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키 바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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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artjie "Sarah" Baartman
1789 ?월 ?일 ~ 1815년 12월 29일

1 개요

식민통치, 여성학대, 인종차별의 결정체

19세기 인종차별,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프랑스유럽을 돌면서 구경거리가 되었던 인물이다. 사라 바트만으로 불리기도 하며, 유럽에서 코이코이족을 비하하는 단어로 쓰이는 호텐토트족인 점을 따 '호텐토트 비너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는 나미비아원주민인 코이코이 족 태생이다. 백인들에게 붙잡혀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으로 이주당했다가 유럽으로 팔아넘겨지게 된 기구한 아픔을 갖고 있다.

2 일생

19세기 사키 바트만이 살고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백인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고 코이코이족은 대부분이 죽었다. 그러나 사키 바트만은 살아남아 유럽으로 팔려 나갔다. 사키 바트만의 큰 엉덩이가슴 등의 특이한 외형 때문에 호기심을 갖게 된 영국인 윌리엄 던롭(william dunlop)은 이를 돈벌이에 이용할 목적으로 사키 바트만을 구입한다.

그 이후 사키 바트만은 유럽을 다니며 인간 전시물이 되어 큰 인기를 끌게 되며 윌리암은 큰 돈을 벌게 된다. 사키 바트만은 동물 상인에게 팔려다니는 등 동물로 다루어졌고, 초기에 영국에서 "전시"되다가 인권 선지자에 의해 비판받게 되자 뒷일이 귀찮아지게 된 윌리엄 던롭은 사키 바트만을 프랑스의 한 조련사에게 팔아넘겼다. 사키 바트만은 프랑스로 건너가게 된다.

당시 유럽인들은 코이코이족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우수한 유인원' 정도로 생각했고, 코이코이족을 비하하는 단어인 호텐토트를 따 '호텐토트 비너스'라고 불렀다. 사키 바트만은 광장, 대학, 서커스 등에서 나체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후 사람들의 관심이 사그라들자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매춘부가 되어 불행한 삶을 살았고, 결국 프랑스로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천연두 혹은 매독, 폐렴으로 26세의 나이로 쓸쓸하게 타향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사키 바트만은 외모와 인종 때문에 이런 차별을 겪게 되었고 훗날 여성 학대, 식민 통치의 잔혹성, 인종차별의 상징이 되었다.

3 사망 이후

사망 이후에도 그녀의 유해는 정상적으로 반환되지 않고 프랑스에 귀속되었으며,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라는 인종차별적 주장도 여전했다. 이러한 주장을 근거로 바트만의 유해는 와 성기, 등의 내장이 들어내져 연구 대상이 되거나[1], 박제되어 1974년까지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그러나 바트만의 유해에서 추출한 유전자를 감식한 결과 완전한 인간이라는 결과가 나와 동물 논쟁은 끝을 맺었다.

이후에 인권단체들을 중심으로 유해 반환 시위가 일어났으나 프랑스는 사키 바트만의 박제에 대해 '타국에서 유입된 유물은 프랑스 소유'라는 관련 법규억지[2]를 들어 남아공으로의 반환을 반대하였다. 무슨 마약하시길래 2002년까지 박물관에 인종차별의 상징을 전시할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인권단체들은 '사람의 신체는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다'는 다른 법 규정을 들어 프랑스 정부의 반환 반대에 반박하였다. 결국 2002년 5월[3] 끝까지 발악하던 프랑스는 악화되는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마지못해 사키 바트만의 유해를 200년 만에 본국인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스턴케이프 주에 되돌려주게 되었다. 그녀의 매장식에는 타보 음베키 남아공 대통령과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을 비롯, 8천여 명이 참석하였다.

2010년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이 검은 비너스라는 제목으로 전기 영화를 만들었다.

  1. 이 짓을 한 사람이 조르주 퀴비에. 공룡 등 고생물학 얘기가 나올 때 나오는 그 사람 맞다. 고생물학자일 뿐만 아니라 생물학자, 해부학자이기도 해서 퀴비에는 그녀를 해부해서 조사하고는 바트만은 인간이 아니라 유인원이라고 결론 지었다. 바트만의 경우 뿐만 아니라 흑인을 가리켜 영장류에 접근해 있다며 “이 인종에 속하는 무리들은 언제나 완전히 야만 상태에 있다”라는 망언도 지껄였다. 퀴비에는 진화론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는데 이건 당시 과학 수준의 한계였으니 흑역사라고까지 할 것은 아니지만 바트만과 흑인과 관련되어선 얄짤없이 흑역사 확정. 당시 시대상 당연했다는 논리도 있는데, 이미 퀴비에가 살던 시대에는 흑인도 같은 인간이니 노예에서 해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는데(특히 프랑스 혁명 시대에는 일부 흑인들을 노예에서 해방시켜 프랑스군에 넣기도 했다. 물론 이걸로 완전히 인종차별을 폐지했다고 보기에는 힘들지만.) 오히려 과학의 이름으로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짓에 앞장 선 것이다.
  2. 제국주의 시절에 남의 나라에서 막 가져온 걸 돌려주면 소위 세계적인 박물관들(대영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등)이 텅텅 빌 것을 우려해 '내 집에 있으니 내 거'라고 우기는 것이다. 물론, 옛날에 정상적인 거래나 선물로 들어온 것까지 돌려달라는 요구도 차단한 셈. 이걸 빌미로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미루고 미루다가 반환 약속한지 10년이 지나서야 '장기 임대' 형식으로 우리나라에 돌려줬다. 사키 바트만의 사례는 자유, 평등, 박애, 똘레랑스를 주장하는 프랑스가 한 여성의 인권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명백히 우선시한다는 실상을 보여준 사례인 셈. 2007년에는 루앙시에서 마오리족 머리 미라를 뉴질랜드에 반환하려고 하자 프랑스 정부에서 또 반대했다. 결국에는 돌려주기는 했지만. 하지만 사키 바트만의 경우는 물건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에 많이 다르다. 따지고 보면 납치한 후 박물관에 영구감금시키는 게 되는 것이다.
  3. 그렇다. 한국과 일본에서 2002 월드컵이 벌어지기 직전의 일이다! 그리고 그 월드컵에서 프랑스는 조별리그 탈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