이름을 붙인다.[5] 1988년의 일이었다.

1990년 서브팝을 통해 발표한 그들의 데뷔 싱글인 과 후속 싱글 <Tristessa>가 순식간에 품절되자 이에 자신감은 얻은 스매싱 펌킨스는 메이저 진출을 시도한다. 버진레코드와 계약에 성공한 이들은 Caroline 레이블에서 1991년 5월 대망의 1집 <Gish>를 발매하게 된다. 프로듀서 Butch Vig(부치 빅)의 Smart Studios에서 녹음된 이 앨범은 몽롱한 디스토션이 걸린 단순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기타리프가 돋보이는 밴드 극초기의 곡들인 'Siva'와 'Bury Me', 프로그레시브 록을 연상시키는 역동적인 구조와 시적인 가사가 돋보이는 'Rhinoceros', 'Snail' 등 그런지 사운드와 어쿠스틱 사운드를 적절히 배합시킨 몽환적인 얼터사운드를 선보이며 주목받았다.

1집 <Gish>가 발매된 직후 이들은 18개월이라는 긴 스케줄로 된 <Gish> 월드 투어에 나섰고 9월에는 영국 Camden Underworld를 통해 유럽에 데뷔했다. 비슷한 시기, 펑크적인 얼터사운드를 선보여 록씬을 평정한 너바나가 월드 투어를 시작해서 사기를 꺽기도 했지만 밴드는 수준급의 라이브를 통하여 나름대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빽빽한 일정으로 멤버들은 지쳐버렸고 마침내 1992년 Reading Festival에서는 빌리가 흥분하여 기타를 부수어 버렸다.(...)

1년이라는 기나긴 투어가 끝나고 코트니 러브와의 결혼마저 결렬되자 시카고에서 은둔 중이었던 빌리 코건은 자살 시도가 실패하고 크리스 퍼비언과 결혼한 후 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후세 사람들이 자신과 밴드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후세 사람들이 기억할만한 명반 하나는 남겨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다시 기타를 잡고 작곡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 레코드 임원들은 스매싱 펌킨스 1집의 판매량을 못마땅해하며 계약을 파기하려고 했고 결국 빌리는 그들 앞에서 혼자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앨범에 수록될 주요 곡들을 연주해서 평가를 받아야하는 상황을 겪게 된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빌리 코건은 이렇게 굴욕적인 행동까지 해야 한다면 차라리 음악을 포기하고 다른 직업을 가져보자고 생각, 일부러 대충 연주했는데 그것을 들은 임원들이 그런지의 과격함이 묻어나오는 것 같다며 앨범 제작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2집 앨범의 제작이 성사되자 빌리 코건은 본격적으로 앨범 녹음을 시작하려고 했으나 드러머인 지미 챔발린은 1집 투어 중 접한 헤로인에 중독되어 헤롱거리고 있었고 연인 사이였던 제임스 이하와 다아시는 1집 투어 중 파경을 맞이하여 같이 스튜디오에 있는 것도 거부할 정도로 사이가 악화된 상태였다. 그러자 빌리 코건은 애틀란타에 있는 Triclops Sound Studios에서 프로듀서 부치 빅의 도움을 받으며 지미 챔벌린에 의해 미리 녹음된 드럼파트를 제외한 모든 악기를 혼자서 다 연주하는 엄친아(..)적인 행동을 하여 앨범을 완성시킨다. 1993년 7월 발매된 2집 앨범 <Siamese Dream>은 40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고 1993년 빌보드 차트 4위까지 오르며 성공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한 퍼즈 톤의 기타 멜로디가 돋보이는 'Today', 자신의 불행한 유년 시절을 담은 'Disarm', 숨겨진 좋은 곡 'Geek USA', ' Rocket', 병으로 고생하는 동생 Jesse를 위해 만든 'Spaceboy' 등 앨범 수록곡들 대다수가 명작으로 꼽힌다.

2집 <Siamese Dream>의 세계적인 성공 후 그는 '다음 앨범을 마지막으로 밴드가 해체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완벽한 앨범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채로 3번째 앨범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의 작업을 시작했다. 빌리 코건은 사실상 자신의 솔로 앨범이었던 전작과 달리, 밴드 구성원들이 다함께 협력하는 온전한 밴드 앨범을 만들고 싶어했다. 우선 밴드의 라이브 사운드를 앨범에 담고 싶어한 그는 그전까지 스매싱 펌킨스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은 부치 빅 대신에 나인 인치 네일스와의 작업으로 유명한 플러드와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명반 Loveless 앨범의 앤지니어를 맡은 알란 모울더(Alan Moulder) 라는 2명의 프로듀서를 고용하였다. 기타 솔로는 코건과 이하가 반반 나누어서 연주했으며 베이시스트 다이시가 앨범 대부분의 곡에 코러스를 맡았다. 각 CD의 마지막 두 곡은 제임스 이하가 작곡 했으며 그 중 Farewell and Goodnight은 밴드 멤버 전체가 파트를 나눠 불렀다. 하지만 빌리 코건의 워커홀릭 기질로 인해 밴드 멤버들은 하루에 15시간 레코딩이라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고 결국 앨범 작업 중 멤버들간의 불화가 다시 심화되었다.(...) 어쨌든 이러한 힘겨운 여정을 끝내고 1995년 10월 24일,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가 더블 앨범의 구성으로 발매되었다


관현악의 선율로 가득찬 'Tonight,Tonight'에서부터 하드한 'Fu** You'에 이르기까지 28트랙 모두 하나도 놓칠수 없는 놀라운 곡들로 가득차 있는 앨범은 미국 내에서만 1200만장 이상이 팔리며[6] 그들의 가장 성공한 앨범이 되었다. 하지만 3집 투어 도중 헤로인 과용으로 키보디스트 멜보인이 죽고, 곁에 있던 드러머 지미 챔버린이 마약소지혐의로 체포되면서 밴드는 활동을 반강제로 중단하였다.[7] 1996년 8월 27일 중지되었던 투어는 드럼에 맷 워커(ex-Filter), 키보드에 데니스 플레밍(the Frogs)을 보강하여 라스베가스에서 다시 시작되었고 투어가 종료된지 18개월 후에는 지미 챔버린이 빠진 라인업으로 새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그것이 바로 4집 <Adore>다.

물론 드러머가 빠진 언밸런스한 라인업에다가 앨범 발표 전 참여한 사운드트랙의 일렉트로니카 성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곡들에서 어느정도 예견되긴 했지만 1998년 발표된 <Adore>는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앨범에는 디스토션으로 무장한 기타리프는 간데없이 어쿠스틱한 피아노 반주에 시니컬하고 조용조용해진 빌리의 목소리가 담겨있었고 전반적으로 테크노 느낌이 강했다. 덕분에 기존 사운드를 바란 팬들의 외면속에 차트에서도 고전을 면치못했고 평론가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8] 그러나 이 앨범은 현재 훗날 빌리 코건이라는 한 사람의 개인적인 모습이 가장 많이 담긴 앨범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약물복용으로 그룹에서 빠졌던 드러머 지미 챔벌린이 돌아오는 우여곡절 끝에 2000년 2월, 그들의 통상 5번째 앨범 <MACHINA/the machines of God>이 발매된다. 앨범은 전작 <Adore>의 연장선상인 변형된 테크노 사운드와 두터워진 퍼즈톤의 사이키한 분위기, 중세풍의 컨셉으로 엮인 가사, 독일의 표현주의에 입각한 뮤직비디오로 중무장하였지만 팬들의 관심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앨범 녹음을 마치고 다아시는 영화 배우로 데뷔를 준비한다며 팀을 떠났으며 빈 자리는 코트니 러브의 밴드인 Hole의 메리사가 채웠다. 결국, 2000년 7월 4일 열린 서울 공연을 마지막으로 밴드는 해체를 선언한다.

스매싱 펌킨스는 초중기 2집까지만 해도 하드록 내지 헤비메탈에 기반하여 특유의 동화적인 감각을 가미한 음악을 주로 했으나, 인더스트리얼 계열 음악이 한참 뜰 때부터 테크노/인더스트리얼의 영향을 점점 받기 시작하더니[9] 4집 <Adore> 이후부터는 줄곧 일렉트로닉적인 요소가 강한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 스매킹 펌킨스 해체 이후로 밴드 <Zwan>도 결성했었으며 즈완이 해체된 후 2005년 발표한 솔로 앨범 'The Future Embrace'는 이러한 일렉트로닉/슈게이징적 경향이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앨범 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나 대중적인 호응은 갈수록 좆망.[10]

3.3 연애사

'The Marked' 해체 후, 고향 시키고로 돌아와서 '난 음악가가 되기 굴렀나봐' 하고 망연자실 하며 집에 짱 박혀 있을 때 용기를 준 사람이 코건의 오랜 소꿉친구였던 크리스 퍼비언으로 그들은 사귀기 시작하나 얼마 후 결성된 스매싱 펌킨스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고 퍼비언 역시 자신의 직업 (그녀는 시카고의 미술관에서 일하고 있었다.)에 집중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갈라진다.

1집 녹음 직전, 빌리 코건은 코트니 러브를 만나서 사귀게 되고 투어가 끝나면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1집 <Gish> 투어를 떠난다. 빌리 코건은 훗날 인터뷰에서 자신의 가족에게 정식으로 코트니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코트니가 기존의 Riot Girl 이미지와는 다른 지적이면서도 조신한 이미지를 보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본 것이 자신의 생애에서 재일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로 뽑았을 정도로 굉장히 기뻐했다고 한다. 하지만 빌리 코건이 Gish 투어를 돌며 외국으로 떠나있는 사이에 코트니 러브는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과 양다리를 걸치기 시작했고 곧, 자신이 커트의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되자 빌리 코건과의 결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직후 1992년 커트 코베인과 결혼해버린다. 스매싱 펌킨스의 1집 <Gish>이 같은 프로듀서 부치 빅 의해 프로듀싱되고 발매일도 얼마 차이 나지 않는 너바나의 Nevermind 앨범에 가려져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코트니 러브가 커트 코베인과 속도위반으로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멘붕한 코건은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걸리게 된다.

Gish 투어 당시 다이시 렛츠키와 제임스 이하는 연인관계였는데 일설에 의하면 코트니에게 이별 통보를 받자, 둘의 애정표현을 질투한 코건이 공연에서 사소한 실수만 해도 둘에게 계속 바가지를 긁어대서 둘의 사이가 안 좋아져서 헤어졌다는 카더라가 있고 한창 스매싱 펌킨스가 2집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던 시기의 인터뷰에서 인터뷰어가 빌리 코건과 커트 코베인을 비교하자 빌리 코건은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그와 나는 기타를 연주하는 손조차 정반대이다. (빌리 코건은 왼손잡이인데 오른손으로 기타를 연주하고 커트 코베인은 오른손잡이인데 왼손으로 기타를 연주한다.)"라며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커트 코베인이 자살 후에 빌리 코건이 개입한 타살설이 나돌기도 했다 카더라.)

2집 녹음이 완료된 직후, 빌리 코건은 크리스 퍼비언을 다시 만나게되고 크리스 퍼비언이 빌리 코건에게 프로포즈를 하여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1993년 스매싱 펌킨스의 2집이 전세계적으로 히트하자 빌리 코건은 전여친 코트니 러브를 다시 만나기 시작하고 너바나가 투어일정으로 커트 코베인이 외국으로 갔을 때 단둘이 여행을 가는 등 대놓고 바람을 피기 시작한다. 1995년, 크리스 퍼비언은 남편이 전여친과 바람을 피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남편과 별거에 들어간다. 아내와 별거 생활을 시작한 직후 코건은 코트니 러브의 집에서 동거를 하기 시작하면서 밴드 홀의 새 앨범 <Celebrity Skin> 작업에 프로듀서로 참여한다.

1997년, 아내와 정식으로 이혼한 빌리 코건은 코트니 러브에게 다시 프로포즈를 하지만 커트의 사망 후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지쳐있는 상태였단 코트니는 부담감을 느끼고 코건의 고백을 다시 거절한다.

이후 빌리 코건은 1996년 <Zero> 뮤직비디오를 찍을 때 처음 만났던 여성 디자이너인 옐레나 옘척과 사귀기 시작하다가[11] 밴드 활동에 대한 의견차로 갈라진다. 빌리 코건은 3집 활동을 끝내고 밴드를 해체하고 옐레나 옘척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며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고 옐레나는 밴드의 지속적인 활동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녀와 헤어진 후, 그의 여성편력은 헐리우드 스타들의 비밀 마사지 클럽에 드나드는 장면이 공공연히 찍힐 정도로 심해지기 시작했다. 2009년에는 제시카 심슨과 같이 있는 장면이 파파라치에 찍혔다. 지금은 베로니카스의 멤버인 17살 연하(!)의 제시카 오리글리아소와 사귄다고 페이스북에 인증했다가 지금은 페이스북을 접었다. 대놓고 도둑질

3.4 트리비아

대한제국 순종황제 시절 이후로 우승을 못하는 모 야구단의 열렬한 팬이다. 심심하면 리글리 필드에 출몰하고 7회 Take me out to the ballgame을 부른다.

프로레슬링 마니아로 이전부터 자기가 직접 프로모션 하는 단체를 보유중이다. 한편 2014년 말 TNA가 여러 병크로 휘청거리자 TNA를 구매한다는 루머가 있었지만 2015년부터는 TNA의 각본 담당 수석 프로듀서로 취임해 활동 중이다. 방송에도 얼굴을 비추고 TNA 관련 질문에 답해주고 있다. 이러한 이력 덕분인지 선수들을 자기 콘서트에 초청하며 선수와 단체의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2016년 8월 12일 결국 딕시 카터를 대신해 TNA의 새로운 사장이 된다. 그러나 음악씬에서 25년을 버텨온 양반이 이번에는 호구를 잡혀버렸다..

오리지널 스매싱 펌킨스 해체 전까지는 욕을 먹어도 천재 소리를 들었는데 재결성 이전 몇년간 밴드 즈완 결성, 솔로 앨범, 시집 발표등 뭔가 활동은 열심히 했는데 이상하게 평가가 좋지 못했으며, 묘하게도 이런 실망의 여론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빡빡이 외계인 컨셉이 강해질수록 심해졌다. 사람들이 스매싱 펌킨스를 좋아했던 건 음악 외적인 것보다 동화풍의 멜로디와 가사에 숨어있는 번뜩이는 이미지 때문이었다는 걸 반증하는 셈. 어차피 처음부터 그의 밴드는 자기 혼자 북치고 장구치던 밴드였기 때문에 딱히 전성기 멤버를 못모아서라기보다는 그냥 전성기 시절만큼 임팩트 있는 곡을 못만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창작 활동은 아직도 왕성하긴 한데...

밴드 베이시스트는 항상 여자로 채워서 밴드 여성 멤버들과 항상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냐 입방아에 오를 때도 있다. 오리지널 멤버일때 다아시는 제임스 이하와 사귀다 깨졌으므로 설마 거기까지 마수를 뻗쳤을까 싶지만 실제 즈완 시절의 베이시스트 파즈와는 사귀다 깨진 것이 확인되었다.

  1. 다이시는 당시 영화 배우 데뷔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2. 시카고에서 연주한 멜랑콜리 투어 오프닝 공연에서 칩트릭을 게스트로 부른 적이 있다.
  3. '라디오헤드가 세계 최고의 밴드가 아닐지언정, 세계 최고의 밴드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라고...
  4. 이 때부터 시작된 무한 까임에 지친 이하는 결국 코건과의 관계를 아예 끊어버리게 된다. 나중 일이지만.
  5. 이 밴드 이름은 코건 빼고 아무도 안 좋아했다고 한다.
  6. 이건 더블 앨범이라 앨범 판매량을 두배로 계산해서 집계된 결과이기도하다. 즉, 6백만장 x 2 = 1200만장.
  7. 투어가 중단되자 제임스 이하는 솔로 1집 녹음을 시작한다.
  8. 약 200만장이 팔렸다고 한다.
  9. 이런 경향은 영화 Lost Highway OST에 수록된 'Eye' 즈음부터 드러나기 시작한다
  10. 69000장 팔렸다(...)
  11.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사귀었다고 한다. 4집 <Adore> 앨범의 고딕 컨셉은 전형적인 옐레나 옘척의 테이스트로 채워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