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휼

司馬遹(278~300)

서진 혜제 사마충의 외아들. 자는 희조(熙祖). 사마충의 정실 가남풍의 자식이 아니라 첩이었던 사구의 소생인 서자다.

아버지와 달리 현명하고 똑똑해서 할아버지 사마염의 사랑과 기대를 받았다. 사마충이 황태자에서 밀려나지 않은 원인 중의 하나가 사마염이 보기엔 아들 사마충은 어리석었지만 손자 사마휼이 똑똑해서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태강 10년(289년) 광릉왕(廣陵王)에 책봉되었고 영희 원년(290년) 가을 사마충이 즉위하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사마휼은 태위 왕연[1]의 딸 왕씨(왕혜풍)을 황태자비로 삼고 장씨(장준)을 미인(후궁의 작위)으로 삼았다. 사마휼은 장씨와의 사이에서 영강태자 남양왕 사마반(장남), 민형태손 사마장(차남), 회충태손 사마상(막내) 세 아들을 보았다. 다만 왕씨는 자식을 보지 못했다.

가남풍은 남편이 퇴갤하고 의붓아들인 사마휼이 황제가 되면 자신의 정권 유지에 방해가 될 것을 염려해 온갖 모함과 음모를 꾸몄다. 결국 원강 9년(299년), 가남풍은 사마휼을 불러오게 했는데 막상 만나지 않고 별실에 두게 하고 시비 진무를 시켜 황제의 명령이라면서 술 세 되를 하사하고 마시게 했다. 태자는 사양했으나, 진무가 천자가 하사한 것을 먹지 않는다고 다그치니 억지로 다 마시고 대취했다. 가남풍은 황문시랑 반악을 시켜 글의 초안을 만들게 하고 비녀 승복에게 종이와 붓, 초안을 가지고 사마충이 조서를 내렸다고 하면서 취해 있던 사마휼에게 베껴 쓰게 했다.

그 글의 내용은...

폐하(사마충)께서는 이제 그만 물러나십시오. 만약 스스로 물러나시지 않으면 제가 들어가서 끝내드리겠습니다. 중궁(가남풍)께서도 또한 스스로 물러나셔야 될 겁니다. 중궁께서도 물러나시지 않으면 내 손으로 끝내드리겠습니다. 아울러 제 어머니 사씨와 더불어 기일을 정해놓고 행동을 개시할테니 괜히 미루어서 후환을 초래하지 마십시오. 삼진[2] 아래에서 털을 먹고 피를 마시며 맹세하고 황천이 걱정거리와 해로운 것을 없애버리라고 허락했으니 도문(사마반)을 세워 왕으로 삼고 장씨를 황후로 삼을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소망이 이루어지면 마땅히 천제에게 제사를 지낼 것입니다.[3]

결론은 더 이상 왕관의 무게에 짓눌릴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알아서 다 해 두었으니까요. 순순히 왕관을 넘기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정도의 내용이다. 정확히는 아버지, 양어머니보고 안 물러나면 패륜을 저지를 것이며 친어머니와 함께 손잡고 날을 정해 거사해서 내가 황제가 되겠다는 엄청난 패드립을 적은 것이다.

하지만 사마휼은 이미 술에 떡이 돼서 초안을 보고도 뜻을 모르고 그대로 베껴 썼는데 쓰다가 술 때문에 쓰러져 적지 못한 부분은 그의 필적을 이용해 가남풍이 보충해서 사마충에게 올렸다. 다음 날 사마충은 대신들을 불러 사마휼을 죽이는 것에 대해 의논했는데[4] 대신들 중에서 장화는 신중하게 조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가남풍이 이미 사마휼의 필적을 베껴 적인 10여 장의 반역문을 보여주자 감히 변호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상서 화욱을 시켜 사마휼을 폐위시키고 서인으로 만들었다.

사마휼은 절하고 의복을 고쳐 입은 다음 조잡한 달구지에 탔는데 동무공 사마담이 병장기를 가지고 사마휼, 왕씨, 그의 세 아들을 태워 금용성에 유폐시켰다. 이 때 그의 장인 왕연은 스스로 표문을 올려 딸 왕씨와 사마휼을 이혼시켜 달라고 했다. 표문은 반영되어 왕씨는 사마휼과 이혼했고 유폐에서 풀려나 통곡하면서 본가로 돌아갔다. 그 후 가남풍은 사람을 시켜 사씨와 장씨를 죽여 후환을 없앴다.

조왕 사마륜과 그의 패거리 손수는 가남풍의 조카 가밀[5]에게 사마휼을 죽이고 여러 사람들의 희망을 끊어 버리라고 했다. 참고로 사마륜 이 자는 마치 이 기회를 노렸다는 듯이 가남풍이 결국 사마휼을 죽이자 그걸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가씨를 족멸하고 권력을 잡아 황제가 된 위인이다. 결국 사마륜은 계획대로 황제가 되기 위해서 이런 짓을 한 건데 결국 소원대로 황제가 됐지만 얼마 하지 못하고 다른 왕들의 공격을 받아 자식들과 참혹하게 죽었다.

가남풍은 그의 섹스 파트너였던 태의령 정거에게 독약을 만들게 하고 황문 손려를 시켜 사마휼을 독살하게 했다. 사마휼은 폐태자가 된 후부터 독살될까봐 항상 자기 앞에서 자기가 먹을 음식을 조리하고 데우게 했다. 가남풍이 보낸 손려가 사마휼을 감시하던 저시어사 유진에게 온 뜻을 밝히자 유진은 사마휼을 작은 방으로 옮기고 음식을 끊었는데 그래도 궁인들이 몰래 음식을 보내 주었다. 사마휼은 이 때 화장실에서 일 보고 있었는데(...) 손려는 갑자기 들어가 독약을 먹게 했다. 하지만 사마휼이 먹지 않자 약 찧는 절구로 때려 죽였는데 그 소리가 담장 너머까지 들렸다고 한다. 야 때려 죽이는 소리 좀 안나게 하라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3살. 유사가 서인의 예로 장례 치르기를 청했지만 가남풍은 광릉왕(廣陵王)의 예로 장사지냈다.

그의 죽음은 팔왕의 난의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사마륜이 쿠데타를 일으킨 후 상국(相國)이 되어 대권을 잡자 사마휼을 명예회복하고 민회태자(湣懷太子)로 추증했다. 또 요절한 사마반을 남양왕(南陽王)[6], 민형태손 사마장(湣衡太孫 司馬臧)을 임회왕(臨淮王), 회충태손 사마상(懷沖太孫 司馬尙)은 양양왕(襄陽王)으로 삼았다. 그리고 사마장을 황태손으로 삼고 이혼했다가 돌아온 왕씨를 그의 양어머니로 삼고 사마휼을 현평릉에 다시 안장했다. 하지만 황제가 되고 싶었던 사마륜은 사마장을 죽이고[7] 사마충을 협박하여 잠시 황제가 됐다가 다른 왕들의 공격을 받아 죽는다. 사마륜을 죽이고 제왕 사마경이 사마충을 복위시키자 사마휼의 막내아들이자 유일하게 살아 있던 사마상은 황태손이 됐다. 하지만 겨우 2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사마충과 사마휼의 대는 완전히 끊기게 된다.
  1. 훗날 팔왕의 난을 종결시킨 동해왕 사마월의 뒤를 이어 후계자로 대권을 잡은 위인으로 난을 피해 도망치다가 석륵에게 잡혔다. 석륵은 그의 죄를 논죄했는데 왕연은 살살 아부하다가 빡친 석륵이 밤에 흙담을 넘어뜨려 압사시켜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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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陛下宜自了,不自了,吾當入了之。中宮又宜速自了,不自了,吾當手了之。並與謝妃共要,刻期兩發,勿疑猶豫,以致後患。茹毛飲血於三辰之下,皇天許當掃除患害,立道文為王,蔣氏為內主。願成,當三牲祠北君。 ─ 자치통감
  4. 당연하지만 글을 못알아봤는데다가 바보라서 자기가 하고 있는게 뭔지도 몰랐다.
  5. 원래 이름은 한밀로 가남풍 여동생의 아들인데 가남풍의 아버지 가충이 후계자가 없어서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래서 법적으로는 남동생이었다.
  6. 원래는 영강태자였는데 조왕 사마륜이 집권한 후 그렇게 바꿨다. 정통성을 배제하려는 목적이었던 걸로 보인다.
  7. 사마륜은 사마의의 9남으로 황제 자리와 멀리 있는 사람이다. 사마장은 당시 황제였던 사마충의 둘째 손자였으니 자신의 정통성이 심히 후달릴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