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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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처럼 얼굴이 좀 길다.

1 개요

본관은 대구. 자는 계중, 호는 귀천,동원. 남원부사 정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찬 문유(文裕)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종옥(宗玉)이며, 어머니는 이집의 딸이다. 시호는 충문이다.

조선 후기 영,정조 시기의 문신

소론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비타협적 강직함을 지녔던 인물로 정조를 도와주었던 문신 중 하나이다.

2 영조 시기

1753년(영조 29) 생원이 되고, 1763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곧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에 처음으로 제수되고, 다음날 왕의 특명에 의해서 교리가 되었다. 1764년 홍문관 관원들이 올린 소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홍낙명(洪樂命) 등 8인과 함께 갑산부에 일시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재기용되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부교리·풍산만호(豊山萬戶)·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등을 역임하였다. 1767년 지제교(知製敎)의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에서 우등해 말을 하사받았고,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기도 하였다. 이 후 부교리·승지를 거쳐 1769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삼촌이 피체되자 연루되어 체직당하였다. 이어서 이조참의·대사성·대사헌·승지·부제학을 역임하고 이조참판이 되었다.

3 서명선의 상소

영조 말에는 세손이었던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하겠다고 했지만 당시 실세였던 좌의정 홍인한이 이를 거품물고 반대하며 세손(정조)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누가 이판이나 병판에 적합한지 알 필요가 없고 조정일에 대해서 알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세손의 대리청정을 압박하는 형세를 취했던 것인데 영조가 분통을 터뜨리고 세손도 사양하는 소를 써야겠다면서 홍인한에게 부탁해도 홍인한이 무시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영조는 대리는 포기하고 대리에 준하는 명을 내렸고 이것마저도 사양하려는 소를 쓰려고 해도 홍인한은 또 무시하고 홍인한과 한패인 정후겸과 화완옹주도 홍인한의 행보에 동조하자 세손(정조)이 홍인한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려고 했는데 홍국영이 자칫 위험해진다며 만류하면서 대신 올릴 사람을 찾아보겠다고 했는데 이때 찾은게 당시 이조참판인 서명선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상소 한장으로 인생역전을 한다.[1] 12월 3일 상소를 올리자 영조는 신하들을 불러 그에게 상소문을 읽게 하는데 영조가 "대내에서 한 말을 신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라고 한 자나 누군며 뭔 뜻이냐?" 라고 묻자 홍인한이 한 말이라 하고 비판을 하는데 이에 영조가 다른 신하들에게 (홍인한에 대한) 생각이 어떻냐고 묻자 다들 "그냥 서명선에게 출처를 묻죠?" 라고 하자 영조가 단호하게 "그런거 관계없이 그냥 시비만 말해라" 라고 했는데 다들 머뭇거리자 서명선이 "그거 세손저하께서 쓴 상소에 있던 구절입니다" 라고 했다. 이에 영조가 세손의 상소를 보았고 사태 파악이 된 영조가 눈치나 본 신하들을 파직하면서 사태는 정리되었다. 더이상 대리청정에 밴대할 명분이 사라진것이다.[2] 이 상소로 예조-병조-이조순으로 판서를 맡고 석달뒤 영조가 승하했다.

4 정조 시절

홍국영,정민시,이진형과 더불어 그를 구명하는 상소를 올려 홍인한을 공격하고 세손을 구해냈던 인물로 후일 이를 기리기 위해 만든 동덕회[3]의 주축 멤버이기도 하다.[4] 정조는 매년 정기적으로 서명선이 상소를 올렸던 12월 3일에 이들과 술자리를 가지며 이를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이후 홍국영이 탄핵되어 사라지면서[5] 정조 등극에 크게 공을 세운 공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면서도 소론이라는 희소성 때문에 준론탕평을 내세웠던 정조가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정조 대에 군사권을 지닌 수어사와 총융사를 두루 거쳐 우의정과 영의정, 영중추부사까지 역임한다.[6] 소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행보를 노론벽파와 함께할 때가 많았는데 이 때문에 채제공을 매우 싫어하여 정조가 그를 중용했을 때 노론과 더불어 그를 탄핵하는데 앞장섰으며 "채제공과 한 하늘아래 살 수 없고 그가 역적이 아니면 신이 반좌율을 받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자신도 노론벽파에게 공격당해 정조 8년 왕은 서명선을 영의정에 김종수를 이조판서에 앉혀 탕평을 기대했는데 강경벽파인 심환지가 서명선을 탄핵했고 이에 분노한 정조가 김종수를 불러 혼을 낸다. 이후 채제공을 발탁하려 할때 정조가 달랜다.

여담으로 형인 서명응 역시 유명한 인물로 규장각의 최초 제학을 맡았고 사도세자의 호위대인 세자익위사 세마, 사도세자와 정조의 스승을 역임하였다. 형제가 더불어 정조에게 사랑을 받은 셈.[7]

5 사후

이후 정소 15년에 죽는데 벽파의 입장을 따랐음에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기에 강경벽파들이 추탈하라는 상소를 올리는데 이에 순조 1년 대왕대비가 그가 상소를 올린 12월 3일을 택해 "오늘이 무슨 날이냐? 공을 세운 제 1인은 고 영부사 서명선이다. 대간이 그의 죄를 논하는데 그가 논하는것보다 더 큰 죄를 지어도 그냥 용서하는게 옳지 않겠나? 왜 공 있는 이들을 탄핵하는지 모르겠다." 라고 하교했고 이후 서명선 탄핵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6 기타

이 사람의 후손이 후일 임원경제지라는 실용백과사전을 써서 유명해진 풍석 서유구이다.
  1. 역당으로 낙인찍히다시피한 소론 출신으로서 이병모,이시수와 더불어 정승까지 한 몇 안되는 사례가 된다.
  2. 홍인한이 심상운을 시켜 대리청정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지만 외려 심상운은 흑산도로 유배갔다.
  3. 이외의 핵심멤버로 사부 김종수,충신 정민시,경호실장+참모 홍국영 등이 있다. 일종의 공신모임이었던 셈.
  4. 그지만 초창기에 정조는 서명선보다 홍국영의 공을 더 높이 평가해서 홍인한을 옹호하는 윤약연을 잡아 국문하자 그가 홍국영을 해치려는 뜻이 있다고 하자 "서명선의 상소는 종사를 위한 계책이니 중요하나 한손으로 하늘을 떠받쳐 사직에 공이 있게된 홍국영에 비하면 처진다." 라고 했다. 사실 서명선 자신도 홍국영의 부탁(사실은 정조의 부탁)을 받고 올린것이니 엄밀히 말하면 홍국영의 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5. 사실 홍국영이 물러나기 전 홍국영을 다시 불러들이라는 요구가 있었는데 그 성격탓인지 전횡을 일삼는 홍국영을 못마땅하게 여겨 동참하지 않았다가 그쪽 사람들에게 "저 인간 형은 역적 홍계능에게 아부했고 아들이란 자식은 역적 홍계능이 유배갈때 울었습니다." 라고 공격했지만 정조의 마음이 이미 홍국영에게서 떠나서 실패했다. 이후 서명선은 홍국영이 죽자 그와 손을 잡았던 송덕상을 탄핵해 관직삭탈을 당하게 한다.
  6. 영조 승하 당시만 해도 참판이던 사람이 정조 1년 우의정을 맡았는데 상소를 올릴때가 참판인걸 생각하면 특진인건 맞다.
  7. 정작 서명응은 정조시절에 사도세자의 관서행을 상소한 경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