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파

조선의 붕당
훈구파사림파
동인서인
북인남인소론노론
대북소북청남탁남준론완론시파벽파
* 붉은 계열은 강경파, 푸른 계열은 온건파


僻波
사도세자의 추숭에 반대하면서 정조의 정책에 반대한 정파

1 개요

벽파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오빠인 김귀주와,정조의 사부였던 김종수, 심환지 등을 중심으로 한 노론청명당의 일원이 중심을 이루었다. 주로 영조 재위기의 척신이었던 홍인한과 홍봉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정조가 즉위한 후 김귀주는 또다른 척신을 우려한 정조에 의해 숙청당했지만 청명당은 그대로 정조에게 등용받았다.[1] 그러나 정조가 사도세자의 추숭을 목적으로 남인을 등용하고 왕의 뜻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세력을 이루어 시파가 되자 의리를 중시하는 청명당은 강경반발하면서 벽파가 되었다.[2][3] 그랬음에도 정조는 준론탕평의 자기 원칙에 힘입어 그들을 대우했고 말년엔 심환지를 기용하고 어찰을 주고 받으면서 자신의 본래 정체성은 벽파라는 커밍아웃(...)을 하기도 한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신유박해를 일으켜 남인을 제거하고 시파를 조정에서 내쫓으면서 원내 제 1당이 되었으나.. 정순왕후 사후 다시 시파에 밀려 조정에서 쫓겨났다.[4]

2 벽파의 역대 영수

  1. 일단 벽파의 당수였던 김종수는 김귀주와 친한 사이였지만 본디 그는 척신정치 청산을 외친 사람이고 정조의 사부이며 정조 즉위에 큰 공을 세운 동덕회의 일원이었다.
  2. 벽파가 직접적으로 사도세자에 죽음에는 책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서지 않은 것은 그것이 채제공의 남인이 내세우는 논리였기 때문이다. 즉 남인은 '사도세자의 죽음은 본인의 과실이 아니라 모함이었고 그것을 일으킨 것은 당시의 조정세력이다' 라는 논리를 폈고 그렇게 되면 당시의 집권당인 노론연산군때의 갑자사화처럼 쓸려나갈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3. 사실 시파는 남인이나 벽파와 달리 자기 이념이 없는 비당파적 당파였다.
  4. 심환지가 이미 순조 3년에 사망해 영수가 사라졌고 정순왕후가 순조 4년에 물러났고 같은해애 순조 1년에 권유가 올린 권유의 소에 의해서 벌어진 대혼 저지 기도사건으로 인해서 권유,이안묵,정재민등 명망 인사들이 제거되고 이듬해에 정순왕후가 사망하고 우의정 김달순의 발언(핵심 요지는 벽파의 주장을 옳다고 못박자는 얘기다.)으로 인해 김달순, 김관주 등 벽파 지도부가 사라졌으며 8자흉언사건으로 아예 벽파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김종수, 김귀주가 역적으로 낙인찍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