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울림

1 소개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 San Woollim - Laying silks and satins on my Heart, 산울림
-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Saturday Night Music Show(토토즐), 509회, EP509, 1996년/12/14, MBC TV


왼쪽부터 김창완, 김창훈, 김창익

밴드 초창기 시절.

대한민국 대중 음악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전설적인 락밴드.

아, 한 마디 말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되고.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댈 위해 노래부르리.

김창완(보컬, 기타), 김창훈(보컬,베이스), 김창익(드럼) 형제로 구성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그룹. 1977년 <아니 벌써>로 데뷔했다. 서울대학교 2명(김창완, 김창훈)[1]고려대학교 1명(김창익)[2]의 가족밴드. 이건 뭐 후덜덜엄친아 밴드

산울림 삼형제는 어릴 적에 주말마다 방에 계란판을 붙여서 방음실로 만들고 싸구려 기타로 자기들이 만든 곡을 연주했다고 한다.[3] 이후 1977년에 MBC 대학가요제가 처음으로 개최된다고 하여 삼형제가 무이(無異, 평소와 다름없음)[4]라는 밴드로 대학가요제에 참가한다. 당시 김창훈은 샌드페블즈 5기 멤버로 있었는데 샌드페블즈를 탈퇴하고 무이로 들어오면서 자작곡 "나 어떡해(이 곡은 산울림 2집에 리메이크되어 다시 실린다)" 를 샌드페블즈에게 주고 나온다. 대학가요제 예선에서 무이는 "문 좀 열어줘(산울림 1집 수록곡)" 로 1위, 샌드페블즈는 "나 어떡해" 로 2위를 기록했는데 김창완이 1975년 졸업생이라 재학생만 참가할 수 있는 규정에 걸려서 무이는 결국 탈락하고 제 1회 MBC 대학가요제의 대상은 샌드페블즈가 타게 된다. 이후에 "나 어떡해" 가 김창훈이 쓴 곡임을 알고 음반을 만들자는 제의가 들어왔는데 삼형제는 프로페셔널한 음악을 할 생각이 없었음에도 이제 사회 생활을 할 나이가 되었기에 지금까지 해왔던 음악을 마지막으로 기념하는 의미에서 음반 제안에 응했고 이렇게 해서 산울림 1집이 나오게 된다. 이때 레코드 판이 40만 장 팔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기준에서는 상당한 대박이었다고 한다. 이후 2007년에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5위에 뽑혔다. 참고로 6위가 산울림 2집이다.[5]

초기(1~3집)에는 펑크 록 느낌의 디스토션이 강한 공격적인 사운드를 많이 보여줬는데 이 스타일은 영미 록의 프로그레시브나 사이키델릭 성향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어떠한 선대 록 음악의 성향도 받아들이지 않은 산울림만의 독창적인 작법이었다. 실제로 삼형제는 데뷔 전 대학 그룹 사운드가 흔히 하던 카피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에 처음 밴드를 시작할 때부터 작곡에 몰두 데뷔 시점에 이미 상당한 분량의 창작곡이 있었다.[6] 산울림의 초반이 그야말로 전설로 남게 된 것은 미숙한 실력과 부족한 장비를 가지고도 도달하였던 파격에 가까운 독창성 때문인 것이다.[7] 오로지 외국 음악 카피만 하면서 자체 창작은 도외시하고 연주력에만 목 매달던 일부 음악인들에게 산울림의 등장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직접적으로는 3집까지는 한국식 개러지 록의 탄생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이들의 초기작은 "대한민국 헤비메탈의 시작" 이라고도 평가된다.[8] 어떤 음악에도 영향받지 않았으나 한국 거의 모든 록커들에게 영향을 준 것이다. 지저분한 퍼즈톤 위에 깔리는 김창완의 나레이션에 가까운 나지막한 노래와 관조적인 가사는 그 당시의 대중들에게 상당히 충격이었다고. 실험적임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뛰어넘어서 사랑받는 강한 음악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중기와 후기를 거쳐가면서 산울림은 포크락과 디스코 등 딱 하나로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하였고 계속적으로 많은 한국 록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때의 발라드 노래들은 초기의 록적인 감성을 후퇴했지만 대중들의 많은 인기를 끌었다. 아이유가 훗날 리메이크했던 <너의 의미>가 바로 이 시기의 곡.

그러면서도 정규 앨범 사이사이에 <개구쟁이>나 <산할아버지>와 같은 동요 앨범을 내기도 한다. 산울림의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로 비관적이고 시니컬한 노래와 어린이를 위한 동요를 동시에 작곡할 수 있는 다양한 감성을 소화할 수 있는 밴드라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1월 29일 드럼을 담당하고 있는 막내 김창익캐나다 직장에서 눈길에 지게차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지게차에 깔려 사망하는 불의의 사고가 있었다.[9] 이로 인해 김창완은 "산울림은 가족 밴드다. 막내가 이렇게 떠나 버린 이상 예정되어 있던 것 이상의 산울림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건 없을 것이다" 라고 언급했다. 이로써 산울림은 해체하고 긴 전설의 막을 내린다.

여담이지만 활동 당시 유난히 심의 태클을 많이 받은 밴드 중에 하나다. 당시는 악보 검열, 가사 검열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산울림 음악을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아니 이게 왜 심의야" 하고 놀라겠지만 이게 다 그 심의 필터에 걸러져서 나온 물건이라고... 참고로 심의 사유는 퇴폐 내지는 가사가 너무 슬프다 등등(...) 대표적으로 1집은 모든 곡이 싸그리 심의에 걸렸고 "아니 벌써" 의 경우 가사를 전체적으로 갈아 엎었다고 한다.[10] 김창완 본인의 말로는 개작 전 가사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굉장히 비관적이고 우울한 가사였다고. 이외에 3집의 "내 마음" 도 원래 "황무지" 라는 제목이었다가 바뀌었다. 이후에 김창완이 그 울분(?)을 뒤에 풀어낸 노래를 김창완밴드의 산울림 리마인드 앨범에 묶어 발매했는데, 제목도 '금지곡'이고 노래 내용도 '인생 그거 쉬운거에요, 동물 학대하지 말고 자연을 지켜요' 이런 내용이다.(...)

1.1 평가

신중현과 함께 대한민국 락음악의 기반을 닦은 아티스트.

산울림은 1975년 '대마초 파동' 이후의 한국 락음악을 대표하는 밴드다.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9호에 의한 '대마초 파동'으로 인해 한국 락음악은 거의 뿌리가 뽑혀나갈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는데, 1980년대 중반 블루스, 하드락, 메탈 등이 언더그라운드에서 인기를 얻고 오버그라운드까지 올라와 재기하기까지 약 10년 간의 한국 락음악의 암흑기를 대표하는 밴드로 꼽힌다. 보통 음악이라면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주기 마련인데, 산울림은 활동 당시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았으며, 누구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은' 밴드로 평가된다. 오히려 전성기에서 한참 지나 90년대 후반의 홍대 인디밴드들을 산울림의 후계자로 평가할 정도.

다만 락음악의 암흑기에 활동했었으니만큼 다른 국내외 락밴드와는 달리 정부에 대놓고 개기지 못했다는 한계점이 있는데, 이로 인해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1980년대에는 삼형제가 대학 축제에서 공연을 하다가 운동권 학생들에게 마이크를 뺏기고 폭행을 당하기도 했을 정도로[11] 험한 꼴을 많이 당했다. 이로 인해 특히 수난을 많이 당했던 보컬인 김창완이 정치적 스탠스를 중도로 바꾸었을 정도. 과거 김창완이 유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발언했던 잡지가 공개되어 인터넷상에서 작은 파문이 일어난 적이 있는데, 그 배경에는 음악과 정치를 기본적으로 분리해서 생각하는 산울림의 마인드와, 운동권의 표적이 되어 그들에게 수난을 당한 산울림의 개인적 고충이 함께 있었음을 알아두어야 한다. 특히 김창완이 선거 유세를 위해 당시 열린우리당[12]은 물론 한나라당[13]의 선거유세장에 모두 참여했던 경력이 있는지라, 그(와 산울림)를 우파로 매도하여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아니, 애초에 뮤지션의 정치적 성향을 이유로 사람 본인, 나아가 음악까지 매도하면 안되는 것이 정상이다.

한국 락음악의 암흑기에 찬란하게 빛났던 밴드이니만큼 산울림으로부터 음악적 영향을 받은 후배들이 훗날 헌정 앨범을 내기도 했다. 참고로 신중현이 대한민국 최초 첫번째 헌정 앨범이고 그 두번째가 산울림이다. 여담으로 산울림의 영향력은 한국을 넘어 일본으로도 전해졌는데 산울림과 신중현과 엽전들의 일본인 카피밴드 '곱창전골' 이 있었을 정도.[14]

산울림의 경우 기본적으로 당시 서구에 생겨났던 프로토펑크에 60년대 사이키델릭을 얹은 사운드의 독창성, 그럼에도 여러 가지 장르 및 기법을 섭렵하고 시도했던 실험성 등이 높이 평가받는다. 물론 그들이 프로토펑크를 지향했던 것은 아니고,[15] 서구의 6070 시대 록의 화려함과 강렬함을 한국의 열악한 환경 및 설비 속에서 재현해내려는 각고의 노력 끝에 이러한 독특한 결과물이 탄생한 것이다. 또한 앞에서 언급했듯이 80년대부터는 팝, 포크 지향적이고 한국적인 음악을 주로 구사하기도 했지만, 이 때는 오히려 록 밴드로서의 의미는 살짝 퇴색했다. 물론 후기가 꼭 팝적인 것은 아니고 오히려 프로그레시브적인 측면이 강해진 부분도 있지만, 삼형제가 나이가 듦에따라 훨씬 음악이 부드러워졌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 결과 '한국적인 면'보다는 '록 밴드로서의 시대적, 음악적 가치', 즉 음악 개척자적인 면에 더욱 무게를 두는 외국 청자들은 주로 산울림의 초기 음악을 상당히 좋아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시대에 저항하는 이미지가 더욱 확고하면서도 완성된 형태의 음악[16]을 구사하며 동시에 한국적인 감성을 지향했던, 1980년대 사운드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들국화를 조금 높이 둔다. 초기 산울림의 음악은 가사가 한국어임을 제외하면 사실상 무국적과도 같은 독창적인 음악이었던 반면, 들국화의 음악은 1980년대 중반 한국 대중음악의 요약판과도 같으니...

요약하면 평론적으로 산울림은 '록 밴드'로서의 기능적 측면에 초점이, 들국화는 '한국 음악'으로의 감성적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둘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라는 것은 확실하다.

2 디스코그라피

2.1 1기 : 독보적인 창작

산울림의 본격적인 시작이자 전설의 시작

그야말로 파격을 통해 전설의 반열에 오른 산울림의 초기 앨범들. 시대를 감안하여 듣는다고 해도 '구린' 프로듀싱 상태이며, 필을 살리기는 커녕 기본적인 박자도 맞추지 못하고 삑사리를 낼 정도로 처참한 연주력을 보여주지만[17], 오직 충격적인 독창성 하나로 전설이 된 작품. 현재도 1~3집 앨범은 외국 록 음반 수집가[18] 들에게까지 수집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담이지만 영문 위키피디아에 산울림을 치면 영어로 쓰인 Sanurlim 항목으로 리다이렉트될 정도다.# 대표곡은 "아니 벌써",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대는 이미 나"[19], 나 어떡해"[20], "문 좀 열어줘" 등. 이 시기 산울림 음악을 특징짓는 요소는 김창완의 퍼즈기타와 오르간(신디사이저라기보다는 풍금이라고 부르는 편이 맞을 듯)의 전면적인 사용을 통한 사이키델릭의 탐구였다. 3집의 타이틀곡 내 마음은 김창훈이 자다가 일어나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정작 자신은 자기가 어떻게 그 곡을 만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라디오에서 밝힌 적 있다.

1977년 1집 <아니 벌써>
1978년 2집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1978년 3집 <내 마음>

2.2 2기 : 김창완의 솔로 체제

두 아우의 군 입대[21]로 어쩔 수 없이 김창완 혼자 활동한 시기로 1기와 3기의 과도기적 성향을 보인다. 대표곡은 "빨간 풍선", "오솔길",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찻잔". 동요 1집의 "개구쟁이" 도 유명하다. 기존의 로킹한 밴드 사운드와 어쿠스틱 기타를 활용한 포크가 혼재되는 경향을 보인다.

1979년 동요 1집 <개구쟁이>
1979년 4집 <특급열차>
1979년 5집 <한낮의 모래시계>
1980년 6집 <조금만 기다려요>

2.3 3기 : 김창훈과 김창익의 복귀, 인기 절정

1기의 퍼즈톤은 완전히 사라지고 사운드가 세련되어졌으나 그만큼 원초적이고 거친 에너지도 감소되었다. 10집을 끝으로 사실상 산울림의 공식적인 활동이 중단되었다. 대표곡은 "가지 마오", "독백", "청춘[22]", "먼 나라 이야기", "회상", "너의 의미"[23], "산 할아버지" 등으로 오늘날까지 불리는 아름다운 발라드 노래들이 이 시기에 많이 작곡되었다. 사운드는 보다 포크나 포크록에 가까워진 것으로 평가된다.

1981년 7집 <가지마오>
1981년 동요 2집 <산할아버지>
1982년 8집 <새야 날아>
1982년 동요 3집 <운동회>
1983년 9집 <웃는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어>
1984년 10집 <너의 의미>
1984년 동요 4집 <동심의 노래>

2.4 4기 : 산울림의 종언

아우들이 각자 사업 등을 이유로 빠지고[24] 김창완 혼자 활동한 시기다. 실질적으로 김창완의 솔로 앨범과 맥락을 같이하지만, 김창완의 솔로 앨범이 포크를 주로 한 따뜻한 음악을 수록했다면 산울림의 후기작은 극단적으로 어둡고 고독한, 쓸쓸한 정서에 한계까지 닿아 있다. 특히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 앨범은 앨범 전체가 '비'라는 테마를 두고 만들어지기도 했다. 대표곡은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 "더. 더. 더."

1986년 11집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
1991년 12집 <꿈꾸는 공원>

2.5 재결성과 김창익의 죽음

신해철 등의 후배 뮤지션들에 의해 산울림의 재조명이 시작되고 트리뷰트 앨범이 제작되었고 다시 결성된 산울림의 13집은 초기 감성으로 회귀하여 많은 인기를 끌었다. 마침 국내 인디씬이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면서 아마추어적인 음악과 차가운 관조, 어린아이와도 같은 낙관의 정서가 떠오르던 시기기도 한데, 말할 필요도 없이 70년대에 산울림이 가지고 있던 바로 그 모습이다. 대표곡은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 "무지개". 그러나 2006년 산울림 전국투어 콘서트 이후 14집을 준비하던 2008년 1월, 막내이자 드러머였던 김창익이 이민간 캐나다에서 불의의 사고[25]로 세상을 떠나며 산울림의 활동은 마침내 긴 종지부를 찍었다. 김창훈은 자신의 세 번째 솔로 앨범을 발표했으며 김창완은 김창완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다.

1997년 13집 <무지개>

2.6 정규 앨범이 아닌 편집 앨범과 기타 앨범들

1978년 <산울림 제 2집>(맥시싱글)
1978년 <산울림 빨간 풍선>(옴니버스)
1978년 <X-mas carol>
1979년 <산울림 영화음악집: 내일 또 내일>
1982년 <애니메이션 슈퍼삼총사 OST>
1983년 <이티 이야기>
1983년 <사랑의 발라드>
1983년 <산울림 BEST - 산울림 ROCK WORLD>
1983년 <산울림 러브 사운드(경음악)>
1983년 <산울림 록 사운드(경음악)>
1984년 <산울림 동요 BEST - 산울림 동요왕국>
1986년 <산울림 스페이스 사운드 디스코>
1986년 <산울림 귀여운 소녀의 디스코>
1986년 <산울림, 김범룡 Disco Mix>
1987년 <산울림 BEST - 산울림 Greatest Hits>
1989년 <산울림 BEST - Best of Sanullim>
1996년 <산울림 동요 BEST - 하늘색 꽃병>
1997년 <The Complete Regular Recordings>
1998년 <하늘색 꽃병>
1998년 <초록색 대문>
2005년 <산울림 다시 듣기 : 청춘, 위로, 추억>
2008년 <The Story of Sanullim: Complete Studio Recordings>

3 팬클럽

없을 줄 알았지?
아직까지도 공식 팬클럽이 건재하게 살아 있다. 이름은 산울림매니아, 약칭 산즐이고, 링크는 여기. 2000년부터 라이브카페 등을 대절해서 산울림매니아 XX번째 이야기, 즉 정모를 여는데, 다른 팬카페 모임과는 다르게 김창완김창훈이 실제로 얼굴을 비추고, 그리고 생전에는 김창익이 실제로 얼굴을 비추기도 했고 술도 같이 마시기도 했다! 팬과의 소통이 굉장히 잘 이루어지는 그룹 중 하나. 김창완은 창완아저씨, 창완님 등의 호칭으로 불리고[26] 있고, 김창훈은 창훈님, 고 김창익은 창익님으로 부른다. 당연하겠지만, 운영진 뿐만 아니라 회원도 산울림 멤버와 좋은 인연을 잇는 경우가 많다. 다들 좋은 마음으로 팬카페에서 활동하기 때문.

특히 김창훈과 김창익이 미주지역에 거주했을 때는 주변에 사는 산즐 회원들과 함께 자주 식사를 하기도 했다고 하니, 다른 팬카페보다 훨씬 가수 본인의 참여율이 높다. 다만 김창익은 생전에 카페에 글을 쓴 적이 없었고, 김창완 역시 카페에 글을 쓴 적 없이 운영진과의 연락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편...인데 딱 하나 썼다. 가입인사글.(...) 유일하게 김창훈만이 카페에 3~4개월에 한 번씩 글을 남긴다.

2008년에 김창완씨가 먼저 산울림의 해체선언을 해서 카페 분위기가 잠시 미묘해진 적도 있지만, 지금은 김창완밴드+김창훈+산울림 등등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팬카페가 되었다. 매년 2월에 홍대 일대에서 정기 모임을 하니까, 참고 바람. 카페 운영진도 운영진을 가끔 선발도 하고, 못하는 사람들은 알아서 내려오기도 하는 등 큰 욕심 없이 운영을 하고 있다. 특히 매니저는 2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교체되고 있기도 하는데, 자주 번개를 열고 하는 등으로 운영진끼리 서로 연락처를 다 알고 있기 때문인 듯. 아,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아저씨와 아줌마들이 회원 대다수다.(...) 역사가 오래되고, 탈덕이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카페 개설때부터 지금까지 활동하는 분들이 꽤 많다.

4 산울림 박스셋 사태

산울림 박스셋은 1997년에 나온 <The Complete Regular Recordings>, 일명 "지구레코드" 판본이 있었다. 그런데 이 박스셋은 발매 이후에 나온 13집이 없고 무엇보다도 앨범 세 개 분량을 CD 두 개로 쪼개서 나눠놓는 만행을 저질렸다. 그래서 2008년 산울림의 새로운 박스셋이 나온다는 소식에 많은 팬들이 기대하고 있었다. 특히 오리지널 마스터 테입을 발굴하고 리마스터링을 거쳐서 제대로 된 LP 미니어쳐 형태로 나온다는 소식으로 "뭔가 제대로 하고 있구나" 라는 기대를 가지게 했다.

하지만 이것이 지구레코드 판본은 비할 바 못되는 최악의 사태로 치달을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우선 박스 문제. 인터넷을 통해 우선 박스셋을 받아본 사람 중에 바깥 박스와 안 박스가 너무 꽉 끼어서 빠지지 않는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엔 17만 8천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산 그것을 로 째고 손으로 뜯은 처참한 몰골이 올라왔다.

시작부터 삐걱거린 박스셋 문제는 레코딩의 실수 발견으로 최악의 국면을 맞았다. 최첨단 기술력을 동원하여 완성했다던 CD 레코딩의 마지막 순간에 곡의 볼륨을 서로 맞추지 않아 볼륨이 들쑥날쑥한 것이 발견된 것이다. 그것도 17장 CD 중 15장이 그랬고 로엔엔터테인먼트 측에서는 결국 전 CD의 리콜을 단행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리콜된 씨디 중 1집과 10집에서 노이즈 문제와 트랙 문제가 발견되었고 로엔측은 절절한 사과문과 함께 1집과 10집을 재리콜하였다.

사태는 계속되었다. 7집에서 노이즈가 섞인 트랙이 또 다시 발견되었고 구매자들이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더 이상의 리콜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사태는 한국의 음반 시장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취지는 매우 좋았으나 전설의 록밴드의 역사를 관통하는 CD 17장 분량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마감에 쫓겨 제대로 확인되지도 않은 상품을 출시하여 결국 두 번의 대규모 삽질로 끝내고 말았다는 사실은 한국 음반 업계의 최악의 흑역사로 남을 수밖에 없다.

5 2014 트릴로지 박스세트 사태

그리고 2014년 2월에 첫 3장만을 엮은 '산울림 트릴로지'라는 새 박스세트가 나왔다. 이번에는 전 박스셋의 흑역사를 넘어 제대로된 재발매반이 나올것이라 기대되었지만, 발매 첫날부터 불만이 나오고 있다. 500장 한정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500보다 큰 숫자가 새겨진 세트가 발견되었다. (댓글 참고) [27] 또, 전곡 오리지날 마스터 테입 사용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로엔 박스세트의 음원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주장이 나왔다.[28]
  1. 둘은 서울 중앙고, 용산고를 각각 졸업했다.
  2. 성남고 졸업
  3. 이때 만든 곡이 1~3집에 있는 곡들로 그 덕에 1집이 나온 후 1년만에 2, 3집이 연달아서 나올 수 있었다. 또 이 때 카피하지 않고 자신들의 음악을 했기에 더 독특한 음악이 나올 수 있었기도 하다.
  4. 어릴 적의 김창완은 매우 염세적인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밴드명에서도 그 느낌이 뿜어져 나온다.
  5. 저 리스트 만으로도 산울림의 위치를 알만한데, 10위권에 2개의 앨범을 집어넣은 것은 산울림 뿐이다. 한 밴드의 이름으로 100위권에 3개의 앨범을 집어넣은 것은 딱 2 뿐(개인을 포함하면 김광석정태춘이 포함된다.)인데 하나는 서태지와 아이들이고, 다른 하나가 산울림이다(3집 73위)
  6. 이때문에 데뷔 직후 1, 2, 3집을 거의 연달아 발표할 수 있었다.
  7. 들국화의 드러머였던 '주찬권' 은 인터뷰에서 산울림에 대해 "창작력은 와방(최고)인데 연주가... 좀..." 이라는 발언을 했다. 이런 산울림에 자극받아서 창작과 연주과 완벽히 조화된 들국화가 등장한 것인지도...
  8. 3집의 '내 마음' 이라는 곡이 이런 인식에 영향을 크게 미친 것 같다.
  9. 김창완 밴드의 EP 앨범 <The Happiest>에 수록된 'forklift' 가 이에 대한 노래다.
  10. 고친 가사도 '자살을 하려고 했는데 벌써 날이 밝았네'라는 뉘앙스라고 한다.
  11. 한 군데에서 일어난 해프닝이 아니다! 당시에는 무사히 공연이 끝나면 다행이었을 정도였다는 이들의 증언이 있다.
  12. 2006년 지방선거.
  13. 18대 총선.
  14. 밴드 곱창전골의 기타리스트 양평이횽 하세가와 요헤이는 곱창전골 이후 이후 밴드 뜨거운 감자에서 활동한다. 그리고 이후 김창완 밴드에서 김창완과 함께 음악을 하게 된다! 팬질의 끝
  15. 애초에 이 장르를 몰랐을 것이다. 프로토 펑크는 현지인 미국에서조차 인지도가 처참했고, 설사 한국으로 그러한 성향의 음반이 들어온다고 해봐야 검열되었을 게 뻔하다.
  16. 뛰어난 연주력 등 - 산울림의 연주는 사실 들국화에 비해서는 아마추어적인 면이 조금 있었다. 그러나 그 '아마추어함'이 오히려 '개러지함'을 낳아서 개성적인 사운드가 연출되는 긍정적 효과도 있었다.
  17.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김창완의 기타는 완성되어 있었으나 김창훈의 베이스와 김창익의 드럼이 따라가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18. 대표적인 외국인 산울림 팬으로 장기하와 얼굴들의 기타리스트 하세가와 요헤이가 있다. 산울림의 앨범을 구하기 위해 한국을 드나들며 한국에서 음악을 하게 되었다고. 자세한건 항목 참조.
  19. 러닝타임이 무려 18분 40초에 달하는 한국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긴 노래. (사실 이 노래보다 더 긴 노래가 있다. 1973년 신중현과 더 멘이 발표한 '거짓말이야'란 노래로, 김추자가 불렀던 동명의 곡을 리메이크 한 것이며 러닝타임은 23분정도 된다.) 3집 B면을 이 곡 하나로 채웠다. (당시 LP판 한 면의 최대 재생시간이 20분 쯤이라 그 정도로 멈췄다고 한다.) 게다가 A면에는 9분짜리 노래가 하나 들어가 있어서 3집에는 5곡의 노래밖에 없다. 김창완은 훗날 인터뷰에서 당시 회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언제 이런 피시도를 해보겠냐' 는 생각으로 강행했다고 회고했다. 실제 1970년대 수많은 록밴드들이 'Iron Butterfly' 의 17분짜리 싸이키델릭 'In-A-Gadda-Da-Vida' 를 즐겨 연주했고 기타리스트의 실력을 재는 하나의 척도였다. 산울림은 카피만 하지 말고 우리가 직접 만들자는 방향을 보여준 것이다.
  20. 김창훈 작곡의 곡으로 샌드페블즈가 대학가요제에서 먼저 발표했으나 이후 산울림 2집에 실리게 된다.
  21. 두 명 모두 군악대로 입대했는데 군복무 기간 김창익의 드럼 실력이 일취월장했다고 작은형 김창훈이 밝힌 바 있다.
  22. 응답하라 1988 OST.
  23. 아이유가 리메이크한 그 곡이다.
  24. 식품공학과 출신의 김창훈은 해태에, 기계공학과 출신의 김창익은 대우자동차에 입사했다.
  25. 밴쿠버에서 김창익은 식품회사를 운영하다가 사고가 난 날, 눈이 많이와 직원들에게 사고 위험이 있으니 리프트(지게차) 사용을 하지마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예상치 않게 낮 12시쯤 물건이 들어 와 직원들의 안전을 우려해 본인이 직접 나서서 지게차 운행을 하다가 그만 눈길에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고 한다.
  26. 아침창에서 김창완이 X디 대신 창완아저씨로 불리게 된 것도 관련이 있...는 듯?
  27. #
  28. (로엔반은 마스터 유실때문에 몇몇곡은 지구 레코드 cd음원을 그대로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