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진의 황족
司馬兆
생몰년도 미상
열 살에 요절했고 사마염이 황제에 오르면서 조서를 통해 그가 죽은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면서 성양의 애왕으로 봉했다.
조서에서는 사마조가 어려서 총명하면서 슬기롭고 몸은 숙성했지만 불행히도 일찍 죽어 선제(사마소)와 선후(왕원희)가 그를 불쌍하게 여겼으며, 선후가 그의 뒤를 이어 세우려 했지만 따르지 못해 매일 그 뜻을 마음에 두어 생각하는 정과 회포를 감상해 사마경을 후사로 삼았다.
그러나 사마조의 후사를 이은 사람들 중에는 세 명이나 요절했으며, 네 번째로 이은 사마하는 요절하지 않았다.
사마소의 자식들 중에서는 사마정국, 사마영조, 사마연조와 함께 일찍 죽은 경우이며, 이른 나이에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서에는 열전이 따로 수록되어 있다. 형인 사마유의 생년으로 볼 때 248년 이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이며, 아버지 사마소보다 먼저 죽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257 ~ 265년 사이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2 삼국시대 위나라와 서진의 인물
司馬肇
생몰년도 미상
아버지 사마지가 병사하자 작위를 계승했고 서진에서는 태시 연간[1]에는 사지절, 낙양령을 지냈고 사마염이 백성들의 혼사를 금지하면서 사자의 수레를 환관을 보내 마부를 통해 주군에서 살펴보아 양가의 규수들을 선발한 후에 무원황후에게 뽑게 했다.
그러나 무원황후가 얼굴이 하얗고 키가 큰 여자만 뽑자 사마염이 분노해서 단아하고 수려한 아가씨는 뽑았는데, 제갈충, 이윤, 호분, 장권, 풍손, 좌사 등을 포함한 세족의 딸을 뽑아서 3부인 9빈의 자리가 채웠다. 273년에 호분의 딸인 호방이 뽑히면서 호방이 통곡했고 사마염의 명에 따라 호방을 귀빈으로 책봉했으며, 제갈완이 궁에 들어오자 사마염의 명에 따라 부인으로 책봉했다.
태강 연간[2]에는 기주자사, 상서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