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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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720년 ~ 1799년)

정조의 총신

남인 최후의 영수

1 소개

채제공(蔡濟恭)(평강[1]채씨)[2]은 조선 후기의 문신, 호는 번암(樊巖),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영조와 정조 때 살았고 당색은 남인이며 시파에 속한다.

2 생애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나 ,영조 19년에 병과로 과거에 급제했다. 동부승지 시절 사도세자의 후견인이 되어 사도세자가 영조와의 갈등이 심각해졌을 때 이를 중재해 주는 역할을 주로 했다.[3] 그래서 영조가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나중에 세손(정조)에게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임오화변때에는 모친상을 당해 내려가 있어서 사도세자를 돕지 못했다.[4] 그 이후 정조 때에는 홍국영과도 잘 아는 사이었고[5]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하여 선왕(영조)의 정책을 부정했다는 등의 공격을 받아 이후 서울 근교 명덕산에서 8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그럼에도 정조는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중용했으며 정조 10년에는 평안병사에 제수했고[6] 정조 12년 2월에는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정조 14년에는 좌의정에 그리고 정조 19년에는 영의정을 역임했다.

2.1 노론 벽파와의 갈등

과거 남인은 숙종시절 갑술환국으로 사실상 박살났고 따라서 조정은 벽파가 원내 다수당이었다. 채제공은 이 판을 뒤집고 조정을 다시 남인 주도로 돌리기 위해 수시로 사도세자의 추숭을 건의했고 이에 따라 노론 벽파(특히 이들의 수장이었던 김종수)와는 극한 대립의 관계였다. 영의정이 된 이후 사도세자의 추숭을 건의하다가 바로 벽파의 역풍을 맞은 적도 있었다.[7][8]

2.2 업적

이조전랑의 권한인 통청권과 자대권[9]을 없애 당쟁을 완화했고, 또한 신해통공[10]을 제정해 자유로운 상업의 발달을 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이 정책으로 조선 후기의 경제가 크게 발달했다.[11]

3 사후

1799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정조는 상당히 애통해하였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백성을 걱정하는 한 생각뿐이었는데, 이제 채제공이 별세했다는 비보를 들으니, 진실로 그 사람이 어찌 여기에 이르렀단 말인가. 내가 이 대신에 대해서는 실로 남은 알 수 없고 혼자만이 아는 깊은 계합이 있었다. 이 대신은 불세출의 인물이다. 그 품부받은 인격이 우뚝하게 기력(氣力)이 있어, 무슨 일을 만나면 주저없이 바로 담당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굽히지 않았다. 그 기상을 시(詩)로 표현할 경우 시가 비장하고 강개하여, 사람들이 연조 비가(燕趙悲歌)의 유풍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여 이때부터 영고(寧考)(영조)께 인정을 받아 금전과 곡식을 총괄하고 세법(稅法)을 관장하였으며, 어서(御書)를 윤색(潤色)하고 내의원(內醫院)에 있으면서 선왕의 옥체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매양 주대(奏對)할 적마다 선왕의 웃음이 새로웠는데, 그때는 그의 수염이 아직 희어지지는 않았었다.내가 즉위한 이후로 참소가 여기저기서 빗발쳤으나 뛰어난 재능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는데, 극히 위험한 가운데서 그를 발탁하여 재상 지위에 올려 놓았었다. 이어 내각(內閣)에서 기사(耆社)로 들어갔고, 나이가 80이 되어서는 구장(鳩杖)을 하사하려고 했었다.[12] 그 지위가 높고 직임이 나와 친근하였으며, 권우가 두텁고 은총이 성만하여 한 시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입을 못 열고 기(氣)가 빠지게 하였으니, ‘저렇듯 신임을 독점했다고 이를 만한 사람으로서 옛날에도 들어보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50여 년 동안 조정에 벼슬하면서 굳게 간직한 지절은 더욱 탄복되는 바인데, 이제는 다 그만이구나.죽은 판부사 채제공 집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의당 관례에 의거해서 거행하되, 승지가 치조(致吊)하는 일은 홍 영부사(洪領府事)[13]의 전례에 의거해서 하고, 내각의 속관을 보내어 상제(喪制)를 돌봐주는 일과 호상(護喪)하는 등의 절차에 대해서는 각신(閣臣)과 대신(大臣)의 전례에 의거해서 할 것이며, 성복일(成服日)의 치제(致祭)는 승지가 스스로 의당 거행할 것이나, 내각의 치제에 대해서는 또한 김 봉조하(金奉朝賀)[14]의 전례에 의거하여 제문(祭文)을 지어 내리기를 기다려서 각신을 보내 거행하도록 하고, 녹봉은 3년 동안 그대로 보내주도록 하라. 그리고 장사지내기 전에 시호를 의정하도록 하라."하였다. - 정조 23년(1799) 1월 18일의 기사

정조 사후에 1801년 그는 벼슬이 삭탈관직 되었으나 1823년에 다시 원상복귀되었다.

4 기타

채제공의 초상화를 보면 왼쪽 눈이 바깥쪽으로 돌아가 있는데 잘못 그린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시였다. 이것을 소재로 하여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김홍도와 신윤복이 상상만으로 초상화를 그리는 대결을 할 때, 고명한 정승의 초상화를 사시로 그리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공격을 받자 채제공 본인(!)이 등장해서 사시인 것을 인증하고 김홍도&신윤복 팀의 승리를 확정짓게 된다. 이 때 채제공 역할을 맡은 단역 배우가 정말로 채제공과 닮았다.

드라마 소설 목민심서에서는 배우 전무송이 맡았다. 하지만 망했어요(...)

드라마 이산에서는 배우 한인수가 맡았다. 처음엔 비중이 있을 것 같았지만, 뒤로 가면 갈수록 공기화.(...)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서는 배우 김익태가 맡았다. 애초부터 비중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기에 여기도 안습(...)

1990년대에 나온 학습만화 중 따옥이 만화 채근담이라는 책에서는 전혀 뜬금없고 어처구니 없는 모습으로 왜곡되어서 나왔다. 어린 시절 천재여서 기대를 받았으며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 자리를 받아 출세했다가 젊을 때부터 청탁도 받고 일은 하지 않고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며 놀다가 그 소식을 들어 분노한 왕에게 벼슬을 박탈당하고 쫓겨나면서도 후회하기는 커녕 여전히 정신을 못차리고 신나게 웃으면서 모아둔 돈이 많다며(관직에 있어서 녹봉을 받아 재산이 많았던 걸 수도 있지만 먼저 언급된 청탁 부분으로 뇌물을 잔뜩 받아서 재산이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평생 놀 수 있다고 계속 술을 마시고 기생집에 가면서 여자를 끼며 놀다가 늙어서 재산을 다 날리고 집까지 팔아서 초라한 오두막에서 늙어죽어 인생을 망쳤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왜곡되어서 나왔다.(검색해보면 그림 파일은 찾을 수 없지만 텍스트로 남은 글은 있다.) 후손들이 분노해서 항의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내용이었고, 실제로 후손 측에서 해당 출판사인 파랑새에 항의해서 출판사는 사과하고 내용을 바꿨다고 한다.
  1. 현재는 북한 땅이다. 단 유일하게 남면 정연리는 수복되어 현재 철원군 갈말읍에 편입되어 있다.
  2. 본 항목의 이전 버전에서도 그랬고 적잖은 사람들이 '채'제공인지 '체'제공인지 헷갈려 하는 경우가 많은데, '채'제공이 맞다. 대한민국에 채씨는 있어도 체씨는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덜 헷갈린다.
  3. 영조 34년에는 사도세자를 폐한다는 교서를 내렸는데 당시 승지였던 채제공이 눈물까지 흘리며 만류하는 통에 그만두었으나 1년 뒤엔 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4. 하지만 있더라도 결국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5. 하지만 친하다고 보기엔 무리인게 1779년(정조 3년) 홍국영과의 마찰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던 적이 있었다.
  6. 남인 채제공의 복귀에 노론 벽파와 소론 벽파인 서명선 등이 손을 잡고 격렬하게 탄핵하였고 서명선은 아예 "저놈이 역적이 아니면 제가 역적입니다!"라고 선언할 정도였다. 서인연합? 하지만 이 것도 채제공이 이전에 하던 벼슬의 높이를 생각하면 별 거 아니다.
  7. 벽파가 직접적으로 사도세자에 죽음에는 책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서지 않은 것은 그것이 채제공의 남인이 내세우는 논리였기 때문이다. 즉 남인은 '사도세자의 죽음은 본인의 과실이 아니라 모함이었고 그것을 일으킨 것은 당시의 조정세력이다' 라는 논리를 폈고 그렇게 되면 당시의 집권당인 노론연산군때의 갑자사화처럼 쓸려나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8. 모함은 실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세자 제거의 주체는 영조라는 게 정설이지만(임오화변 참조) 정조와 시파가 세자를 신원하고 추숭하려는 마당에 선왕이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책임은 노론에게 돌아간다. 남인은 이걸 노리고 추숭 지지파인 시파로 들어간 거기도 하고.
  9. 통청권은 정 3품 이하의 관리 추천,자대권은 자기 후임의 지명
  10.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전의 특권(금난전권 등)을 박탈해 자유로운 상권 보장. 육의전은 비단ㆍ무명ㆍ종이ㆍ모시ㆍ생선ㆍ명주등을 말한다.
  11. 물론 당연하지만 시전 상인들은 채제공의 행차까지도 막으면서도 원상복귀를 호소했지만 정조까지도 채제공만큼이나 이 정책을 지지해서 결국 신해통공이 이루어졌다.
  12. 이것을 하사받는건 신하로서는 최상의 예우를 받는 셈이다.
  13. 정조의 모친 혜경궁 홍씨의 6촌 형제이자 영의정을 지닌 홍낙성이다. 그는 1년 전인 1798년에 세상을 떠났다.
  14. 좌의정을 역임한 김종수이다. 그는 노론 벽파의 거두로서 체재공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다. 하지만 심환지와 같은 강경파는 아니었으며 사안에 따라서는 협력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체제공보다 11일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거의 열흘 간격으로 두 당파의 핵심 지도자가 사망한 것은 유례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