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월

司馬越

?~311

서진의 황족. 사마의의 넷째 동생인 동무대후(東武戴侯) 사마규(司馬馗)[1]의 손자이고 고밀문헌왕(高密文獻王) 사마태(司馬泰)사마태[2]의 맏아들이다.

자는 원초(元超).[3] 봉토는 동해군(東海郡), 시호는 효헌(孝獻), 작위는 왕(王)으로 모두 더해 동해효헌왕(東海孝獻王)이다.

무제 사마염에 의해 기마도위 양준, 동안왕 사마요와 함께 황태손 사마휼의 교육을 담당했으며, 산기시랑, 좌위장군, 시중을 지내고, 291년 동해왕에 봉해졌다. 306년 예장왕 사마치와 연합하여 성도왕 사마영 등을 주살하고, 진혜제가 사망한 후[4] 사마치가 회제로 즉위하면서 대권을 손에 넣었다.

팔왕의 난을 일단 수습하고, 서진의 재건에 노력했다. 병주자사 신채무애왕 사마등(司馬騰), 양왕 사마략(司馬略)、남양왕 사마모(司馬模), 낭야왕 사마예를 각각 업, 양양, 장안, 강남에 보내 거점 지역을 장악하게 하고, 자신은 허창에 주둔했다.

자신의 권력을 굳건히 하기 위해 307년 회제의 조서를 빙자해 스스로 승상이 되었으며, 308년 유폐된 청하왕 사마담을 죽이고 회제의 친족과 측근들을 숙청하면서 인망을 잃었다. 이 때문에 유총왕미 등이 공격해왔을 때 대군을 모을 수가 없었음에도[5] 분전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311년 석륵이 침입해 오자 항성으로 출전했으나, 사마월을 토벌하라는 회제의 밀조를 발견하고 울분이 터져 분사해 버렸다.

사마월 1인 독재 체재로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서진 정권은 사마월의 죽음과 함께 사실상 붕괴된다. 낙양에 있던 사마월의 심복 태위 왕연, 용양장군 하륜, 이군 등은 사마월의 미망인 배씨와 함께 사마월의 상중을 감추고 그 아들 진군장군 사마등을 받들어 동해로 가려고 했다. 이 때 귀족, 고관, 백성, 군사 등 10만여명[6]이 함께 낙양을 탈출하여 동해로 떠났는데, 도중에 석륵에게 습격당하여 모두 몰살되고 만다. 사마월의 관은 부서지고 시체는 끌어내어 불태워졌다. 배씨는 노예로 팔렸으나, 도망쳐 사마예에게 의탁했다. 사마예는 동진을 건국한 후 사마월에게 시호로 효헌(孝獻)을 내리고 자신의 3남 사마충(司馬沖)을 동해왕에 봉해 사마월의 양자로 삼았다.
  1. 자는 계달
  2. 자는 자서
  3. 원(元)은 맏아들이라서 붙고 초(超)는 이름과 뜻이 같다.
  4. 사마월의 집권 후 급사했다는 기록에서 독살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5. 사마염이 천하통일 이후 감군 정책을 펴서 전국의 군대를 줄인 탓도 있지만, 주로는 사마월의 악명 때문이었다.
  6. 이 군사들이 낙양의 주력병력이었다. 결국 이들이 떠나고 박살나자 낙양은 손쉽게 함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