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회제

(사마치에서 넘어옴)
이 문서는 사마치으로도 들어올 수 있다.
서진의 역대 황제
2대 혜황제 사마충3대 회황제 사마치4대 민황제 사마업
시호효회황제(孝懷皇帝)
연호영가 (永嘉, 307년 ~ 313년 4월)
사마(司馬)
치(熾)
풍도(豊度)
생몰기간284년 ~ 313년 3월 14일
재위기간307년 1월 11일 ~ 311년 7월 13일

1 개요

사마치는 서진의 3대 황제이자 묘호는 회제(懷帝)다. 재위기간은 307-312년. 무제 사마염의 25남으로 자는 풍도. 사마염의 두번째 아내인 효회태후 왕원희의 아들로, 사마충의 이복동생이다.

황제가 되었기에 팔왕의 난의 원흉인 팔왕으로 지목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팔왕의 난에 깊숙하게 관련되었기 때문에 황제가 되었으며 이 후의 행적으로 보건데 팔왕의 목록에 올라가고도 남을 인물이다. 그러나 서진의 사실상의 멸망인 낙양 함락을 겪었으며, 본인도 비참한 종말을 맞았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큰 비판은 받지 않는다.

2 즉위

예장왕이었으며 워낙 뒤에 아들이라 황제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동해왕 사마월에 의해 옹립되어 태제가 되고, 사마충의 사후에 즉위한다(팔왕의 난 종결). 그러나 이미 흉노족 등의 이민족들의 성장으로 나라는 위급했고 하북 지방에서는 흉노족 유연의 뒤를 이은 전조의 3대 황제 유총이 점점 침공해왔다. 그리고 옛 촉 땅에서는 저족 이웅이 성한을 세워 이미 나라는 분열되고 있었다.

3 내분

당시 대권은 권력자 사마월이 쥐고 있어 사마치는 실권이 없었다. 유총이 남하해오자 사마월은 허창에 주둔해서 항전했다. 사마월은 군대를 모으려고 했지만 사마염이 삼국통일을 한 후에 전국에 있던 군대를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감축해버린 탓에 어려움을 걲였다. 더구나 앞서 일어난 팔왕의 난으로 인해 그나마 남은 군대를 거의 다 날려먹었으므로 대군를 모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정예병도 거의 없었으므로 계속 패배하자 사마월은 위기를 느꼈다. 사마월은 자신의 실수를 덮고 사마치를 겁주기 위해 마음대로 사마치의 대신들을 주살했다. 이에 참지 못한 사마치는 오만방자한 그를 주살하기 위해 심복 구희에게 밀서를 내렸다. 그러나 구희가 체포되어 사마월은 이를 알게 되었고 안그래도 자신을 향한 참소와 음모가 가득차서 울분에 차있던 상황이라 결국 사마월은 분사해버렸다.

사마월은 자신의 대권을 태위 왕연에게 넘기고 죽었다. 그러나 왕연은 황제를 지키지 않고 오히려 황족, 고관, 대신, 부호, 백성 등 10만여명을 이끌고 낙양을 떠났다. 이 때 왕연은 사마월의 영구를 선두에 세우고 그의 영구를 그의 봉지 동해에 매장한다는 이유로 동해로 떠났다. 그러나 311년 4월 이 행렬은 갈족 석륵의 군대에 발견되었고 간단히 격파당했다. 이 때 백성들과 군사 수만명이 몰살당했으며 왕연과 대신들, 그리고 서진의 친왕 48명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이들은 결국 흙담장 밑에 두고 일부러 담장을 넘어뜨러 압사시키는 방법으로 모두 피살되었다. 문제는 왕연이 이끈 무리들이 낙양을 수비할 주력병력이었다는 것이다.

4 포위

311년, 유총이 보낸 그의 친족이자 총사령관 유요, 석륵, 한족 왕미, 호연안 등의 군대가 낙양 주변을 모두 함락시켰다. 이렇게 낙양이 고립되자 그제서야 사마치는 장안으로 도망치려고 했으나, 낙양을 나서기도 전에 도적들을 만나(...) 다시 돌아와야 했다. 첫번째 좌절 결국 구희의 제안에 따라 이번에는 카이펑 북쪽 창원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대신들이 차일피일 미뤄서 흐지부지되었다. 두번째 좌절 이 때 대신들이 피난을 미룬 이유는 자신들의 재물, 특히 영지에 연연했기 때문이었다. 재물은 가지고 가면 되지만 땅은 부동산이니... 결국 유요의 군대가 낙양을 겹겹히 포위하자 사마치는 낙수에 배를 띄워놓고 이번에는 물길을 따라 동쪽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호연안이 배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세번째 좌절

결국 낙양에 남아있던 서진의 군대는 유요 등이 이끄는 2만 7천명에 맞서 저항해야 했다. 물론 숫자상으로는 서진의 군대가 아직 많은 상황이지만, 본질적으로 정예인데다가 기병인 유요의 군대와 보병인데다가 정예도 아니고 물자부족에 시달리던 서진의 군대는 전투력면에서 차이가 엄청났다. 그래서 서진의 군대는 12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패배해서 3만명이나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싸운다란 말을 할 정도로 분전했지만 병력부족 문제를 끝내 이겨내지 못했다.

결국 311년 6월 낙양은 공방전이 벌어진 지 1달 만에 점령되었다. 유요의 군대는 노략질하고 궁인과 보물들을 거둬들였다. 사마치는 화림원으로 나와 다시 장안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워낙 급한 탓에 변장을 하지 않고 도망치는 바람에 매의 눈을 하고 달려오는 적군들에게 곧 사로잡혀 단문에 유폐되었다. 마지막 좌절 유요의 군대는 무기고에 이르러 태자 사마전을 죽이고 무기고를 점령했다.

그러나 궁전이 갖춰진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자는 왕미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유요는 낙양을 깨끗이 태워버렸다. 이리하여 동탁의 방화에 의해 파괴된 뒤, 손견이 화재를 진압하고 조조 때부터 꾸준히 복구되어 조비를 거쳐 조예 때 재건된 낙양은 120여년 만에 다시 폐허가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동탁이 부숴버린 낙양에 대한 재건의 첫 삽을 손견이 떴고 그 삽을 조조가 다시 떴고 그 바톤을 조비와 조예가 순서대로 물려받으며 낙양을 다시 도시로 만들어놨더니 유요가 동탁이 했던 그대로 따라하며 낙양을 다시 부숴버렸다. 특히 조조는 낙양을 재건하는데 자기 사재 일부를 털어넣기까지 할 정도로 정성을 쏟았었다.

비록 낙양을 불태웠지만 나름 군기를 유지한 흉노족보다 오히려 약탈이 극심한 부대는 도적 출신으로 흉노에 투항한 한족 왕미의 군대였다. 이들은 낙양이 폐허가 되기 전에 민가를 약탈하고 역대 황릉들을 철저하게 도굴해 부장품들을 챙기고 파괴했다. 이 때문에 현재 낙양에 있는 서진의 황릉들은 어느 것이 사마의의 고원릉인지, 어느 것이 사마염의 태양릉인지 등에 대해서 불분명하다. 다만 사마의의 고원릉은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다고 한다. 더구나 이 약탈은 유요가 말릴 정도로 극심했다. 왕미는 원래 한족이었지만 출세를 위해 유연에게 투항한 자였다. 또 명색이 총사령관이었던 유요의 말을 듣고 일단 굴복했지만 '흉노의 자식놈이 뭘 알겠는가'라고 비웃으면서 일단 동쪽으로 이동했다. 거기서 석륵을 습격해 군대를 흡수하고 천하를 노렸지만 바보가 아니였던 석륵에게 역관광당하고 왕미는 죽었으며 오히려 그의 군대가 석륵에게 흡수되었다.

결국 낙양은 궁궐, 사당, 관청, 민가 등이 모두 불에 타서 무너진 성벽만 남은 그야말로 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한동안 일부 구역은 요새로 만들어지고, 나머지 지역은 폐허가 된 상태로 지속되다가 나중에 동진의 장군 환온이 북벌을 단행하여 전진군을 격파하고 낙양에 입성하여 평승루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대신들은 남쪽에 이미 정착해서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자는 환온의 제안을 쌩깠다.

결국 지원 부족과 의지박약이었던 조정 때문에 환온은 애써 얻은 낙양을 버리고 철수해야 했다. 이 때 환온은 장안도 노렸지만 보급 부족과 실책으로 장안 부근에서 후퇴해야 했다. 참고로 환온은 이때 위연이 제안한 것으로 유명한 자오곡 계책을 그대로 활용했는데 결국 강주 자사 사마훈과 함께 보급이 끊겨 후퇴해야 했다. 결국 낙양은 버려졌고 나중에 유유의 북벌 때까지 다시는 찾지 못했다. 그런데 어째 이 부분만 유난히 삼국지의 인물들이 많이 언급된다.

5 포로

낙양 함락으로 3만여명이 살해당했고 사마치 등은 유총의 나라 한의 수도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312년 유총은 그를 회계공 의동삼사에 봉했는데 유총은 그를 연회에 초대해서 조용히 말했다. 사실 유총과 사마치는 사마치가 예장왕이던 시절에 서로 만났던 일이 있어 안면이 있어 유총이 물어보자 대답했다.

유총: 공이 옛날 예장왕이던 시절 짐은 왕무자와 함께 공을 방문한 적이 있지 않소? 그 때 왕무자는 짐을 칭찬했고 공은 "당신의 명성을 들어서 알고 있소."라고 했소. 그리고 공은 손수 작곡한 음악을 보여 주었고 왕무자와 짐에게 작사를 부탁했소. 우리는 공을 찬양하는 가사를 썼는데 공을 정말 좋아했소. 그리고 활을 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짐은 열두 번 명중시켰고 왕무자와 공은 아홉 번씩 명중시켰소. 그리고 짐은 자궁(뽕나무 활)과 은연(은 벼루)를 선물로 받았는데 공은 이를 기억하고 있소?

사마치: 신이 어찌 감히 그걸 잊겠습니까? 다만 후회스러운 것은 (龍)을 미처 몰라뵈었다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아부 칭찬을 들은 유총이 이에 감탄하며 말했다.

유총: 공의 집안에서 어쩌다가 일족끼리 서로 살육을 벌이게 되었소? 또 공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오?

이에 사마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사마치: 위대한 한나라는 장차 하늘의 뜻에 감응하여 천명을 받았던 연고로 폐하를 위해 스스로 서로 몰아내고 죽였으니 이는 거의 하늘의 뜻이지 사람이 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또 만약에 신의 집안이 무황제(사마염)의 뜻을 받들어 9족이 단합된 상태로 있었다면 어떻게 폐하께서 황제가 되셨겠습니까?

이에 유총은 깊이 감명받았고 둘은 밤새도록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유총은 아끼던 첩 소유귀인[1]을 사마치의 처로 삼게 했다. 그러나 유총은 점차 승리에 대한 도취감으로 사치를 부리며 부패해졌고 정신도 혼탁해졌고, 결국 사마치의 암운도 여기서 끝이 아니게 된다. 유선(삼국지), 손호보다 비참한 미래가...

6 종말

결국 313년, 광극전에서 황실 새해 맞이 행사를 했는데 유총은 사마치에게 푸른 옷을 입히고 고급 포도주를 관리들에게 접대하도록 했다. 원래 푸른 옷은 평민이나 노비들이 입는 옷이었다. 문제는 사마치가 한 때 황제였으며 무엇보다 유총 스스로가 공이라는 작위를 준 제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접을 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서진의 관리였던 유민과 왕준은 이런 굴욕적인 광경을 보고 감정이 복받쳐올라 크게 울었다.

그런데 이것이 유총의 화를 돋워 유민과 왕준을 포함한 서진 출신의 관리들을 모두 반역 및 서진 장수 유곤에 대한 내통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사형에 처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사마치에게도 옮겨붙어 사마치는 독살당하고 말았다. 그의 뒤는 조카 사마업이 이었다. 안습.

근데 더 안습한 것은 유총이 사마치를 죽이자마자 자기가 스스로 사마치의 부인으로 삼아 줬던 유씨를 다시 데려와서 귀인으로 삼았다. 이건 뭐... 자기 여자를 남의 부인으로 삼아줬다가 그 남편을 죽이고 다시 자기 여자로 삼은 것이다.

그나마 나중에 유총의 아들 유찬을 죽인 근준의 난을 틈타 동진의 원제 사마예가 태상 한윤(韓胤) 등을 보내 사마치와 사마업의 영구를 강남으로 가져와 안장했다.

7 가족 관계

  • 회황후 양씨(양난벽): 양방의 딸로 영가의 난 때 혼란으로 행방불명되었다.
    • 외아들 태자 사마전: 영가의 난 때 피살당했다.
  • 회계공부인 유씨: 유은의 막내 손녀로 원래 유총이 아끼는 귀인이었다. 그러나 항복한 사마치의 부인으로 삼아 줬다가 사마치를 죽인 후에 유총이 회수해서(...) 다시 귀인으로 삼았다.
  1. 작은 귀인 유씨라는 뜻으로 유총이 자매덮밥모녀덮밥을 위해 첩으로 삼은 유은의 두 딸과 그 두 딸들이 낳은 네 명의 딸들 중에 가장 어린 여자다. 결론은 유은의 손녀 중에 가장 어린 여자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