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티

1 힌두교의 여신

सती

시바의 첫 부인. 자세한 내용은 힌두교 항목 참고.

2 인도 공화국악습

S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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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는 남편이 죽으면 시체를 화장할 때, 아내가 불 속에 뛰어들어 남편의 시체와 함께 불타는 풍습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사티라는 풍습을, 아버지가 남편 시바의 명예를 모독한 것에 대해 분노한 나머지 희생제의 불에 몸을 던져 희생했다는 인도 신화여신 사티의 이야기에서 나오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다.

1829년 동인도 회사의 총독 벤틱 경이 금지시켰으나, 인도의 도시 중 하나인 조드푸르의 메헤랑가르 성 벽면에는 1843년 마하라자 만 싱 왕의 장례식에 그의 15명의 아내들이 사티로 죽기 전 남긴 손바닥 도장 흔적이 남아있을 정도로 사티는 만연했다.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것은 성차별이 심한 인도 여자들에게 큰 재앙이나 다름 없다. 홀로 남은 여자는 친척들이 자신들의 가문에 있는 남자들 중 한 명과 동침할 것을 강요당했다. 왜냐하면 남편이 사망할 경우 그 재산이 전부 아내에게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는 남편을 잡아먹었다면서 낙인이 찍혀 일평생을 집안에서만 살아야 한다. 힌두교 관습에 따라 과부들은 재혼도 못하며, 다른 남성을 유혹해서는 안 된다면서 머리카락을 전부 깎아서 대머리인 채로 있어야 하고 장신구를 걸치는 것과 하얀 옷 외에 다른 색깔의 옷을 입는 것 또한 금지한다.

하지만 차라리 저렇게 감금과 멸시를 당하며 사는 것이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로, 사티는 매우 끔찍한 풍습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불 속으로 뛰어들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반항이 심해서 환각제를 먹인 채 기둥에 묶는다고 할 정도다. 그보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화장이 밀폐된 공간이 아닌 바깥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시신이 불타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과부는 길면 10시간이 넘도록 숨이 끊어질 때까지 불태워지게 된다. 그녀들은 처음에 온몸이 불타는 고통 때문에 비명을 지르지만, 전신이 3도 화상으로 뒤덮이고 신경이 죽어있을 때쯤이면 고통이 느껴지지 않으며, 그렇게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서서히 지켜보다가 생을 마감한다.

친척들이 자신들의 가족인데도 과부가 된 여자에게 사티를 종용하는 이유는, 사티를 행한 여자는 여신으로 승격돼서 사원이 지어지고 친척들에게는 막대한 기부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친정과 시가(媤家) 양쪽에 엄청난 부가 보장되니 그들이 합심해서 집안에 과부가 생기면 곧바로 풍습이라는 명목하에 자신들의 가족을 산 채로 불태우는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또 사티를 주관하는 브라만들도 결탁되어 있었다. 과부에게 더욱 화려하고 비싼 장신구를 착용하고 순사할 것을 권장했는데 사티가 끝난 후 재 속에서 그 장신구를 챙길 수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 부패도 같이 나타났다.

실제로 어느 시골 마을에서는 마을사람들과 친척들이 과부의 재산과 기부금을 노리고 과부에게 불타죽을 것을 종용해서 장작더미에 남편의 시신을 눕히고 과부를 같이 불태운 사례가 있다.

영국BBC 보도에 따르면 이런 일도 있었다. 2006년 8월 22일 인도의 마드야 프라데시주의 툴시푸르 마을에서 열린 프렘 나라얀이라는 남성의 장례식에서 사망자의 아내인 자나크리니라는 40대 여성이 불에 뛰어 들었는데, 사람들은 그 사건을 끔찍하게 여기기는커녕 사티를 신성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죽은 여자가 불에 뛰어든 현장에서 종교의식을 행하고, 그녀가 불에 탄 후 남은 재를 만져보기 위해 몰려들면서 때 아닌 관광특수까지 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데도, 여전히 인도의 시골 같은 곳에서는 과부가 된 여자가 울부짖고 몸부림을 치는데도 친척들이 강제로 끌어내서 살해하는 경우도 많다.

힌두교에서는 사티가 과부들이 자진해서 하는 행위라고 하지만 위와 같이 그렇지 않고 강제적인 경우가 훨씬 많다. 기독교 선교사 윌리엄 캐리라는 사람이 1802년 한 해 동안 조사한 결과 인도의 캘커타 지방 주위 50km 반경 안으로 438명의 과부가 사티 풍습에 의해 희생되었다.[1] 하지만 몇몇 극단적인 지도자들은 "사티가 없어지면 여자들이 남편의 생명을 취하려 할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한다.

그들이 사티 풍습을 없애는 것을 거부하는 이유는, 실상 사티가 완전히 사라질 경우 과부들은 재혼을 할 것이고 다른 계급에 속한 사람과 결합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신분제도가 심한 인도에서는 카스트 제도가 흔들릴 수 있으며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은 기득권을 잃을 수 있다. 정부 또한 인도인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2천년이나 지속되고 있는 사티의 폐지에 뜸들이다가, 선교사들이 굽히지 않고 열성적으로 폐지 운동을 한 끝에 비로소 1829년 법으로 사티를 금지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악질적인 사티 풍습이 폐지된 지 10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몇몇 힌두교 단체에서는 사티 제도의 폐지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시골에서는 사티 풍습으로 죄없는 과부들이 불구덩이 속으로 내던져지고 있다.

화장은 아니지만, 조선 후기에 비슷한 성격의 사례가 있다. 나라에서 여자들의 정절을 강조하기 위해 수절을 잘 하거나 죽은 남편을 따라 자결한 부인들을 기리는 열녀문을 세워주는 등의 사업을 하자, 부인을 희생해서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시가와 친가의 사람들이 부인에게 자살을 강요하거나 직접 살해하고 자살로 위장하는 사례가 발생한 적이 있다.

이 풍습은 참파같은 동남아시아 국가에도 전파된 적이 있다. 이 풍습과 관련된 이야기로 13세기에 베트남에서 공주를 참파왕에게 시집 보냈는데 참파왕이 죽자 공주가 사티를 피해 베트남으로 도망가고 이로 인해 베트남과 참파가 전쟁까지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름대로 유명한 편이다. 참고 1, 참고 2

2.1 관련 항목

  • 순장
  • 힌두교
  • 열녀[2] - 조선 중~말기까지, 양반가에서 남편이 죽을때 남편을 따라 자결하거나 하면 정부에서 열녀문을 지어줌과 동시에 해당 가문은 그에 준하는 이익을 얻었기에, 위의 내용과 유사한 과정이 있었다.
  • 80일간의 세계일주 - 쥘 베른의 소설.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 일행이 인도 여행을 하던 중에 사티로 죽을 뻔한 아우다라는 여자를 구출하는 장면이 있다.
  • 주방에서 타죽은 부인
  • 소신공양

3 작곡가 에릭 사티

Éric Satie, (1866~1926)

프랑스의 작곡가로, 대중에게는 짐노페디로 유명하다. 벡사시옹이라는 골때리는 작곡으로 다시 한 번 유명해졌다.
  1. 윌리엄 캐리는 영국 출신 선교사로, 구두 수선공이었다가 인도에서 대학교수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의 조사 자료는 훗날 사티 제도 폐지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참고로 기독교에서는 근대 선교사역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는 인물. 사람들이 윌리엄 캐리, 조쉬아 마쉬먼, 윌리엄 워드를 일컬어 "세람포르의 삼총사"라 부를 정도로 유명했다 한다.
  2. 심지어 왕녀 중에도 열녀가 나왔다. 영조의 딸 화순옹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