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의 역대 황제 | |||||
6대 신종 성황제 조욱 | ← | 7대 철종 소황제 조후 | → | 8대 휘종 현황제 조길 |
묘호 | 철종(哲宗) | |
시호 | 헌원계도현덕정공흠문예무제성소효황제 (憲元繼道顯德定功欽文睿武齊聖昭孝皇帝) | |
연호 | 원우(元祐, 1086년 ~ 1094년 4월) 소성(紹聖, 1094년 4월 ~ 1098년 5월) 원부(元符, 1098년 6월) | |
성 | 조(趙) | |
휘 | 후(煦) | |
생몰기간 | 1077년 1월 4일 ~ 1100년 2월 23일 | |
재위기간 | 1085년 4월 1일 ~ 1100년 2월 23일 |
1 개요
송신종의 6남으로 흠성황후 주씨 소생이다. 6남이었지만 다섯 형이 모두 요절하면서 황제가 되었다. 철종이 즉위한 다음 해에 신법파 왕안석이 사망했으며 구법파 사마광이 재상이 되었다. 사마광은 왕안석의 신법을 폐지하고 기존 정책들을 부활시키자 구법파와 신법파의 갈등이 벌어졌다. 거기다 사마광이 머지않아 사망하자 신법파 구법파의 당쟁은 더욱 가속화되어 정치혼란으로 인해 북송의 국력은 급속도로 약화된다.
수렴청정하던 선인태후가 사망하고 철종이 친정을 시작하자 신법이 부활한다. 이 때 구법파가 대거 숙청되고 신법파들이 등용되었다. 그러다 1100년 철종이 사망하자 영태릉에 안장되었다. 철종의 외아들 헌민태자(獻愍太子) 조무(趙茂)가 요절했기 때문에 그의 뒤를 이어 이복 동생 조길이 즉위했는데, 이후 북송은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의 무덤은 영태릉은 북송의 황릉들과 함께 금나라 장군 점한과 금나라 괴뢰국 제나라 꼭두각시, 허수아비 황제 유예[1]에 의해 도굴되었다. 점한은 송태조의 영창릉에서 옥대와 보기들을 싹쓸이하는 등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으며 유예는 철종의 영태릉에서 옥기와 보물들을 약탈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이 때 철종의 시신은 끌려나와 밖에 버려졌는데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남송의 방현령이 이를 보고 통곡하여 인근에 손에서 피가 나도록 땅을 파서 시신을 매장하고 돌아와 송고종에게 이를 알리니 송고종은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2 여담
김용의 소설 천룡팔부의 막바지에 선인태후가 임종을 앞두는 장면에서 등장하여 신법파를 등용하고 요와의 전쟁을 꿈꾸는 모습으로 나온다. 철종이 친정을 시작하며 중신들을 물리치자 요의 도종이 기뻐하며 송나라의 침공을 계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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