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십삼경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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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아래에서는 주로 '상서'로 씀.)
1.1 개요
유교의 십삼경 중에 하나로 요순시대,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왕들이 내린 포고문, 신하들의 상소, 왕의 연설문 등 각종 정치문헌을 모아둔 것이다. 공자가 편찬하였다고 전한다. 본격적인 역사서는 아니지만 어쨌든 당대의 국가기록을 정리한 것이라 역사서라고 분류하기도 하며, 중국 전통 산문의 전범으로 꼽히기도 한다.
원래는 정치문헌들을 그냥 문서란 의미의 서(書)라고 불렀는데, 전한 시대에 유학이 국가이념이 되자 존중의 의미를 담아 상(尙)자를 붙여 상서라고 불렀다.[1] 이후 송나라가 되면 삼경에 든다는 의미로 서경(書經)이라고 칭해졌다.
1.2 텍스트의 정립
1.2.1 금문상서 vs 고문상서
공자가 편찬했다는 이야기가 도는 물건이니, 당연히 분서갱유로 인해 상서는 대다수 경서와 함께 소실되었다.[2] 진나라의 통치가 끝나고 한나라가 들어선 뒤에도 진나라 때의 협서율(挾書律)[3]이 해제된 혜제(惠帝) 이전까지는 복구되지 못했고, 한 문제(文帝) 때에 비로소 박사 복승(伏勝)[4]이 암송하고 있던 상서 29편을 당시 통용되던 글자인 예서(隸書)로 기술하여 복구하였다.[5] 이것을 금문상서(今文尙書)라고 하며, 경제(景帝) 때 학관에 세워졌다.[6]
그런데 무제(武帝)가 즉위한 이후, 공자가 살던 집을 헐어보니 벽 안에서 춘추전국시대 당대의 과두문자로 쓰인 상서의 죽간이 발견되었다. 이것을 고문상서(古文尙書)라고 하는데, 이때 공자의 후손인 공안국(孔安國)이 고문을 해석하고 그에 따른 전(傳)[7]을 지었다.
금문상서와 고문상서는 텍스트의 내용에서 차이가 있었고, 따라서 해석 또한 다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후 고문을 지지하느냐 금문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파가 나뉘어 치열한 논쟁(금고문 논쟁)의 막이 올랐다.[8] 이 과정에서 고문상서는 전한 성제 때에 학관에 입관되기는 하였으나 고문학파에 의해 왕망(王莽)의 찬탈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후한에서는 다시 학관에서 퇴출되었다. 그러나 민간에서의 연구는 더욱 지속되어서 후한 시대에는 대체적으로 고문의 전성기였다고 평해진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전한 시대까지는 금문학파가 우세하였으나 후한 시대에는 고문학파가 그와 대등한 위치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고, 상서 또한 그러한 기준에 따라 금문상서와 고문상서의 권위가 각기 다르게 부여되었다고 할 수 있다.[9]
1.2.2 매색의 고문상서
그러던 중 위진시대에 와서는 고문상서는 아주 완전히 소실되어 버렸다. 동진때 매색(梅賾)이라는 사람이 고문상서 58편을 찾아다 황제에게 올렸다. 당나라때는 공영달(孔穎達)이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하면서 매색의 것을 토대로 금문과 고문을 모아 해석을 붙여 재구성하면서 지금의 통행본 상서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통행본 상서는 그 자체로 텍스트 상의 문제점이 많았다. 매색 당대에는 물론 이후에도 꾸준히 그 논의가 지속되었는데 심지어 주희(朱熹) 같은 경우에는 아예 고문상서 자체의 위작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복승의 금문은 이해하기 어려운데 공안국의 고문이라는 것은 어찌 더 쉽고 분명한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정도로 상서 자체의 텍스트 비평이 꾸준히 이어졌다.
이러한 흐름은 이후 명나라때 매작(梅鷟)과 청나라때 염약거(閻若璩)에 의해 절정에 이르러 이때가 되면 이미 통행본 상서, 그러니까 매색의 고문상서는 완전히 '위작'으로 낙인이 찍혀 위고문상서(僞古文尙書), 혹은 가짜 고문상서라고 불리게 되었다. 특히 염약거는 《고문상서소증》(古文尙書疏證)을 지어 통행본 상서 뿐 아니라 고문상서 자체를 가짜라고 입증하였다. 이 설은 동시대의 모기령(毛奇齡)의 《고문상서원사》(古文尙書寃詞)라는 글을 통해서 반박되기도 하였으나, 상서에 대한 대세를 거스르지는 못했고, 이러한 흐름이 조선에도 전해져 정약용에 의해 《매씨서평》(梅氏書平)으로 정리되어 통행본 상서의 텍스트 자체로서의 가치는 이미 위서로 결론이 났다.
한편, 2006년에 고문상서가 포함된 전국시대 죽간이 홍콩의 유물시장에서 나타났고, 2008년 자오웨이궈(趙偉國)가 죽간을 구입하여 모교인 칭화대학(清華大學)에 기증하였다. 자오웨이궈가 모교 청화대에 기증한 죽간은 청화대에서 소장,관리를 담당한다고 하여, 청화전국간(약칭 청화간)으로 부른다. 청화간의 내용 중에는 상서 20여편과 일주서와 유사한 문헌과 그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문헌이 있었다. 청화간 중 매색의 고문상서와 비슷한 제목인 걸 비교해보니 매색의 고문상서가 100% 위서인 것이 완전 입증되었다. 참고로 청화대에서 고문으로 된 글을 금문으로 해독한 고문상서 11편이 있으니, 위키문헌에 있다. 다만 중국어 위키문헌이라서 아직은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다.링크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서의 가치 자체가 완벽히 부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전 서술에서는 통행본 상서가 매색에 의해 이리저리 짜집기 되면서 텍스트로서의 가치가 상실되었다고 하고 있지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엄밀히 말해 상서의 텍스트 자체에 대한 비평은 금고문 논쟁이 일어나기 한참 전인 맹자(孟子) 시대에도 있었던 만큼[10] 종래의 유학자들도 텍스트 자체에 대한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텍스트의 위작 여부보다도 중요한 것은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상서'가 갖고 있던 정치철학적 가치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지식인들이 상서를 통해서 각종 정치 원리를 언급하였던 사실은 상서의 내용이 전근대 동아시아 정치 철학의 원류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특히 상서의 위작 입증 과정에서 하나의 화두였던 16자 심법(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조차도 그 텍스트의 진위가 의심받았을 지언정, 그 원칙 자체가 부정당한 적은 없었다. 곧, 상서 자체의 중심적인 가치는 그 텍스트의 실제성 여부보다도 그 텍스트가 담고 있는 '정치적 원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상서에 언급된 정치적인 수사들이 곧, 전근대 동아시아 정치의 흐름에 큰 역할을 한다는 측면에서 상서라는 텍스트 자체의 중요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3 구성
상서는 4서(書) 4요(要) 6체(體)로 구성되어 있다. 4서는 상서의 큰 줄기가 되는 분류로써 우서(虞書), 하서(夏書), 상서(商書), 주서(周書)의 4개 대단원을 말한다. 4요는 상서에 나타난 편집의 큰 원칙으로써 천문, 지리, 도서(圖書), 윤리를 말한다. 4요는 이후 동아시아 역사 서술에서의 편집 원칙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6체는 서술의 방식을 말하는데 전(典), 모(謨), 훈(訓), 고(誥), 서(誓), 명(命)의 6가지를 말한다. '전'은 공자가 말한 요(堯), 순(舜) 두 제왕에 대한 글을 말하며, '모'는 군주와 군주의 고굉지신(股肱之臣)이 서로 정치에 대해 논의한 것을 글로 옮긴 것이다. '훈'은 백성과 신료를 훈계하는 글이고, '고'는 천자가 제후에게 내리는 당부의 글이며, '서'는 천자가 하늘에 맹세하는 글이다. '명'은 대신에게 내리는 천자의 명을 말한다. 여기에 더하여 10례(例)를 거론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6체에 정(征), 공(貢), 가(歌), 범(範)을 포함하여 일컫는 말로 각기 정벌, 조공, 헌가, 전범 등을 의미하긴 하나 상서의 구성에서 자주 거론되는 범주는 아니다.
1.4 내용
상서의 내용은 명덕신벌(明德愼罰)로 규정할 수 있다. 이것은 주나라가 은나라를 정벌한 후 집권층에서 천하 통치를 위해 고심한 결과라고 하며, 본래 군주의 자계(自戒) 였으나, 후세에 경서의 권위가 높아지면서 역대 제왕등리 지켜야 할 전범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특히 여기서 '명덕'에 대한 관점들은 이후 주희에 의해 《대학》의 해석에 활용되면서 성리학적 정치 철학의 큰 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또한 유덕자(有德者)와 천명(天命)을 중시하고 있으며, 천자가 실덕하면 외명(畏命)이 내려 천명의 주재자가 바뀌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맹자》로 이어지면서 역성혁명의 전거(典据,말이나 문장의 근거가 되는 문헌상의 출처)로 활용되었다. 특히 이러한 내용은 상서와 주서에서 자주 보이는데, 상서나 주서의 내용 대부분이 탕왕(蕩王)과 무왕(武王), 주공(周公)과 관련이 있는 내용으로 은나라와 주나라의 성립을 천명과 연계하여 정당화하려는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시 여기서 천명의 이동과 보존에 대한 큰 원칙이 바로 애민(愛民)과 중민(重民)으로 대표되는 민본사상(民本思想)인데, 여러모로 유교적 정치 원리로써의 '민본주의'의 원류[11]라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이 외에도 정치와 관련된 여러 개념어들의 출전이기도 한데, 이러한 개념어들은 모두 국가의 개혁 과정에서 개혁세력이 왕을 높이거나, 혹은 국왕 주도에 의한 개혁 과정에서 그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용어로 활용 되었다. 조선 후기 정치사의 큰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탕평(蕩平), 황극(皇極)은 모두 상서를 출전으로 하고 있는 말이며, 이것이 군주권 강화와 군주 주도의 개혁을 설명하는 텍스트로 활용되었다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2 고려시대의 장관 벼슬
고려시대 6부(= 조선 6조)의 벼슬 이름. 한자는 1번 항목의 상서와 같은 尙書다. 중앙관제의 장관급 벼슬로 조선의 판서에 해당한다. 즉 고려의 이부상서는 조선의 이조판서인셈. 아울러 고려 육부의 차관은 시랑이며 조선 육조의 참판에 해당한다.
고려 성종 14년인 995년에 육부제 시행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다 충렬왕 1년인 1275년에 명칭이 바뀌었고 이후 이런저런 변화를 거치다가 고려말에 육조의 판서로 바뀌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진다.- ↑ 이 의견은 정현의 설이다. 공자의 후손이자 고문상서의 권위자였던 공안국은 자신이 지은 《고문상서》 서(書)에서 상(尙)자를 상(上)과 동일시하고, '상대(上代, 상고시대)'의 문서라는 뜻으로 '상서'라 이름하였다고 하였다.(‘尚’者, 上也. 言此上代以來之書, 故曰 ‘尚書’。)
- ↑ 주역을 제외한 대다수의 유경이 소실되었다.
- ↑ 민간에서 책(書)을 소장(挾)하지 못하게 한 법. 진시황이 BC 213년에 제정한 법으로 알려져있다.
- ↑ 복생(伏生)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있다. 자는 자천(子賤). 한국식으로 읽을 경우 성과 자를 합치면 공자의 제자 중 한명인 복자천과 같지만 당연히 다른 인물이다.
- ↑ 이때 복승에게서 상서를 배워 예서로 기술한 이가 조조(晁錯)다.
- ↑ 금문(今文). 말 그대로 오늘날의 글자라는 뜻이다.
- ↑ 원래 동양에서 경전(經傳)은 하나가 아니었다. '성경현전'(聖經賢傳)이라고 해서 '성인의 말씀' 혹은 '기록'인 '경'을 '현인'이 해석한 '전'으로 나누어서 파악한 것이다. 따라서 '전'이란 경에 대한 1차적 해석서로서의 성격으로 파악되었다.
- ↑ 대표적으로 이러한 논쟁에 휘말린 텍스트로는 《상서》 이외에도 《춘추》 3전, 《의례》, 《주례》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춘추좌전》이나 《주례》 같은 책은 고문에만 존재하였다고 한다.
- ↑ 기본적으로 금고문 논쟁은 하나의 경서만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고, 유경 전반에 걸쳐서 일어난 논쟁이었던만큼, 그중 하나의 경에 대한 논쟁만을 소개하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상대적으로 더욱 치열하게 논쟁이 붙었던 것은 역시 아예 한의 정통성을 해석하는 근거였던 춘추에 대한 논쟁이나 종법적 질서의 재구현을 위한 근거였던 의례를 둘러싼 논쟁이었으며, 결정적으로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금문상서와 고문상서가 모두 소실되어 그 상세한 내용을 알기가 꽤나 어렵기도 하다.
- ↑ 맹자는 "상서를 완전히 믿는 것이 상서가 아예 없는 것만 못하다."고 혹평하고 있다. 즉 상서 자체의 텍스트 문제는 전국시대에 이미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 ↑ 절대 민주주의 아니다. 민본주의를 민주주의와 엮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이상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