벡사시옹

1 개요

에릭 사티피아노 독주곡이며 프랑스어로 '짜증' 이나 '고통'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곡으로 들어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사티는 생전에 굉장한 괴짜 음악인으로 유명했지만, 정작 그가 남긴 작품들은 약간 제목이 괴랄한거 빼면[1] 오히려 선법을 비롯한 옛스러운 음악 어법과 특유의 단순성으로 듣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지만...이 곡은 절대 아니다. 무슨 이유인지 사티는 이 곡을 생전에 공개하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발견하고 공표한 이는 사티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연구와 자료 수집에 몰두하고 있던 자이자, 그 전설의 마곡 4분 33초로 악명 높은 존 케이지였다.이 사람이 관여했다는 시점에서 우리는 얼마나 끔찍한 물건이었을지 짐작해야 했다

케이지가 발견한 자필보는 1949년에 복사판으로 처음 간행되었고, 이후 여러 음악출판사나 음악잡지 등에서 정서한 공식 출판본이 나왔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그저 그런 유작 피아노곡이겠구나 싶겠지만...

곡은 무척 단순하다. 18개의 음들로 이루어진 단선율의 주제와, 그 주제로 만든 두 개의 변주가 전부다. 게다가 빠르기나 박자표 같은 것도 전혀 없다. 변주도 잘 보면 장단이나 선율에 변화를 준 것이 아니라, 오른손 성부의 음높이를 자리바꿈한 것일 뿐이다.

현대적으로 정서된 벡사시옹 악보. 정말 허전하지만, 진짜 저게 다다.

하지만 사티는 저 스케치 정도밖에 되지 않아 보이는 악보 위에 다음과 같은 지시어를 써놓았다;

"이 곡을 연속해서 840번 반복해 연주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고요함 속에서 진지한 부동성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악보에 아무런 빠르기 지시가 없기 때문에 연주에 걸리는 시간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략 18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2] 이 때문에 이 곡은 단일 피아노 작품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곡으로 기네스북에까지 올라가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 때문에 사티 피아노곡을 거의 다 녹음한 피아니스트들은 많지만, 엄밀히 따지면 전곡을 녹음한 피아니스트는 한 사람도 없다. 만약 이 곡이 음반에 포함된다 하더라도, 첫 루프 혹은 두세 루프 정도만 녹음되어 있어서 나머지는 청취자가 알아서 840번 반복시켜 들어야 할 뿐이다. 아니 그 전에 이럴 시간이나 있을지...만국의 잉여들이여, 도전하지 않겠는가?

비록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기서 나가겠어 정도의 정줄놓 작품으로 여겨졌지만, 이 곡이 가져다준 충격과 여파는 꽤 대단했다. 케이지를 비롯해 미니멀리즘을 음악에 도입하려고 한 이들은 이 곡이 그 아이디어를 미리 선취한 곡이라고 높이 평가했고, 호사가들은 이 곡에서 사티가 자신의 개인적인 주관이나 일화를 암호화시켜 기록했다는 음모론까지 제기할 정도였다.

실제로 이 곡이 사티와 관계가 깊었던 종교 단체인 '장미십자단' 의 은유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인도 철학만트라 개념을 도입했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고, 여성 화가 쉬잔 발라동 사이의 연애 관계가 파토난 것에 대한 절망과 분노를 투영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확실한 팩트는 없고, 사티가 재림해서 이 곡을 왜 썼다고 말하지 않는 이상 진실은 저 너머에.그냥 선율 아이디어 하나 생각난 거 써논 뒤에 잊어버리고 처박아뒀다가 우연히 다시 생각났는데 작곡하기 귀찮아서 대충 저딴 식으로 매꿨다는게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현대 미술도 그렇고 역시 현대주의 작품들은 꿈보다 해몽

2 초연

첫 공연은 1963년 9월 9일에 미국 뉴욕의 포켓 시어터라는 극장에서 행해졌는데, 곡을 처음 발견한 존 케이지를 비롯해 그의 동료 11명이 돌아가며 연주했다. 연주자들 중에는 피아니스트가 아니거나, 아예 음악인이 아닌 이들까지 있었다.[3]

공연은 그날 밤 6시에 시작했는데, 주최자인 케이지는 이 곡의 연주가 얼마나 걸리는지 전혀 공지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사티의 유작이라고 해서 수많은 청중들과 피아니스트, 기타 음악 전문가들이 객석을 메웠지만, 똑같은 부분이 하염없이 반복되는 것에 질려 하나 둘 공연장을 뜨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인내심을 발휘해 객석에 남아 있던 청중들도 이내 음악을 BGM 삼아 서로 잡담을 나누기도 하고, 심지어 음료를 마시거나 과자를 먹는 이들도 있었다.

어찌됐든 공연은 그와 상관없이 계속 진행되었고 청중들의 고충에 못지않게 연주자들의 고충도 대단했는데, 아무리 피아노 연주에 통달한 이라도 삼전음(tritone)과 감화음(diminished chord)으로 가득한 괴이한 곡을 계속 반복한다는 것은 고문에 가까웠다. 그나마 악보에는 콩나물 대가리 빼면 아무 연주 상의 지시도 없는 탓에, 연주자들은 자기 순서가 될 때마다 곡을 빠르게 치기도 하고, 반대로 느리게 치기도 하고, 약하게 혹은 세게 치기도 하고, 모든 음을 똑똑 끊어 스타카토로 치기도 하고, 반대로 페달을 왕창 밟아 울림을 마구 섞기도 하는 등 저마다 자신의 해석(?)을 이입시켰다.

사티가 써놓은 대로 정확히 840번째 반복이 끝난 것은 다음날 오후 12시 40분 무렵으로 밤새워 진행된 이 공연에서 살아남은(?????) 청중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모두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던가 해탈 혹은 멘붕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3 재연 사례들

  • 이 작품은 (물론 그렇게 자주 행해진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 후로도 몇몇 용자들이 진행한 음악회 등의 행사에서 연주되고 있다. 피터 에반스라는 피아니스트는 자기 혼자서 곡을 완주하려고 시도했지만, 595회 째 반복하던 도중 환각 상태에 빠져(...) 연주를 중단하고 말았다.
  • 1967년 12월 31일에는 일본에서도 도쿄의 미국 문화 센터에서 이시이 마키, 유아사 조지, 타카하시 유지 등 현대 작곡가들과 피아니스트 열여섯 명이서 그날 낮부터 이듬해 1월 1일 아침까지 완주해냈다.
  • 한국에서는 1995년 3월에 서울대학교의 학생 라운지에서 초연됐을 때 음대 피아노 전공생부터 취미로 피아노 치는 일반 학생까지 모두 40여 명이 연주자로 동원되었는데, 물론 이 두 공연에서도 끝까지 듣는 근성을 발휘한 이들은 극소수였다.
  • 1999년 2월 1일에는 서울 부암아트홀에서 열린 '쉽게 듣는 현대음악'이라는 기획 연주회에서 당시 서울대 음대 작곡과에 재학중이던 학생들과 졸업한 선배들이 두 번째로 재연한 바 있다.뭐? 쉽게 들어?
  • 워낙 악명높은 곡이다 보니 가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이 곡이 다루어지기도 하며 일본에서는 후지 테레비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 트리비아의 샘 2004년 5월 5일 방영분에서는 세 명의 피아니스트가 번갈아가며 연주를 시도하고 완주해내는 장면을 편집해 방영했다.
  • 한국에서는 스펀지 2006년 8월 19일 방영분에서 이 곡의 연주를 방송 8일 전 밤 9시부터 10명이 30번 연주를 4시간 넘게 시도했는데, 애석하게도(?) 이 곡의 4분의 1부분에서 중단하고 말았다. 반복 횟수를 헤아리던 제작진들과 저명한 음악평론가들의 어이를 상실한 모습이 포인트.
  • 2011년 6월엔 어느 용자가 혼자 이 곡을 완주한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왔는데, 동영상 길이가 무려 9시간 40분 가량이다... 영상의 질이 매우 안 좋은데 만약 HD화질로 올렸더라면 업로드에만 2주가 걸렸을 것이라고 한다. 장잉력 돋네

4 이 곡보다 더 긴 곡들

이 곡의 아성에 도전한 후배 작곡가들이 등장하면서, 가장 긴 음악 작품이라는 기록도 갈아치워졌다. 고만해 미친놈들아 사티 마저 ㅎㄷㄷ할 정도의 경쟁작들을 몇 곡 소개하자면;

항목 참조. 작곡자가 잡은 연주 시간이 28시간.

  • 라 몽트 영: 전자음악 '12일 동안의 블루스'

제목 그대로 12일 걸린다.

  • 톰 요크: 'Subterranea'

역사 상 가장 긴 녹음된 곡으로 432시간이 걸린다. 라디오헤드 앨범 커버 디자이너인 스탠리 돈우드의 전시회를 위한 음악이며 딱 전시회 기간 동안 재생된다.다 들으려면 18일동안 죽치고 있어야 한다ㄷㄷ

  • 코스기 타케히사: 혁명을 위한 음악

작곡자가 잡은 연주시간이 5년. 게다가 연주 중 연주자가 자신의 눈알을 뽑아내라는 지시가 있기 때문에, 이 곡을 연주하겠다고 나서는 이는 아직 없다(...). 의안 낀 연주자라면 한 번쯤은 도전해 볼 수 있을지도 일종의 위험 음악[4].

  • 아르네 노르헤임: 전자음악 'Poly-Poly'

1970년 개최된 오사카 엑스포의 스칸디나비아관 테마 음악. 여섯 개의 오픈릴 테이프에 담긴 음악을 반복 재생하도록 작곡되었는데, 작곡자 지시에 따르면 연주시간은 102년.

  • 존 케이지: 오르간2 / ASLSP

원곡은 1985년에 작곡된 피아노 독주곡 'I' 였는데, 2년 뒤에 파이프오르간 독주용으로 편곡한 것이 이 곡이다. 연주에 따라 1분 미만에서 80분까지 다양한 소요 시간을 보이고 있지만, 곡에는 아무런 빠르기 지시 없이 그저 '가능한한 매우 느리게'[5] 라고만 되어 있어서 절대적 기준은 없다. 2001년 9월 5일에 독일 할버슈타트의 부르하르트 교회 부속 수도원에 있는 오르간으로 시작한 연주가 2010년 현재 이 곡을 가장 느리게 연주하고 있는 사례로, 총 639년이 소요될 예정이다. 연주라고는 해도 몇 년에 한 번씩 음표 하나 바뀌는 정도고, 이 찰나를 보려고 청중들이 몰려들고 있다. 연주가 끝나는 해는 2639년으로 예정되어 있다. 할버슈타트의 존 케이지 오르간 프로젝트 홈페이지 (독어)

  • 젬 파이너: 롱플레이어

2010년 현재 세계에서 가장 긴 음악. 젬 파이너는 영국 밴드 '더 포그스(The Pogues)' 의 밴조 주자 겸 작곡가다. 2000년 1월 1일에 런던의 클럽 'O2' 에서 이 작품의 연주가 시작되었고, 끝나려면 2999년 12월 31일이 돼야 한다. 즉 전체 연주 시간 1000년. 롱플레이어 프로젝트 홈페이지

  1. '개를 위한 정말로 엉성한 전주곡' 이라든가 '관료적인 소나티네', 심지어는 '바싹 마른 태아' 같은 곡들.
  2. 참고로 840번 연주하라는 의미는 그의 종교에서 따왔다는 추측도 있지만, 정확한 근거는 없다.
  3. 뉴욕 타임스의 평론가인 하워드 클라인도 연주자로 참가했다.
  4.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도 '딕 히긴스를 위한 위험 음악' 이라는 작품에서 연주자에게 "살아있는 고래의 질 속에 들어가시오." 라고 지시하고 있다. 당연히 이 곡도 아직껏 연주되지 못하고 있다...
  5. ASLSP=As SLow aS Possi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